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화려한 파란색" 옷의 여인은 대체 누구일까? 2011년 오키나와 류쿠대로 부임하게 된 오세종은, '야카수용소 사건'을 들춰보다, 일본인 병사 미스키가 "옛 일본군 위안부"로 짐작되는 한 여인을 이렇게 지칭한 것에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대체 이들은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호기심은 오키나와 전쟁사를 탐구하게 했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불가시화' 된 존재들을 발견하게 한다. 바로 '위안부'와 '군부'로 불린 조선 사람들이었다. 오세종의 <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는 이들 '군부'와 '위안부'들의 흔적을 추적한 역저다.

오키나와에서 사라진 조선 사람들
 
'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 - 조선인의 '가시화/불가시화'를 둘러싼 역사의 담론.
 "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 - 조선인의 "가시화/불가시화"를 둘러싼 역사의 담론.
ⓒ 소명출판

관련사진보기

 
오키나와의 배봉기를 기억하는가. 고 김학순 운동가의 일본군 위안부 증언이 있기 전, 최초로 일본군위안부의 피해를 증언한 여성이다. 오키나와에 일본군 위안부가 배봉기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조센삐'라 멸칭된 수많은 조선 위안부 여성들이 존재했다. 일본에도 조선에도 속하지 못한 채 무국적자의 신분으로 살다 스러진 이들의 존재는 오키나와에서 철저히 지워졌다.

오키나와 현지 여성들을 강간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하에 미군정과 오키나와는 조선 여성들이 미군 위안부가 되는 것에 공모했다. 그녀들은 미군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조선인 남성까지 상대해야 했다.
 
"오키나와 전쟁 당시에 조선에서 여성들이 끌려와서 일본군의 성 노예가 되었던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45년 이후에도 그녀들을 무시해 온 오키나와 사람들. 우리는 우리들의 차별 체질을 방관하고, 일본 정부에 대해 차별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p271)
 
 
오키나와에서 온갖 궂은 일을 다해가며 살아남아야 했던 배봉기는 60세가 되던 1975년, 원조를 받지 않으면 도저히 삶을 꾸려나갈 수 없게 되자, 특별체류자격 취득 신청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숨기고 살아온 그녀의 역사가 드러나게 되고, <류큐신보>와 <오키나와타임즈>에 그녀의 이야기가 처음으로 실리게 된다.

무국적자인 그녀는 법적으로 특별재류 지위를 얻을 수 없었다. 오키나와인들이 그녀의 보증을 서고서야 법무성은 그녀에게 특별재류허가를 부여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한국 언론을 통해서도 보도되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 이유는 그녀를 죽을 때까지 돌보아 준 이들이 조선총련 김수섭과 김현옥 부부였기 때문이었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작동한 이념적 대립은 국가 폭력의 희생자인 배봉기를 두 번 죽게 했다.
 
"배봉기의 존재는 국가폭력, 식민지주의, 남북 분단이 중첩된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상징성을 갖는다."(p274)
 
 
책에 따르면, '1999년 한국유족회가 오키나와로 연행되어 온 조선인 '군부' 2815명의 명부를 발견... 생환이 확인된 것은 650명이었다'고 한다. 군부만 그렇다는 것이고 위안부는 집계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생환되지 않은 군부들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은 오키나와를 본토 방위의 방파제로 삼는다. 비행장과 군호 등 군사건설 현장에 많은 인력이 필요하게 되자, 조선 남성들을 대거 모집 오키나와로 실어간다. 이들은 주로 경북에서 모집되었고, 1944년에서 1945년 사이 오키나와로 징용된 남성들은 1만 5천에 이른다.

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군부'였다. 군인처럼 군복을 입기는 하나 무기는 주어지지 않은 채 온갖 노역에 시달렸다. '우마'와 다를 바 없었던 이들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행장 등의 건설 현장에 맨 몸으로 투여되어 일해야 했고, 참혹한 수준의 배급은 기아로 굶어죽는 이들을 속출하게 했다. 일본은 병, 부상 등으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군부들은 가차 없이 내다버렸다. 도망하면 무자비하게 사살당하기 일수여서 탈출을 감행하기도 어려웠다.

일본은 오키나와인들을 조선인들과 분할시키는 정책으로 관리했다. 조선인은 노예나 다름없고 삼등국민이라는 식민지주의는 오키나와인들로 하여금 조선인을 멸시하게 만들었다. 조선인이 오키나와인들 보다 열등하다는 식민지 질서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게 했고, 이 정점에 '구메섬 조선인 학살 사건'이 있다.

오키나와 전쟁 당시 일본군은 '스파이 공포증'에 휩싸여 있었다. 미군 상륙에 대비해 섬이 요새화되면서 군민이 뒤섞이게 되자, 군사기밀이 쉽게 주민들에게 노출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자 주민 모두를 잠재적인 스파이로 간주하기에 이른다. 이 정점에서 다니카와 노보루라 불리던 구중회가 스파이 혐의를 받고 온 가족이 몰살되기에 이른다. 생후 수개월이 채 되지 않은 아기까지 일가족 7명이 처참히 학살되었다.

