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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2월, 우리 가족이 일주일 동안 머문 네덜란드 인상기다. 짧은 여행이라 영혼을 깨우는 깊은 통찰은 기대하지 못하더라도 무뎌진 감각을 꼬집어 잠자는 감성 정도는 일깨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씁니다. - 기자 말

흔히 네덜란드를 디자인 강국이라고 한다. 디자인이란 새롭게 만들거나 있는 것을 색다르게 변형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험의 영역이다. 수많은 실험과 시행착오 속에서 디자인은 완성된다. 로테르담은 시대를 이끄는 건축과 실험적인 건물들로 유명하다. 한마디로 건축의 실험실이다. 현대 건축의 많은 개념들이 로테르담에서 현실화되고 실용화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중에 네덜란드 출신이 많은 이유가 달리 있는 건 아니다. 머릿속에서 구상하던 상상건축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곳. 이런 곳이라면 건축학도들에게는 낙원이 아닐까. 이런 탓에 로테르담이 건축학도들에겐 성지라고 소문이 났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니, 영국 BBC 방송은 로테르담을 '건축 마니아에겐 디즈니랜드 같은 도시'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건축학도는 아니지만, 어떤 분야의 사람들이 성지라고 일컫는 곳이라면 일말의 경건함을 가지고 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길을 따라 걸었다. 로테르담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건물을 찾아서.

로테르담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건물
 
로테르담 시청
 로테르담 시청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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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지구를 사이를 걷다보니 시청이 나왔다. 1920년에 완공된 시청 건물은 세인트 로렌스 성당과 더불어 나치 공습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건물 중의 하나다. 전형적인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균형 잡인 대칭으로 안정을 도모하고 바로크적 장식을 배제하여 단아한 멋을 내고 있다.

불행히도 우리가 갔을 때는 수리 중이어서 건물 안의 중정(中庭)을 둘러 볼 수가 없었다. 좌우에 늘어선 현대식 공법의 차가운 건물 속에서 고전양식의 건물을 보자니 계곡 속에서 모락모락 김을 내뿜는 온천 같다.
     
시청에서 십 분 정도 걸어가니 오늘의 목적지인 마르크트할(Markthal: 영어식 표현으로 Market Hall)이 시야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시멘트 원통을 반으로 잘라 엎어놓은 모양이다. 누군가는 우주선 같다고 했지만 내 눈에는 형태도 색깔도 영락없이 하수도용 배관처럼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자 조금씩 면모를 드러낸다. 먼저 보이는 건 건물 테두리 안 공간을 막아 높은 유리면이다. 배관 덮개 비닐 같다. 그 유리면에 주변 풍경이 반사된다. 아마 태양의 각도, 날씨의 명도에 따라 풍경의 색감이 달라지리라. 이 또한 새로우리니! 로테르담에선 뭐든지 새롭게 해석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마르크홀 앞에 서자 나는 또 거대한 기하학적 면 앞에 마주선 꼴이 되었다. 중앙역이 삼각형이었다면 이번에는 반원이다. 원주는 두터운 시멘트이고 내부는 텅 비어 있다. 뭔가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레이덴이 전통적 동화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이곳은 SF의 시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마르크트할 외관
 마르크트할 외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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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완공된 마르크트할은 세계적인 건축회사 MVRDV의 작품이다. 1993년 로테르담에서 설립된 건축 및 디자인 회사 MVRDV는 수명이 다하거나 변화하고 있는 도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목하고 있다. 혁신적 디자인을 통해 솔루션을 제공하고 미래 도시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MVRDV는 '서울로 7071'과 '광교 도심 공원' 프로젝트 설계자로 우리와도 인연을 맺고 있다.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MVRDV이 설계한 생소하고 미래지향적인 건물들을 볼 수 있다

마르크트할은 높이 40m, 길이 165m의 거대한 터널 구조물 안에 96개의 상점과 공동주택 288채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기존의 상식을 깨뜨리는 이례적인 주상복합 건축물이 되었다. 우리나라 주상복합 건물을 떠올려보라. 재래시장과의 결합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아파트 안쪽에서는 재래시장을 내려다볼 수 있고. 바깥쪽에서는 도시를 조망할 수 있다. 저층부는 가게뿐만 아니라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서 재래시장과 쇼핑몰이 결합하여 각자의 장점만 취한 형태이다. 건물 밖으론 공원과 같은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어 그 자체로 자족적인 건물이랄 수가 있다.

