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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씩씩하시네요."
"아팠다고요? 하나도 안 아플 것 같은데."


타인들이 내 몸(건강)에 대해 하는 말이다. 귀가 닳도록 들었다. 나의 무엇이 그렇게 보이게 하는 건지, 들을 때마다 당혹스럽다. 실상 내가 느끼는 내 몸은 그들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 한마디로 여기저기 아프다. 하지만 이런 시선에 붙잡혀 버리면 여간해선 아프다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꾀병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질까봐서다. 아픈데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심정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잘 아파보자'는 책이 나왔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는 이른바 '질병권'을 설파하고 있는데, 의학자의 지식적 권위에 기대지 않은 채, 지은이가 자신의 병을 관통하며 기록한 '몸 일기'다. 그래서 오히려 의학자의 선험적 지식보다 공감하기 쉽다. 아픈 자의 고통을 아파본 자만큼 정통할 수 있는 자, 누구겠는가.

저자 조한진희는 몸 이곳저곳이 몹시 아프다. 평화 연대활동 차 팔레스타인에 삼 개월 머물다 온 후, 몸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과 분쟁 중인 팔레스타인은 각종 독성물질로 심각하게 오염된 지역이다.

지은이는 어느 날 종합검진에서 갑상선암 진단을 받는다. "아, 이래서 아팠구나" 했지만, 그녀가 아픈 모든 원인이 갑상선암 때문이라는 확신을 어느 의사도 주지 않았다. '종합'병원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에서 몸은 유기체가 아니었다. 마디마다 하나하나 분절된 채 존재했다. 몸을 구획해 들여다 보는 현대 의학은 몸 전체를 조망해내지 못함을 느꼈다.

저자는 1인 가구여서 어려움이 더 컸다. 돌봐줄 이 없는 비혼 가구 환자의 고독과 두려움은 자신의 몸을 성찰하게 했다. 그녀의 성찰은 설명되지 않는 질병의 고통에 어떻게 언어를 부여할 것인가, 질병은 왜 불온한 시선으로 낙인 받는가, 질병은 왜 개인화되는가, 1인 가구의 건강권은 어떤 정책으로 보완돼야 하는가 등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설명되지 않는 아픈 몸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표지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표지
ⓒ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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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다 아프게 된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길이 없음에 막막하다. 갑상선암에 동반되는 증상 외에도 쉴 새 없이 고통이 몸을 조여오자, 그녀는 자신의 몸을 '질문하는 몸'으로 재구성한다.
 
"나는 몸을 소외시켰고, 질병은 나를 소외시켰다." (p187)

고통을 통제하려 하면 할수록 고통에 포획되는 것을 깨닫자, 지은이는 질병 몰아내기를 그만두고, 질병과 한몸이 되기로 작정한다. '몸이 곧 나'인데, 나를 부정하고 소외시킨 채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몸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렇다면 표준이 되는 건강한 몸은 어떤 기준으로 형성되는 것일까. 각기 다른 몸의 상태가 반영되지 않은 표준은 이에 도달하지 못하는 수많은 몸을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배제시킨다.
 
"흔히 질병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의학적 기준으로만 결정되는 것 같지만... 질병에 대한 판단도 사회적 의식과 가치의 영향력을 벗어나 진공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 (p196)

오랫동안 의료화의 문제에 천착해온 사회학자 피터 콘래드는 그의 저서 <어쩌다 우리는 환자가 되었나>에서, "건강에 대한 정의는 사회적으로 부여되고, 탄력적이며, 궁극적으로 신기루"라고 했다.
 
"현대사회에서 건강은 개인의 스펙이 되었고, 건강관리는 내면화된 윤리가 되었다." (p291)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할 정도의 각종 운동과 건강식품이 트렌드로 부상하고, 힐링마저 회복이 아닌 자기계발의 과제로 주어지는 현실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건강이 삶을 향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통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치 몸만 건강하면 행복을 보장받기라도 하듯.

건강하지 않으면 모두 불행한 걸까. 신자유주의 사회의 몸은 아플 권리도, 아프지 않을 권리도 상실했다. 건강이 삶의 중심이 된 세상에서 모두 건강하기 위해 안달하지만, 불행히도 모두가 건강할 수는 없다.

통제 당하는 질병
 

건강 스펙을 탑재하지 못한 아픈 사람은 뭇사람으로부터 걱정을 가장한 끝없는 감시와 통제를 당한다. "질병은 사회적 환경, 유전적 요소, 생활습관 등이 복합적으로 작동해 나타난 결과"(p83)다. 하지만 아픈 사람은 성격이 예민해서, 평상시 몸을 관리하지 않아서, 잘못 살아서라고 함부로 재단 당한다. '네 탓으로 아픈 것이니 회복도 너의 의무'라는 논리가 너무도 손쉽게 성립되고, 질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다시 한 번 낙오하게 된다.

