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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에서 이어집니다.

"너희들 진짜 미쳤구나. 그런데, 나도 같이 찍어도 돼?"
 
운행 84일째, 나는 누더기가 된 등산 바지를 입고 구린내 나는 청록색 긴 팔 남방 위에 나비넥타이를 맸다. 수염은 얼굴을 덮어 설인 같았다. 아내는 얼굴이 새카맣게 타서 안쓰러울 정도였다.

아내는 목적지에 미리 소포로 보냈던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캘리포니아 북부 시에라 시티(Sierra City)의 우체국 앞에서 웨딩사진을 찍었다. '그지 같은 꼴'로 웨딩사진을 찍고 있으니, '난 역시 도라이야', 웃음이 피식 났다.
   
오레건주와 워싱턴주를 잇는 '신들의 다리'. 지나가는 하이커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 박준식
 
우리는 경치가 좋다는 곳에 미리 웨딩드레스와 나비넥타이를 소포로 보내 사진을 찍었다. 수염은 설인을 넘어 산타클로스가 돼 갔다. 빨간 나비넥타이를 매도 수염에 가려 잘 보이지가 않았다. 옷도 신발도 색이 바라고 너덜너덜해졌다. 아내 얼굴에는 주근깨가 늘어간다. 등산화에 웨딩드레스. 듣도 보도 못한 언밸런스한 조합이었다. 하지만 은근히 꿀조합이었다. 다크초콜릿에 고춧가루, 딸기에 발사믹 소스 같은 것이랄까.
   
웨딩드레스는 갈수록 지저분해져 갔다. 박스에 넣어 다음 목적지로 보내거나 직접 배낭에 넣어 다니다보니 얼룩이 생겼다. 한 번은 라면스프가 웨딩드레스에 범벅이 됐다. 아내가 드레스를 입고 돌아다니면 어디에 있는지 냄새로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때로는 라면스프 냄새가 내 몸 악취를 덮어줘 고맙기도 했다.
 
사진을 찍을 때면 항상 다른 하이커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가와 같이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물론 누구든지 가능하다. 우리는 쉽게 친구가 됐다. 하이커들은 우리를 "크레이지 커플"이라고 불렀다.
  
아내가 웨딩드레스를 어렵게 갈아입고 있다. 행인(왼쪽)이 신기한듯 쳐다본다. ⓒ 박준식
 
야생에서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까지
 
신혼 부부라는 '특이사항' 때문에 하이커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 한 번은 중부캘리포니아 시에라를 걷던 중,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 행사를 보기 위해 마을로 나가기로 했다.

마침 우리 이야기를 들은, 영화배우 톰 크루즈를 닮은 60대 하이커 에릭이 차를 렌트했다며 요세미티 국립공원(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북부 캘리포니아의 숲)에 같이 가자고 했다. 우리는 좋다 싶어 차에 올라탔다.
 
에릭은 62살이었다. 미국 3대 트레일이라 불리는 피시티, 애팔레치아 트레일(AT, 미 동부), 콘티넨털 디바이드 트레일(CDT, 북미 중서부 최장 트레일)을 모두 걸은 '트리플 크라운' 하이커였다. 미국 유명 등산용품 매장인 알이아이(rei)에서 24년간 일한 산악 전문가이자 프리랜서 사진작가이기도 했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연도별, 장소별로 정리한 풍경 사진이 가득했다.
 
그의 옛 이야기. 에릭이 애팔레치아 트레일을 걷고 있던 때였다. 그날은 유난히 춥고 식량도 떨어져 생고생을 한 날이었다고 한다. 가까운 마을로 가 암 투병 중이던 어머니에게 오랜만에 안부 전화를 했다. 그런데 이상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암이 재발해 투병 중이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트레일 위에서 어머니와 간간히 연락을 했지만 소식도 없이 돌아가실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까봐 병이 악화하고 있는 것을 숨겼던 것이다. 어머니 사망 소식을 뒤늦게 들은 에릭은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고향이 아닌 트레일로 복귀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에릭과 함께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압도적인 곳이었다. 거대한 바위산 꼭대기에는 부드러우며 묘한 무늬가 그려 있고 수 만년 전 빙하가 있던 흔적이 거친 바위에 남아 있었다. 봉긋 솟은 바위산 사방에는 숲이 펼쳐 있다.

