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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영업자'

"민주씨, 이제 안 나와도 될 것 같아요. 편의점이 문을 닫게 되었어요. 그동안 수고하셨고 미안해요."

알바를 하는 나에게 GS 편의점 점장님이 전화를 걸었다. 고작 일한지 3개월이 되었을 때였다. 점장님은 일자리가 바로 필요하다면 아는 편의점 점장들에게 연락해서 계속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고, 점장님은 하루아침에 점포를 잃었다. 공통점은 우리 모두 생계 수단을 하루아침에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후로 망할 것 같은 매장에서는 잘 일하지 않게 되었다. 점포를 3개, 4개씩 돌리고 있다는 사장님의 말을 들으면 왠지 안도감이 들었다. 일자리를 하루아침에 잃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안도감이기도 하였고, 나의 처지뿐만이 아니라 사장님의 처지도 고민해야 하는 머리 아픈 상황에 놓이지 않겠다는 안도감이기도 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발렌타인데이에 설치한 매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발렌타인데이에 설치한 매대.
ⓒ 신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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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최저임금 8590원의 의미

오늘 새벽 내년 최저임금의 액수가 결정되었다. 올해 8350원보다 240원 높은 8590이었다. 2.87%라는 초라한 수치의 최저임금 1시간분의 인상률은 물가상승률보다도 낮은 수치였다. IMF 경제 위기 이후 가장 낮은 인상률로 최저임금위원회가 마무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저임금위원회 사용자위원들은 "금융위기와 필적할 정도로 경제 상황이 어렵고 최근 2년간 최저임금이 급격하게 인상됐기 때문에, 최저임금이 인상된 것은 아쉬운 결과"라는 입장을 밝혔다.

오늘의 결과로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최저임금 1만원 공약도,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계획도 폐기되었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알바노동자와 비정규직 등 최저임금을 받고 살아야하는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가난한 자영업자'에 대한 이야기를 어김없이 꺼냈다.

같은 날, 조선일보는 <"최저임금 또 올렸어?" 자영업자 한숨 "알바 내보내도 적자...가게 정리할 것">라는 제목으로 최저임금이 올라서 좌절감을 느끼는 자영업자에 대한 기사를 냈다. 해당 기사에서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알바를 줄여야하는 '가난한 자영업자'에 대해 다루었다. 비슷한 논리 구조를 가진 기사가 오늘 뿐만이 아니라 작년 한 해 많은 신문의 지면을 채웠다.
 
최저임금위원회 결정 이후 조선일보가 게재한 기사.
 최저임금위원회 결정 이후 조선일보가 게재한 기사.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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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인상 이후 키오스크를 사용하는 매장이 많아지며 알바 대신 키오스크를 사용하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광고가 성행했다. 알바 구인 기준이 점차 까다롭게 변하고, 알바 자리도 차지할 수 없는 청년들의 인터뷰 기사도 종종 보였다. 자영업자의 눈물과 최저임금 인상으로 일자리를 잃는 알바의 현실은 매년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으로 제시된다.

부작용을 없애기 위한 방면으로 사용자위원들은 늘 최저임금 동결의 카드를 꺼내들었고, 올해는 최저임금 삭감 카드를 제시하였다.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최저임금제도자체의 재고가 가능했다면 사용자위원들은 최저임금제 폐기를 요청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기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최저임금은 무엇이고, 그것의 진정한 '부작용'은 무엇인가. 최저임금의 부작용은 어떠한 공간에서 실현되는가.

최저임금과 최저임금의 부작용

최저임금은 어떠한 사람들에게는 최고임금으로 지급된다. 최저임금이 결정된 이후에도 계속되는 꼼수와 무력화를 위한 법안들은 이들을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인간으로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최저임금은 어떠한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임금이다. 최저임금의 인상 비율을 결정하는 일은 곧 한 개인이 어떠한 삶을 상상할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일이자 사회 속에서 개인이 타인과 비교하여 얼마나 평등하게 살 수 있을지 결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최저임금이 결정되는 시기 매번 화두에 오르는 '가난한 자영업자'의 존재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가난한 자영업자와 가난한 자영업자의 매장에서 일하는 알바노동자는 왜 대립되는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로 여겨지는가. 그리고 가난한 자영업자의 구제책은 최저임금을 삭감하거나 인상 속도를 낮추는 것밖에 없는가.

가난한 자영업자에게 연민과 동정심을 느껴야하는 존재가 그보다 더 가난한 알바노동자라면 우리는 언제까지고 가난을 경쟁하며 증명해보여야 하는 사회에 살아야 할 것이다. 가난한 자영업자의 손을 들 것인지, 가난한 알바의 손을 들 것인지 결정해야하는 지금의 최저임금위원회에서 말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이 테이블에서 승자는 따로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진정한 불행은 가난한 자영업자도,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고 일하는 알바도, 그리고 일자리 자체에서 탈락된 사람들도 최저임금위원회에서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영업자가 유일하게 관심을 받는 시기가 최저임금 결정 시기라면 "가난한 자영업자를 위해 최저임금의 인상폭을 좁혀야한다"는 말은 축복이 아닌 불행에 가까운 말이 될 것이다.

가난한 자영업자를 위한 조치가 오로지 최저임금의 조절만 있는 사회는 이들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다. 그러한 사회는 지나치게 높은 임대료의 문제와 본사가 자영업자의 손에서 빼앗아가는 비용, 그리고 일자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자영업의 길로 빠져야 하는 사람들의 처우를 고민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사회는 일자리가 점점 감소하는 사회 속에서 일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처우를 고민하지 않는다. 오로지 이들은 무능력하고 게으른 이들로만 치부되거나 최저임금 인상률을 조절해야한다는 주장에 땔감으로만 사용된다. 
 
1:10 운동본부가 지난 7월 최저임금위원회 사용자 위원들의 최저임금 삭감 제시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1:10 운동본부가 지난 7월 최저임금위원회 사용자 위원들의 최저임금 삭감 제시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1:10 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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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인상을 주저하는 사람들이 우려하는 최저임금의 진정한 '부작용'은 '불쌍한' 자영업자의 몰락이 아니다. 그보다 그들이 직면하게 될 이윤의 저하,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 자신의 주제를 알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오늘 최저임금 인상률이 IMF 위기 이후 가장 낮은 퍼센트로 결정된 현실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목도한 것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요구를 차단하고자 한 시도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한 사람들과 싸우게 만드는 논리 구조였다. 최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영원히 협상하고 요구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사회의 반응이었다.

언제나 모욕적 처사들은 그 의도를 감추고 발현된다. 모욕적 처사들의 의도를 끝끝내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가 마주하게 될 것은 그 모욕적 처사가 낳을 모멸감의 사회일 것이다. 무엇인가를 빼앗아가는 존재들의 선의를 믿는 것은 더 불행한 존재와 덜 불행한 존재들끼리의 대결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믿음만을 견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가난한 자영업자'의 존재를 앞세운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인간은 평등하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실현하기 위한 조치들이다. 이러한 기준을 견지할 때, 우리가 반대해야하는 것과 우리가 거부해야하는 것은 보다 명확해질 것이다.

태그:#최저임금, #최저임금 인상, #자영업자, #영세 자영업자, #859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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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성 정치에 관한 책 <판을 까는 여자들>과 <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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