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누가 이 불안을 극복해야 합니까? 바로 여기 있는 우리들입니다. 올바른 정치를 통해 불안을 희망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정치는 지금 어떤 모습입니까?"

불안과 공포, 자유와 책임에 대한 이야기가 국회의사당을 가득 채웠다. 지난 4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 자리에서다. 은명초등학교 화재사건과 인천의 수돗물 사태를 언급한 나 원내대표의 연설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자유와 책임의 정치로 경제를 살리고, 안보 위기를 극복하고, 나아가 민생을 회복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끝났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 사진은 지난 9일 정치·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이 열린 국회 본회의장에서 동료의원들과 대화 도중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
▲ 생각에 잠긴 나경원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 사진은 지난 9일 정치·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이 열린 국회 본회의장에서 동료의원들과 대화 도중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그날 하루종일 나 원내대표의 발언은 포털 검색어 10위 안에 들며 많은 이들의 관심을 샀다. 어떠한 이들은 나 원내대표의 연설에 공감을 표하며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고, 어떠한 이들은 나 원내대표의 연설에 고개를 저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전날(3일), 최저임금위원회 8차 전원회의에서 사용자 위원들이 2020년 최저임금액을 8000원으로 제시했다. 2019년 현재 최저임금액이 8350원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4.2%나 감소한 수치였다. 

최저임금 삭감안을 사용자 위원들이 제시한 것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5.8%의 삭감안이 제시된 이후 처음 발생한 일이었다. 사용자 위원들은 최저임금 삭감안에 대한 근거를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 속도와 실물 경제의 부진을 들었다. 
  
'불안'한 민생을 위한 정치?

이틀간 벌어진 두 가지 일들은 우리 사회에 상징적인 의미를 준다. 

첫 번째 사건(나경원 원내대표의 연설)이 정치가 '불안'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여준다면, 두 번째 사건(최저임금위원회 사용자 위원들의 최저임금 삭감안 제시)은 그 불안이라는 것의 정체를 반영한다.

나 원내대표의 말처럼 시대의 화두가 '불안'이라는 키워드로 집약될 수 있다면 불안 이후에 파생되는 것들은 불안의 덤처럼 우리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 '덤'이라는 것은 구원자를 자처하는 정치의 출현일 수도, 불안으로 파생된 분노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기는커녕 모욕과 모멸감으로만 남게 되는 현상일 수도 있다. 불안과 구원자로서의 정치와 그에 따른 결과는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며 나머지들을 강화한다.
   
근로계약 대신 자유계약을 부르짖는 나 원내대표는 민생을 위한 정치 세력을 자처했다. 마찬가지로 민생에 가장 거리가 먼 최저임금위원회 사용자 위원들은 소상공인에 대한 이야기를 어김없이 꺼내 들었다.

분명한 사실은 두 세력이 모두 그들이 대변하고자 하는 민생과 가장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말하는 '자유'와 '책임' 그리고 '정치'는 어떠한 사람을 향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자유와 책임은 어떠한 사람을 향하고 있는가 
 
최저임금 삭감안을 제시한 경총을 비판하는 1:10 운동본부의 기자회견 사진.
 최저임금 삭감안을 제시한 경총을 비판하는 1:10 운동본부의 기자회견 사진.
ⓒ 1:10 운동본부

관련사진보기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 근로계약 대신 자유계약을 외친다면, 그것은 너무 낮은 임금으로 과로사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주장일 뿐이다. 소상공인의 삶에 대한 '책임'으로서 최저임금을 삭감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실상 어떠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최저임금은 그가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최고임금이라는 사실을 감춘다.

마음껏 일할 자유가 논의되는 배경에 너무 낮은 최저임금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착취일 것이다. 국가의 책임이 마음껏 일할 자유와 기업의 자유, 시장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책임이 아니라 한편으로의 방종일 뿐이다.

책임과 자유라는 말이 더 권력을 가진 세력을 위해 사용된다면 그러한 정치는 새롭지도 올바르지도 않다. 자유와 책임 모두 사회적 관계 속에 정 반대의 속성으로 바뀔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두 단어를 사용한다면 두 단어는 무력하고 하나의 불행으로 귀결될 것이다.

구원자를 자처하는 정치가 아닌 새로운 정치를 위해

최저임금액 삭감안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노동계의 최저임금 1만 원 요구에는 철퇴를 내리는 정치는 구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불안을 추동해 지지를 얻어내는 오래된 방식의 정치는 어떠한 이들도 구원해내지 못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안을 조장하고 위협하며 지지를 얻어내는 사람들이 아닌, 대안과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정치일 것이다.

새로운 정치는 민생의 이름으로 거론되는 모든 개악의 요구들을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에게는 과로사할 자유 대신 자유롭게 살아갈 사회경제적 기반을 요구한다. 일하지 않을 자유가 일 할 자유만큼 존중되는 세상을 요구한다. 노동하지 않거나 노동할 수 없는 인간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경제력이 보장되는 책임 있는 사회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대안의 정치를 요구한다. 이것이 우리가 외치는 새로운 정치의 모습이다.

태그:#나경원, #자유한국당, #최저임금, #최저임금위원회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대 여성 정치에 관한 책 <판을 까는 여자들>과 <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를 썼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