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26 08:16최종 업데이트 19.07.26 08:16
5일장 날이면 평소에 썰렁했던 예산시장도 북적인다. 장터 초입에는 찹쌀 꽈배기가 고소한 향내를 풍기고, 나란히 붙어있는 예닐곱 식당은 소머리국밥을 푹푹 고아낸다. "삼겹살 두 근에 만원!"이라는 정육점의 외침, "고등어 두 손에 만원!"이라는 생선 좌판의 소리까지 더해져 장터는 제법 흥이 난다. 7월의 아침 나절은 아직 시원하고 파란 하늘은 장터를 동그랗게 감싸고 있다.  
 

이희천 할아버지의 가게 그의 자리는 예산 장터에서 늘 정해져있다. ⓒ 민병래

    
이희천은 오늘도 좌판을 폈다. 그가 파는 물건이래 봐야 여기저기 흠집이 있는 구년묵이 시계들, 돋보기와 깨진 안경다리, 일회용 면도기들이 고작이다. 개다리소반 서너 개 합친 크기에 가지런히 늘어놓았지만 그저 몇 천 원짜리 상품(?)들이고 제일 비싼 게 만원 남짓이다.

그는 늘 말한다.


"수지맞을 일이 뭐 있것슈. 내 즌 재산이 여기 펼쳐 논 것들인디 이거 다 팔믄 얼마 벌 거 같애유."

그러면서도 장날을 거른 적은 없다. 오후 무렵 한 켠에서 장기판을 벌이던 중늙은이들이 장터를 돌다가 이희천의 가게 앞에 멈춰섰다. 이들은 흉허물 없이 이희천과 농을 주고받는 사이다. 

 "형님, 오늘 많이 벌었지유?" 담배를 문 노인 하나가 장난기 가득 묻는다.
 "아까 오만 원짜리가 바지춤으로 들어가는 것 봤슈, 오늘 막걸리 한잔 사유."

이희천이 대답하기도 전에 패거리 중에 한 명이 나서서 거든다.

"말도 마유. 오죽 허믄 세무서 직원이 매일 와서 '오늘은 얼마 벌었냐'고 꼭 물어보고 간다니께"하고 이희천도 장단을 맞춘다.

그러자 '와' 하고 박수와 웃음이 터진다. 지나가던 장꾼들도 뭔 일인가 하고 돌아본다. 사실 이 장단은 그가 어느 장터에 가도 빼놓지 않고 늘어놓는 사설이다.

삽교읍에서 보자기 펴고 시작한 라이터 장사

이희천은 충남 홍성군 홍동면 수란리에서 태어났다. 동네가 소문난 노름 마을이어서 어린 시절 청량리 외할아버지 댁으로 올려졌다. 거기서 외삼촌 소개로 청량리 시장에서 경비원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총소리와 포격소리가 들려 조심스레 시장으로 나가보니 북쪽군인들이 세 줄로 행진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보름이나 지났을까? 좌익이었던 반장이 징집영장을 가지고 와서 "무조건 도망가라"고 일러주었다. 그날로 청량리역에서 장항선을 타고 예산군 삽교로 내려왔다. 

그때부터 할 일도 없고 먹고 살아야 하기에 장돌뱅이가 되어 5일장을 돌기 시작했다. "오늘은 고덕장, 니알은 덕산장, 모레는 예산장, 글피는 홍성장 그리구 삽교장"을 69년 동안이나 돌았다.   
 

이희천 할아버지의 넉넉한 웃음 그는 장터에서 늘 손님들과 웃으며 노닌다. ⓒ 민병래

  
여름 날 긴 햇살이 저만치 물러가면 장터도 나른해지고 장꾼들이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여기저기서 물건을 거두는 소리도 벌써 들리기 시작한다. 

