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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향하던 제주에 2015년 4월 16일 기억공간 re:born 이 시작됐다. 사회적 기억이 개인적 의미로 다시(re) 태어나는(born) 사유공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동안 기억공간에서 누구를 만났고 어떤 질문을 했는지 돌아본다. 서로 다른 국가폭력으로 삶을 빼앗긴 사람들과 지웠고 지우려는 한맺힌 존재들의 공통된 질문을 함께 모색한다... 기자말
 
ⓒ YTN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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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은 5월 18일 시작되었다. 사람들 무리 속에서 아이들의 죽음에 항의하다 나는 연행되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두 가지 물음을 얻었다. 그날 얻었던 두 가지 물음은 그 후로 나를 줄곧 움직여왔다. 이것은 기억공간이 만들어진 이야기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출근길. 여느 사람들처럼 살지 않고 그래도 의미 있는 활동으로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직업으로서의 활동가를 선택한 나는 아름다운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날, 아이들이 바다에 있을 그날 나는 여느날처럼 아침에 늦을 새라 부랴부랴 2호선 낙성대역에서 5호선 장한평역으로 출근을 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핸드폰에 이어폰을 꽂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페이스북을 검색하던 중 깜짝 놀랄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진도앞바다에 여객선 침몰', 침몰한 여객선 이름은 '세월호'.

뉴스 사진을 보니 여객선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고 배의 기울기도 살짝 기울어져 있어서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더욱이 선박에 화재가 난 것도 아니어서 나는 속으로 '금방 구하겠네'라고 생각했다. 주변에 많지는 않았지만 선박도 보였기 때문에 그 큰 배에 탄 사람들이 속절없이 물속에 가라앉을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바쁘게 출근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포털사이트 메인 뉴스를 확인하며 구조 속보를 확인하였다. 구조는 마치 신속하고 빠르게 진행되는듯 보도가 되었다. 나는 속으로 '모처럼만의 수학여행인데 여행도 못가고 바닷물에 다 젖어 집에 오게 생겼네'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또한편으로는 '친구들이랑 수학여행 제주도 간다고 들떴을텐데 어쨌든 수학여행의 추억은 평생 기억에 남겠네'라는 아이들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겹쳐 들었다.

내 마음 속에 있었던 박근혜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을까? 업무시간 내내 포털사이트와 진보 온라인 매체를 습관적으로 새로고침 하며 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정부가 아이들을 무사히 구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계속 들었다.

포털사이트 뉴스 검색어 순위가 대부분 '안산' '단원고' '수학여행' 이었기에 세월호에는 단원고 학생들만 탑승한 줄 알았다. 나중에야 일반인 승객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걱정도 모두 아이와 학부모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학부모들은 아이들이 얼마나 걱정될까?'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진도로 가겠지?' '바닷가에서 놀다가 바깥으로 나오면 입술이 파래지고 벌벌 떨게 되는데 구조된 학생들은 얼마나 추울까?' '정말 평생에 남는 차가운(?) 수학여행이 됐네'.

업무 시간 내내 나는 세월호에 탑승했던 단원고 아이들에게 감정 이입되어 여러 가지 걱정이 들었다.

메인포털에, 주요 뉴스채널에 속보가 떴다. 나뿐만 아니라 세월호를 걱정했던 모두의 마음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 나라에 여전히 최소한의 국민에 대한 안전장치가 작동하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상황은 몇 분도 되지 않아 뒤집어져 버렸다. 뉴스는 가벼웠던 것이다. 바람 불면 날아갈 듯 가벼운 말들이 보도되고, 팩트 체크도 안된 사실을 서로 자극하듯 싸지르는 뉴스가 난무했다. 우리는 '사고' 가 '사건' 이 되고 '사건' 이 '참사' 가 될 줄은 이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오전 8시 49분부터 기울어진 배는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1시간 반이 넘는 시간동안 무기력함을 확인한 우리는 그저 인터넷과 텔레비전 앞에서 애끓는 울부짖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우리의 울분은 거리로 나가 촛불을 들게 하였다.

무기력했다.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였고, 그들은 국가는 뭐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전원구조' 오보를 낸 언론, 기자를 향해 시민들은 분노했다. 언론을 강하게 질타했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언론이 국가에 장악된 상황에서 우리는 벽에 대고 얘기하는 듯한 먹먹함만을 느껴야 했다.

우리의 분노로 바뀌는 건 없었다. 책임져야 할 권력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할 대상을 찾았고 그렇게 해서 보여주기식으로 해경을 해체하고 모든 학교에 수영교육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생겨난 질문. 답을 주지 못하는 국가.

광주에 가면 무슨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2014년 5월 16일

한 달이 지나도 내 가슴속에는 세월호의 기억과 분노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또렷하고 집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실은 침몰될 수 없다는 어떤 끈을 잡고 싶었을까? 나는 '불꽃원정대'란 이름에 끌려 금요일 하루 연차 내고 주말을 붙여 몇몇 청년들과 함께 광주로 향했다.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5월 영령들에게 참배하고 그곳에 전시된 5월의 그림을 보았다.

 
2014년 5월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진행된 ‘5.18 민중항쟁 희생자증언과 그림이 만나다. 그 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展’
 2014년 5월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진행된 ‘5.18 민중항쟁 희생자증언과 그림이 만나다. 그 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展’
ⓒ 출처:’그 해 오월’ 다음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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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진행된 ‘5.18 민중항쟁 희생자증언과 그림이 만나다. 그 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展’
 2014년 5월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진행된 ‘5.18 민중항쟁 희생자증언과 그림이 만나다. 그 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展’
ⓒ 출처:’그 해 오월’ 다음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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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우리 아버지 성격을 받았는디 그 놈이 꼭 나랑 같어. 내 맘에 맞지 않으믄 그냥 확 일어나는 성미라서 나를 감시하는 형사도 겁나게 힘들었을 것이여. 그래도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할 줄도 알아야제. 아닌 줄 알면서도 그냥 있으면 그것이 사람인가?"
 