마르크트할의 백미는 벽과 천장이다. 곡선으로 되어 있어서 어디서부터 벽이고 천장인지 구별이 가지 않지만 덕분에 시선은 굴절 없이 자연스럽게 흐른다. 특수 코팅 처리한 알루미늄 패널 4000개로 구성된 벽천장은 화가 아르노 쿠넌Arno Coenen과 이리스 로스캄Iris Roskam이 공동으로 그렸다.

그림은 네덜란드 황금기 시절의 회화 스타일인 정물화를 구도를 배제하고 오브제에 집중하는 현대적 기법으로 재해석했다. 마르크트할의 천장 그림은 세계 최대의 천장 그림으로 유명해져 이미 '로테르담의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le of Rotterm'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고 한다. 입구에 서니 마치 커다란 화폭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건축보다는 눈앞의 상점에 시선이 간다. 일층은 먹거리 가게가 주를 이루고 있다. 세계 음식전시회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나라별 음식점들이 연이어 있다. 딱히 전통음식이란 게 없다 할 정도로 내세울 게 없는 네덜란드 음식문화 탓인지, 현지 스타일 음식점은 찾아보기 힘들다.

가장 많은 건 터키 음식점이고,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아랍, 인도 음식이 눈에 띈다(아쉽게도 한식은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구색을 맞추기 위해 차린 음식점이 아니라 실제 영업을 하는 가게다. 그러니 현실의 수요에 따른다고 봐야 한다.

로테르담에 왜 이렇게 타국 음식점이 많나 했더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로테르담의 인구 구성이다. 네덜란드는 유럽에서도 이민자 비율이 가장 많은 나라인데 그중에서도 로테르담이 가장 높다. 정작 네덜란드인은 반 정도(49.7%)이고 나머지 반은 이민자 출신이다. 
 
마르크트할 내부 모습
 마르크트할 내부 모습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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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도 냄새거니와 색상도 가지가지, 형태도 제각각, 재료도 고기에서 해산물까지 다양하다. 필자가 세상을 많이 다닌 건 아니기에 과문을 용서한다면 이처럼 나라별 음식점이 다양하게 모여 있는 건 처음 보았다.

음식점 사이를 누비며 눈요기하는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간을 넘긴 탓에 허기가 진 우리는 한 군데서 배를 채우기보다 여러 음식을 조금씩 맛보기로 했다. 뜻하지 않게 우리만의 음식박람회 순례가 된 것이다.

반대편 출구를 바라보니 연필 모양 건물이 재밌게 서 있다. 시장을 둘러보았으니 감상문을 쓰라고 재촉하는 것 같다. 부른 배도 꺼지게 할 겸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큐브하우스를 향해 나섰다.
 
연필 모양의 건물
 연필 모양의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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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 볼룸(Piet Blom 1934~1999)이 설계한 큐브하우스는 실험적 건축의 대명사이다. 모두 38개의 작은 큐브와 2개의 대형 큐브, 14개의 상점과 오피스가 맞물려 있는 주상복합단지로 실용적 가치만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건축물이다.

집이 나무처럼 기둥 위에 서 있어 숲을 이루는 모양이지만, 나무의 형상을 따르다보니 정작 집은 마름모꼴이 되고 말았다. 말 그대로 정사각형 큐브지만 45도 각도로 기울어 마름모꼴로 공중에 떠있다. 그러니 내부 공간도 직선이 아닌 마름모 형태에 맞추어져 있다. 가구도 맞춤형이어야 하고 수평 바닥 아래 공간은 낭비가 되고 만다. 무엇보다 창문이 정면을 향하지 않는다.

나는 창문에서 이 주택의 독창성을 엿본다. 건물 안의 창은 아래로 향하거나 위를 보게 되어 있다. 아래로 향한 창은 묘하게도 공동주택의 광장을 보게 돼 있고 위로 난 창은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따라서 원형으로 연결된 주택들이 서로 마주보이지 않아 프라이버시가 지켜지면서 한편으론 공동체의 광장으로 시선이 모아져 자연스레 소통의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물론 정면을 볼 수 있는 창도 있다.
 
큐브하우스
 큐브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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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면을 동시에 뒤트는 건 건축의 모험이다. 건축은 미술이 아니기에 제아무리 실험의 가치를 내세운들 실용의 바탕 위에 지어야 한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건물은 건축이 아니라 미술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미술품에 가까운 비실용적 건물이 버젓이 실용 주택으로 지어지고 이를 현실화시키는 사회적 토양에서 네덜란드 사회의 남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태그:#PERDIX, #홀란드 인문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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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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