이희천은 바지춤에 손을 넣어 본다. 어림짐작에 오늘 5만원은 족히 들어온 것 같다. 마수걸이는 시계줄이었다. 늘어진 줄을 갈고 삼천 원을 받았다. 야채 파는 할멈은 안 받으려 해도 천 원짜리 한 장을 놓고 갔다. 그리고 시계를 두갠가 팔았다. 사실 정신도 가뭇가뭇해 얼마나 팔았는지, 뭘 팔았는지 기억도 못한다. 이젠 장터의 구수한 내음이 좋을 뿐이다.

그가 삽교읍에서 처음 장사를 할 때는 보자기를 펴고 라이터 장사를 했다. 말뚝 라이터를 팔았다. 그 다음에 성냥갑 라이터, 흔히 '지포'라고 부르는 라이터를 팔았다. 한 개당 150원 정도 받았는데 나름 장사가 되는 편이었다. 그런데 기름 대신 가스를 쓰는 1회용 라이터가 보급되면서 장사가 별 볼일 없어졌다.   

그래서 안경과 시계로 눈을 돌렸다. 안경은 '안경사'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점포도 없으니 주로 돋보기와 안경다리를 팔았다. 시계는 한동안 잘 팔렸다. 입학 선물로도 곧잘 나갔고 70, 80년대에는 손목에 시계 하나씩은 다 둘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핸드폰이 나오고선 재미가 없어졌다. 그렇다고 업종을 바꿀 수도 가게를 차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중고시계를 팔고 고장난 시계 고쳐주는 일로 나섰다. 지금은 전자시계여서 약만 갈면 되지만, 태엽으로 돌아가는 시계는 손 볼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파는 장사는 3할이고 고치는 장사는 8할 이문이여"란 말을 달고 살았다. 늘 손가락 다섯 개를 내보이며...

"어르신, 이제 물건 거두지유." 생선장수가 풀 죽은 목소리로 채근한다. 마지못해 이희천이 주섬주섬 물건을 거두기 시작한다. 오늘 팔지 못한 생선이 많이 남은 모양이다. 사실 5일장이 예전만 못하다. 무엇보다 촌에 인구가 줄면서 장터에 사람들이 별로 꼬이지를 않는다. 젊은 사람들은 당진 시내나 대전의 마트로 쇼핑을 가고 5일장은 노인들 차지가 되어 생기가 없다. 생선장수만 푸념하는 게 아니다.   

이희천은 오늘 저녁을 사먹고 삽교에 있는 집에 들어갈 작정이다. 안식구(그는 늘 안식구라고 부른다)가 수원에 있는 애들 집에 다니러갔기 때문이다.

'손고락' 다섯 개를 재산으로 한평생

그는 중신애비의 소개로 스물일곱에 여섯 살 어린 안식구를 만났다. 초등학교 문턱도 안 넘었고, 재산은 고작 라이터뿐인 그에게 와준 아내가 고마웠다. 신혼여행도 없던 시절이지만 삽교읍에서 가까이 있는 '추사 김정희' 고택도 가봤고 예당호에도 놀러갔다. 나름 재미있게 신접살림을 할 즈음 그는 입대를 했다. 그때가 휴전 직후였다. 부산에 있는 병참부대 8기지창에서 식량관리 보직을 맡아 서대전으로 파견근무를 갔다. 가서 보니 식량창고 바닥만 쓸어도 쌀이 넘쳐날 지경이었다.

그때 이희천은 욕심이 났다. 제대 후가 막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희천은 "대전으로 이사 가자"고 안식구를 보챘다. 창고관리만 잘해도 한 밑천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때 안식구는 "여보쇼! 이등병 쫒아가 살림하면 도둑놈 소리 듣는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 날 이 얘기는 그에게 큰 깨달음이 되었다. 그때부터 "장사꾼은 신용이 첫째유"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안식구와 재미나게 살았지만 구박도 없지 않았다.