"아야, 가기는 어딜가냐? 시방 여섯시다. 밥묵자"

"아니여, 시방 광주사람들이 다 죽어 간다네. 고속버스가 광주로 다시 들어간당게는 내가 운전을 해줘야 할 것 같어. 걱정허지 말고 있으소"

"아부지, 나 차 좀 사주랑게라, 똥차라도 괜찮아라"

"우리집에 차가 뭔 소용 있다냐? 낸중에 사자"

"아따메, 차 좀 사잔께라, 차 말이요"

그렇게도 차, 차.. 노래를 하더니 결국

그 해 오월

 
전시를 뒤로 하고 다시 찾은 금남로는 축제였다. 산자들의 축제, 진실을 되찾은 자들의 축제. 1980년 5월18일 계엄군과 시민군의 대치로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을 금남로에서 수십년이 지난 2014년 5월 살아남은 자들은 노래하고 이야기하며 5.18 기억 배지를 나누며 그곳의 거리를 산 자의 냄새를 맡았다.

광주에서 올라와 서울 톨게이트를 지날 즈음 페이스북을 열자 광화문 현장이 생중계 되고 있었고 경찰들이 삼중벽을 둘러치고 그 안에는 고립된 대학생들이 서로 스크럼을 짜고 길바닥에 누워 소리치고 있었다.

이게 나라냐? 우리가 국민이냐?

광화문 모습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피곤한 마음에 가지 말까라는 마음이 잠시 스쳤지만 결국 나는 집으로 향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에 홀린듯 2호선 문래역에 내려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가야했다. 왜 그랬을까?

광화문에 도착하자 청년들을 삼중벽으로 둘러싼 경찰들이 보였다. 합류할 생각으로 들어갈 만한 곳을 찾던 중 마침 한쪽 면이 뚫려있는 곳을 발견하고 별다른 제지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들어가 보니 청년일 것이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대다수 대학생과 직장인들이 섞여 있었고, 모두 한마음으로 스크럼을 짜고 누워있다.

서있는 사람, 화단에 앉아 있는 사람, 함께해 달라고 외치는 사람과 주변을 배회하는 사람, 멀뚱멀뚱 지켜보는 사람, 끊임없이 사진을 찍는 사람… 그 많은 사람들 사이로 스피커로 경고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종로경찰서 경비과장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불법을 하고 있습니다. 3차 경고입니다. 5분 내로 바깥으로 나가십시오. 해산하지 않고 나가지 않으면 5분 후에 연행을 시작하겠습니다."
 
리본을 다시 묶다
 리본을 다시 묶다
ⓒ 황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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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뭉개지듯 무슨 말 하는지 잘 안 들렸다. 다만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스타벅스 할리스 2층에서 커피를 마시며 내려다 보는 사람, 지나가다 경찰벽 사이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 건너편 버스 승강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나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함께해 주세요. 이게 나라입니까? 우리가 국민입니까?"

냉소적인 눈빛 차갑게 지나가는 사람들. 한달 만에 수백명의 아이들이 죽어간 세월호 참사를 잊은 걸까? 우리의 절규에 당신은 왜 무심히 지나치는가? 무엇이 우리를 두려워하게 만들었나? 돌아보면 정신줄을 붙잡고 버티던 우리는 왜? 한목소리를 못냈는지 냉소적인 눈빛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이들의 죽음 속에 우리는 어떻게 태평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지?"

이런 생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서있는 사람들을 슬프게 바라보던 나는 팔다리가 들린 채 연행되었다. 경찰버스에 실려 성동경찰서에 배정(?)됐고 그곳에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의 변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첫 번째 투쟁이자 연행이었다. 무섭고 떨리던 그날, 그러나 가슴 한 편에 새로운 불이 피어오르던 그날이었다.

제주에 와서 알게 된 지기들 중에 나를 '투사'로 이야기 하는 사람이 간혹 있는데 실상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2014년 5월 18일에 경찰서에 연행되고 구류된 평범한 사람이었다.

경찰서에 들어가자 허리띠나 끈은 자살이나 자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압수해갔으며 핸드폰은 외부와 단절을 위해 반납하라며 반 강제로 빼앗아 갔다. 그곳에 함께 연행된 사람들은 서로의 신상이 궁금해졌다. 왜 광화문에 모였는지, 무엇 때문에 분노했는지 서로 너무 궁금했다. 그리고 서로 힘과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들은 평범한 시민으로 광주에서 카페를 하는 자영업자이거나 삼성 계열사에 근무하는 직장인이거나 대학생들이었다.

성동경찰서에서 보낸 이틀 동안 광화문 건너편에서 커피를 마시던, 무심히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빛이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정말 잊었던 것인가? 정말 잊을 수 있을까? 그럼 누가 기억해야 하나?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 이런 질문과 고민을 하던 나는 결국 그곳에서 2가지 결정을 했다.

1. 아름다운가게를 그만둔다
2. 공간을 만든다

그것이 기억공간 리본의 시작이었다.

2014년 5월 18일 광화문.

태그:#세월호, #수상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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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세월호참사 이후 세월호가 향하던 제주도에서 사회적 기억이 개인적 의미로 다시(re) 태어나기를(born) 소망하며 기억공간 re:born을 운영하고 있는 황용운 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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