우리는 차를 타 다시 유명 관광지인 데스벨리 국립공원에 갔다. 이어 '거지꼴'로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다. 10달러짜리 옷을 사입고 휘황찬란한 밤거리를 활보했다. 관광객들 사이에 섞여 있자니 정말 신혼여행을 온 기분이 들었다.
 
지나가는 트럭을 붙잡아 타고 마을로 향하고 있다. ⓒ 박준식
  
눈앞에 나타나 성큼성큼 다가오는 흑곰
 
워싱턴주 래이니패스(rainy pass)를 5km쯤 남겨둔 구간이었다. 아내와 나는 항상 2~3m 정도 거리를 두고 앞뒤로 걷는다. 그날은 아내가 앞에서 걷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목석처럼 갑자기 멈춰 섰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다가갔다. 아내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검은 나무토막이 놓여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광경이었다.
 
"자기야 곰!"

그런데, 아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무토막인 줄 알았던 것은 키가 3m쯤 돼 보이는 흑곰이었다. 바로 4~5m 앞에서 우뚝 서 있었다. 곰은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 심장 박동수는 더 쿵쾅쿵쾅 뛰었다. 아, 여기서 끝인가.

나는 아내를 뒤로 물리고 뛰지 말라고 말했다. 뒤돌아 도망치다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나는 제자리에 서서 등산용 스틱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 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살금살금 뒷걸음질했다. 곰은 뭔가 고민하는 것 같더니, 숲으로 슥 들어갔다. 죽을 뻔 한 순간이었다.
    
산행 중 마주친 곰. 멀리서 보면 커다란 나무 토막 같다. ⓒ 박준식
  
운행 145일째, 워싱턴주 스티븐스 패스(Stevens Pass)를 10km 남겨둔 지점이었다. 주변에 야생 블루베리와 허클베리가 많았다. 트레일을 걷던 중 2m 앞에서 부스럭거리며 시커멓게 일어섰다. 키 1.5m, 청소년 곰쯤 돼 보였다. 등산스틱으로 치면 닿을 만한 거리였다.

우리가 뒤로 천천히 물러나자 일어섰던 곰은 네발로 앉았다. 다시 앞으로 가니 또 일어섰다. 지나가려고 하면 경계 태세를 보였다. 그러다 옆에 키 1m도 안 되는 어린 새끼 곰이 한 마리 나타났다. 이건 더 위험한 순간이다. 주변에 어미곰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때 어미 곰으로 추정되는 울음소리가 몇 번 울렸다. 새끼 곰들은 소리를 향해 사라졌다.

완주는 결과물이 아닌 부산물
 
9월 30일 밤 9시 45분. 최종 목적지 캐나다 매닝파크 모뉴먼트(Manning Park Monument)에 다다랐다. 원래 하루 뒤에 가려고 했지만 눈이 비로 바뀌어 무리를 해서 더 걸었다. 당일 최장거리인 62km를 찍었다. 4월 15일 출발한 대장정은 무려 169일만에 막을 내렸다.

캐나다 국경지대인 매닝파크 모뉴먼트 근처에 텐트를 치고 하루를 묵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비가 계속 내렸다. 우리는 마지막 웨딩사진 촬영을 위해서 옷을 갈아입고 모뉴먼트(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말의 두 배나 돼 보이는 덩치 큰 엘크 한 마리가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수고했다며 우리를 축하해주는 것 같았다.
  
해발 4009미터 캘리포니아 포레스터 패스에서 찍은 웨딩사진. ⓒ 박준식
 
피시티를 걷다 만난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피시티에서의 6개월이 부부로서 평생 추억이 될 거라고. 나에게 완주는 결과물이 아닌 부산물이다. 여러 마을과 축제, 사람을 만나며 평생 잊지 못할 영감을 받았다. 감사, 위로, 따듯함, 기적 등 짧아도 강한 단어들 말이다. 피시티 여정이 세상을 보는 눈을 180도로 바꿔 놓았다.
    
4개월 뒤 우리는 서울 신혼집에서 첫 설날을 맞이했다. 결혼하고 처음 양가를 방문했다. 격식을 차리고 장인 장모께 인사를 드렸고 뻔하고 뻔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잔소리도 들어야 했다. 설 연휴가 통째로 증발한 것 같았다. 앞으로 이것을 계속해야 하니 갑갑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이야기했다.
 
나 "그래도 지금이 PCT보다 덜 힘들지?"
아내 "그렇지. PCT에 비하면 별 것 아니지."
태그:#피시티, #웨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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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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