개인의 극복서사로 질병이 존재하는 한, 누구도 '질병의 개인화'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질병이 단지 개인의 탓이라면, 수많은 '황유미들'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쓴 역학의학자 김승섭은 질병의 원인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특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질병을 유발하는 사회적 원인 또한 고정물이 아니며 역사 속 정치 경제 문화의 토대 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질병의 원인의 원인을 찾아내는 '원인의 그물망'을 들여다봐야만 질병에 제대로 다가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질병은 젠더와도 매우 밀접하게 교차한다. 여성의 경우 남성에 비해 같은 질병이더라도 '심인성'으로 분류돼, 항우울제나 항불안제를 처방받는 비율이 매우 높다. IMF 당시 해고율은 여성(43%)이 남성(9.7%)에 비해 월등히 높았음에도, 사회적 분위기는 '고개 숙인 남자' 신드롬을 형성하며 남성의 아픔을 여성이 돌봐야 한다고 압박했다. IMF 당시 부당하게 해고된 후 큰 병을 얻고도 가족을 건사하느라 투병할 권리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책 속 여성의 사례는, 젠더화된 질병이 여성의 아플 권리를 얼마나 심각하게 침해하는지를 선명히 드러낸다.

아파서 찾아간 의사에게 아무 이상 없다는 진단을 받는 것은 어떤 일일까? 의학적으로 진단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파도 아플 권리를 박탈 당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진단명이 나와야만 그나마 '올바른 환자'로 인정받는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배가 아프던 친구는 수개월 병원 유랑 끝에 자궁근종이라는 진단을 받자 오히려 마음이 놓이더라고 했다. 수술과 치료에 대한 걱정보다, 왜 아픈지 알게 돼서, 진짜 아픈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게 돼서 마음이 한결 후련해진 듯했다. 인정받지 못한 질병이 부적절한 환자라는 낙인을 주었던 탓이다.

올바른 환자가 되기 위해 진단받고자 하는 욕망은 의료화를 재촉하고, 의학을 통한 사회통제는 그 목적을 손쉽게 달성하게 된다. 성격을 질병화하고, 더 크고 더 젊고 더 예쁘기 위한 자기계발적 의료화는 다국적 제약기업들 이익에 복무한다. 몸에 대한 주체성을 망실한 채.

잘 아플 권리를 위하여
 

지은이 조한진희는 때로 사람들이 건네는 위로가 아픈 자신의 고통과 조우하지 못하는 경험을 한다. 건강하지 않은 채 계속되는 삶이라도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는 없을까? 그녀가 제시하는 여러 대안을 읽어내려가며 '이렇게 하면 좋겠네' 하고 무릎을 쳤다.

우선 지하철역 등에 약자 쉼터를 마련하자는 제안은 신선하다. 몸이 영 좋지 않을 때, 공공 쉼터가 있다면 누구라도 잠시 쉬어갈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아픈 사람 대하기'라는 팁도 일러준다. 병에 대한 버거운 정보를 남발하지 않기, 과도한 희망으로 격려하지 않기, 질병을 재단하지 않기, 웃으라는 식으로 환자의 표정과 기분을 교정하려 들지 않기 등이다. 다른 몸의 다양한 질병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건강보험제도의 보장률을 높이기 위한 방안도 제시한다. 국민 건강보험료가 가구당 평균 9만 원인 반면, 민간의료보험료로 지출되는 비용은 가구당 34만 원이다. 개인당 1~2만 원만 더 부담한다면 사보험에 기대고 있는 기형적인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1인 가구 환자로서 애로를 겪었던 저자는 1인 가구끼리의 '건강두레'를 제안한다. 몸이 아플 때 서로를 정서적으로 보살펴 줄 모임인 건강두레는, 돈을 매개하지 않는 일종의 상호부조 모임을 말한다.

아플 때 동행해주는 타인의 소소한 손길과 정서적 지지는 얼마나 절실한가. 혈연이나 친밀한 관계에만 가능한 '배타적 돌봄'이 아니라, 1인 가구 여성이라는 공통점으로 엮인 '열려 있는' 돌봄망의 시도는 현실적으로 시도해봄직하다. 현 가부장제 하의 돌봄노동에도 함의하는 바가 적지 않다.
  
지은이는 1인 가구가 건강에 취약한 이유를 돌봐줄 엄마나 아내가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다인 가구의 건강이 여성의 가사, 돌봄 노동에 철저히 기대어 유지되고 있다는 말이다.

정부가 1인 가구에 대한 일상 돌봄 서비스를 정교하게 구상한다면, 즉 건강을 유지할 책임을 가족에게 전가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가구의 출현은 1인 가구에도, 다인 가구에도 혁신을 일으킬 수 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돌봄노동과 가사노동이 탈가족화·탈젠더화된 사회"(p303)로 나아가는 것을 더 이상 미룰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1인 가구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나 정책은 1인 가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어쩔 수 없이 1인이 된 그들을 불행한 사람들로 조명하는 미디어의 방식은 비혼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1인 가구의 선택을 무화시킨다. 취약계층으로 뭉뚱그려진 1인 가구에 대한 정책은 집단에 대한 동정과 시혜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다양한 차이와 욕구가 존재하는 집단에 대한 정책으로 전환돼야 마땅하다.

누구나 아플 수 있다. 그렇기에 누구나 잘 아플 필요와 권리가 있다. 각기 다른 몸으로 겪는 다양한 질병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는 시작해봄직하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 어느 페미니스트의 질병 관통기

조한진희(반다) (지은이), 동녘(2019)


태그:#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조한진희, #질병권, #1인가구 정책, #질병의 탈젠더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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