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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대 트레일 중 가장 길고 험하다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이하 피시티) 4300km. 미국 LA 문화단체 '컬쳐앤소사이티' 기획으로 고난의 행군을 자처한 한국 하이커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 기자말
 
High Sierra에서 웨딩드레스 입고 아름다운 호수 앞에서 찍은 허니문 사진 ⓒ 박준식
  
'하와이 가서 풀 빌라 리조트나 빌려 와인이나 마실 걸, 내가 미쳤지.'
 
미국 서부 종단 4300km 트레일, 피시티(Pacific Crest Trail, 아래 피시티)를 걷기 시작한 지 145일째다. 캘리포니아주를 출발해 오리건주를 지나 북부인 워싱턴주에 들어섰다. 캘리포니아가 사막과 강한 바람이 특징이라면 오리건주는 크고 작은 활엽수가 펼쳐진 부드러운 여성 같은 곳이다. 그에 비해 워싱턴주는 굵고 키 큰 아름드리나무에 눈과 비가 자주 내려 영화 <쥬라기 공원>을 연상시킨다.
 
적응도 됐을 법한데 매일 밤 다리 근육이 조여 잠을 통 못 잔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매일 걷고 걸어도 목적지는 끝이 없다. 반복되는 지루한 풍경에다, 비나 안개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짜증은 극에 달한다. '도대체 왜 온 거지' 혼자 투덜거리며 걷는다. 산은 골탕이라도 먹으라는 듯 한층 더 심한 오르막을 선사한다. 이런 비현실적인 고난은 상상 안에 없었다.
 
"또 시작이네."
 
반려자 앤지가 나를 향해 푸념한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었다. 앤지는 스윙댄스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닉네임이 앤지였다. 프랑스어로 천사를 뜻하는 '안젤라', 줄여 앤지라 불렀다. 피시티에서는 서로 '트레일 네임(Trail name)'이라는 별명을 지어 부른다. 제2의 자아다. 내 트레일 네임은 고로다.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속 주인공 이름이다.
 
쥬라기 공원 워싱턴쪽 숲은 고사리과 식물이 많아 더욱 신비함을 자아낸다. ⓒ 박준식
 
사찰 주지 스님 로비해 얻은 결혼 승낙
 
피시티를 떠나기 한 달 전인 2018년 3월 11일 우리는 결혼을 했다. 아내와 5년 간 연애를 했지만 내가 중소기업을 다니는 등 변변치 않은 조건 때문인지 아버님은 결혼을 쉽게 승낙을 하지 않으셨다.

아버님이 다니는 한 사찰에 몰래 찾아가 주지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천도제를 지내기도 했다. 노력의 결과였을까. 아버님이 나를 한번 보고자 하셨다. 서울의 한 카페. 아버님이 처음 건넨 말이 잊히지 않는다.
 
"결혼하려니 참 힘들지?"
 
피시티 여행은 아버님의 결혼 승낙 전 이미 아내와 약속한 일이었다. 아내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과 홍콩 란타우 트레킹을 다녀오는 등 걷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딱히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관악산을 오른 뒤 뒤풀이 자리에서도, 햇살 따스한 날 연남동 커피숍에 앉아서도 종종 이야깃거리로 피시티가 올라왔다.

그리고, 피시티를 주제로 한 영화 <와일드>(Wild)를 보고 결행을 각오했다.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의 탐험 정신이 놀라워서가 아니다. 더위, 눈사태, 심지어 성희롱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앤지를 혼자 두게 할 수 없었다.

한인 하이커의 돌연사, 팀 코리아 결성
 
지난해 4월 11일 미국 서부 샌디에이고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서 피시티 관련 책과 유튜브를 보며 연구했지만 완벽히 준비할 수 없었다. 필요한 물건은 겨울 상품이라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장비가 많았다. 텐트랑 침낭 정도만 챙겨가고 나머지는 현지에 가서 사기로 하고 출발했다.

샌디에이고에 도착해 피시티 엔젤 '스캇 앤 프로도' 집에서 2박 3일을 묵었다. 피시티에는 자원봉사자인 '피시티 엔젤(PCT Angel)'이 활동한다. 텐트를 칠 수 있도록 집 마당을 내놓기도 하고, 밥도 해주기도 하며 히치하이킹도 무료로 해준다. LA에서는 한인 피시티 엔젤도 있다.
 