구중회는 구메섬에서 냄비와 솥을 수리하거나 일용잡화를 팔면서 생계를 꾸렸다. 그가 일용잡화를 팔며 이곳저곳 돌아다닌 것이 스파이라는 오인을 받은 원인이었다. 놀라운 것은 구중회를 스파이로 지목한 것이 바로 섬 주민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조선인 왠지 모르게 불결하고, 더럽고, 게다가 무서운 사람들로 생각했어요."
(p65) 이 발언이 말해주듯, 내면화된 위계질서가 복합적으로 작동하며 구씨 일가를 희생시키게 했다.

오키나와 내부의 저항운동이 가시화한 조선인 담론 공간

미군에 의해 접수된 오키나와는 미군의 동아시아 전초기지로 그 역할을 다하게 된다. 냉전체제는 오키나와 내 반미적 행동을 모두 '공산주의'로 몰아붙이며 주민들의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킨다. 오키나와의 20% 이상이 미군 기지로 이용되면서 주민들의 삶이 침해받게 되자 미군의 통치를 받던 주민들은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라는 운동을 벌이게 된다.
 
일본으로의 '복귀운동'은 베트남 전쟁에 오키나와가 미군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게 되면서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일본으로의 복귀를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반미, 반전, 반기지를 주장하는 것으로 눈앞의 미군, 그리고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보다 실천적으로 저항해 나간다. 그리고 복귀운동 전면에 내세운 것은 아니지만, 오키나와의 조선인을 가시화하는 토양이 되었다."(p163)
 
베트남전에 오키나와가 가담하고 있다는 성찰은 시선을 내부로 돌리게 한다. 자신들을 피해자라고만 생각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가해자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이미 앞서 도미야마 준이치가 '도쿄타워 점거 사건'을 벌이면서 조선인에 대한 오키나와인의 내부 차별을 고발했던 것의 연장선이다. 식민지 질서 속에 자신들이 조선인들을 어떻게 보아왔고 대해왔는가를 돌아보는 일이야말로, 피해자성을 극복하는 탈식민지주의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담론 공간은 오키나와 전쟁 당시 조선인에 대한 증언을 등장하게 하며 새로운 기록 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담론이 군에서 민으로, 주민들의 목소리를 담기 시작하자, 철저히 불가시화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오키나와의 가해성과 그들의 식민지주의를 묻는 일이야말로 탈식민주의 '민중 담론'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전후, 전쟁 체험을 말하고, 전쟁에 대한 반성을 이야기할 때, 피해 사실은 비교적 많이 언급해왔지만, 전쟁 가담을 강제한 측면을 추동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p200)는 성찰은 민중 담론의 태동을 알린다.

한국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

저자는 오키나와에 존재하는 많은 비와 탑들을 소개하면서 논고를 마무리하는데, 각 비나 탑이 만들어진 경위나 역사가 바로 '불가시화' 된 존재들을 소환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비나 탑이 조선 군부와 위안부를 위령하는 것이 아니듯이, 오키나와의 탈식민지 담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저자가 '가시화/불가시화'의 메커니즘을 소제목으로 가져온 이유는, 오키나와 역사 속에 조선인 '군부'와 '위안부'를 불가시화한 구조를 성찰하는 일이야말로, 내부의 차별과 배제의 메커니즘인 식민지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탈식민지성으로 회복된 시민성만이 민중 담론의 방향성을 온전히 가져갈 수 있기에 그렇다. 새롭게 펼칠 평화운동이 '불가시화' 된 존재들을 어떻게 가시화시킬 것인가에 주목하면서 저자는 책을 맺는다.

<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의 주요 화두인 탈식민지화한 시민성의 출현은 작금의 한국 사회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벌인 양민 학살과 성폭력, 불가시화된 '라이따이한'의 존재를 우리의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여전히 국가적 차원의 사과와 배상을 행하지 않는 한국의 태도는 일본군 위안부와 군부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본의 태도와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또한 현재 한국에 들어와 있는 난민들을 '나쁜', '무서운' 존재로 혐오하는 한국인의 시선은 어떤가? 일제가 차별과 배제의 식민지 분리정책으로 조선인을 2등 국민으로 만들었던 시점으로부터 한국인은 과연 얼마나 진일보한 국민(시민)성을 확보하고 있는 걸까?

오키나와에서 스러진 수천명의 조선인들의 희생을 말하기 위해 우리가 선행해야 할 일은 우리 안의 식민지성을 돌아보는 일이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더 나은 역사를 선택할 수 있다.

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 - 조선인의 '가시화/불가시화'를 둘러싼 역사의 담론

오세종 (지은이), 손지연 (옮긴이), 소명출판(2019)


태그:#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 #일본군 위안부 , #조선인 군부, #배봉기 , #오키나와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