스캇 앤 프로도 집에서는 마당에 텐트를 치고 자야 하지만 주인장은 우리가 신혼부부라는 것을 알고 침대 방을 내주었다. 허니문 특혜였다. 변호사였던 스캇은 피시티 협회(PCT Association) 임원으로 10년을 일한 뒤 은퇴 후 피시티 엔젤로 활동하고 있다. 피시티를 출발하는 하이커들에게 하이킹 중 주의사항과 규칙을 알려준다. 매일 아침 피시티 출발지점인 멕시코 국경지대 캠포까지 차로 데려다 주기도 했다.
 
두 번째 날 아침이었다. 며칠 전 출발했던 한인 하이커 4명이 집으로 돌아왔다. 운행 중 한인 하이커가 돌연사 해 뒷수습을 위해 온 것이었다. 다들 쇼크가 와 멍한 모습이었다. 같은 날 오후 3시에는 한인 여자 하이커 3명이 트레일 도중 복귀했다.

그 중 2명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경험이 있었지만 장비가 허술해 되돌아왔던 것이었다. 나는 그 친구들과 함께 아웃도어 가게에 가 장비를 하나 하나 골라줬다. 이 인연으로 우리는 트레일을 함께 걸었다. 훗날 외국인 하이커들은 우리를 '팀 코리아'라 불렀다.
  
Team Korea 소중한 인연 ⓒ 박준식
  
초코바냐 육포냐, 그것이 문제로다
 
아내와 장거리 하이킹은 수월하지는 않았다. 먼저 하루에 얼마만큼 걸을 것이냐 조율을 해야 했다. 한 번은 사막 구간을 걷는데 발이 너무 뜨거웠다. 나는 몇 km만 더 걷고 텐트를 치자고 말했다. 하지만 체력 좋은 아내는 더 가자고 했다.
 
"왜 너만 생각해! 나는 네가 아프다면 멈췄잖아!"
 
아차. 감정이 격해지다 결국 짜증을 냈다. 서로 말 안 하고 삐쳐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원래 목적지까지 걸어갔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반복됐다. 그러고는 좁은 텐트에 누워 굿 나잇 키스를 하며 화해를 했다.
 
먹는 것 때문에 많이 싸웠다. 굶주려 있다 서로 입에 들어가 있는 음식을 뺏어 먹기도 했다. 몰래 상대방의 물을 훔쳐 마셨다. 아내는 장난이었다고 했지만, 과연 장난이었을까?
 
다음은 '왜 안 먹냐'로 다퉜다. 나는 술을 좋아해 하루 한 번 폭식하는 습관이 있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피시티에서는 3시간 단위로 쪼개 먹어야 버틸 수 있다. 나도 피시티를 걷기 전 음식을 나눠 먹겠다고 아내와 약속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좋아하는 음식도 달랐다. 아내가 초콜릿바를 좋아한다면 나는 육포를 좋아했다. 한번 마을에 나가면 5~6일치 식량을 사서 배낭에 넣고 다녀야 한다. 그 때문에 상품의 무게와 칼로리, 유통기한을 따져 식량을 사야 한다. 무엇을 고르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의 독백보다 더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
  
아 덥고 지친다 걷다 지쳐 텐트 안에 누워버린 신혼부부 ⓒ 박준식
 
매일 이동하는 산속 1평짜리 신혼집
 
부부 하이커로서 즐거운 일도 많다. 일과를 마치고 텐트를 칠 때 일사불란하게 역할을 나눠 움직일 수 있었다. 내가 텐트 칠 자리를 정하고 주변 나무와 돌을 옮겨 주변을 정리하면 아내는 텐트 내 짐 정리를 하고 음식에 쓸 물을 끓였다. 처음에는 텐트 치는 법도 잘 몰랐지만 분업 덕분에 모든 일에 속도가 빨라졌다. 나중에는 밥을 먹고 같이 누워 휴대전화에 저장해 둔 영화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짐도 나눠질 수 있어 좋았다.
 
가장 큰 장점은 심리적 위안이다. 다리가 아파 잠을 못 잘 때면 아내는 말없이 다가와 진통제를 건네줬다. 그래도 아파 뒤척이면 멘소래담을 발라줬다. 잠이 스르륵 왔다. 중간에 잠을 깨도 아내 손을 잡으면 기적같이 잠이 왔다. 아내가 비닐 베개에 바람을 불어넣어 주는 것도 고마웠다. 야생 속 작은 텐트는 우리의 신혼방이었다.
 
좁지만 행복한 신혼집 텐트안 신혼집이 때로는 좁게도 느껴지지만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다 ⓒ 박준식
 
- 2편으로 이어집니다.
태그:#PCT, #신혼여행, #트레킹, #박준식, #웨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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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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