안식구가 어느 날은 "여보쇼, 지금은 두식구여서 라이타 몇 개 팔아먹고 살지만 애들 나면 어쩔거유, 왜 그리 주변이 없어유, 돈 얻어 큰 장사해봐유"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때 이희천은 "내 다섯 '손고락'이 재산이니께 걱정 말어. 어디 일 나갈 생각 말고 가만 앉아 나만 기다려..."라고 말하며 등짐장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희천 할아버지의 시계수리장면 연세가 90이 넘었지만 눈도 밝고 손놀림도 빠르시다. ⓒ 민병래

 
물론 힘든 나날이 일상이었다. 제일 어려운 시절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학교 다닐 때, 특히 막내 아들이 대학 다닐 무렵이었다. 목돈이 들어가는데 하루 장사는 뻔했다. 그래서 일수를 오랫동안 썼다. 몇 해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큰 돈을 갚느라 매우 고단했다.

어쨌든 그렇게 이희천은 안식구와 두레박과 항아리처럼 살았다. 이희천이 손고락 다섯 개로 우물물을 길으면 안식구는 이를 항아리에 차곡차곡 쟁였다. 그래서 4녀1남을 자랑스럽게 키워냈다. 

자식들은 크면서 이희천의 장사를 한 번도 장사로 취급을 안했지만 지금은 결이 다르다. 늘 하는 말이 "아버지 제발 넘어지지 마세요, 넘어지면 큰 일 나유"라며 신신 당부를 한다. 오늘도 큰 딸이 아침 저녁으로 전화를 해줬다.

내 얼굴이 간판이구 이 장터가 다 내 가게유

3대째 하는 예산식당에서 소머리국밥으로 저녁을 채우니 든든하다. 식당 안주인은 입버릇처럼 "할아버지, 이젠 좀 쉬셔유"라고 성화를 부린다.

"생각해봐유, 만석꾼은 만 가지 근심인데 난 그저 '손고락' 네 개로 살았으니 내가 걱정이 뭐유? 밥 세끼 먹으면 되는데 그냥 장터 와서 노는 거유, 아, 집에 있으면 뭐할거유"라고 이희천은 말하며 식당 문을 나선다.
 

장터에서 소머리국밥을 드시는 이희천 할아버지 그는 장터에서 늘 가는 국밥집이 있다. ⓒ 민병래

  
돌아보면 그는 69년 동안 봄날이면 진달래꽃을 벗 삼아 갔다가 개나리를 물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름에는 장터에서 흠뻑 젖은 몸을 개울가에서 시원하게 적시며 고단함을 풀었다. 가을에는 들녘 가득한 벼이삭과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보면서 부자를 꿈꿨다. 겨울날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고무신으로 걸었고 언 발을 국밥으로 녹였다.

위로는 삽교에서 아래로는 홍성까지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예산에 이르는 '내포평야', 말하자면 지금 충청남도의 윗자배기는 다 그의 장터이고 가게였다. 그리고 장터의 말벗들이, 장터로 가는 터벅터벅 발걸음과 길내음이 그의 삶이었다. 

그가 걸었던 길에 남긴 발자국, 그의 손길이 스쳤던 나무 등걸, 그가 가는 장터마다 남겨놓은 숨결들... 그 하나하나를 이으면 획이 되고 획과 획을 이으면 물결이 되어 그의 '인생글씨'가 되지 않을까? 내포평야를 화선지 삼아, 그의 '장터역정'을 붓으로 삼아 써내려간, 이름하여 '장돌뱅이체'.

예산 장터를 떠나는 삽교행 버스에 이희천은 몸을 실었다. 그가 떠난 자리, 7월의 어둠이 조금씩 내리고 있다. 

못다 한 이야기

1. 이희천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충남 예산의 무한정보신문에서 접했습니다. 이재형 기자의 기사 [그때 그간판 그대로] 오늘도 여전하시다 - 2017-11-20일자
이 기사를 보고 두 번 2018년 1월, 2019년 6월 두 번에 걸쳐 사진촬영을 하고 이재형 기자의 인터뷰를 발판으로 보조인터뷰를 했습니다.

2. 이 글에는 이재형 기자가 인터뷰했던 일부 대화내용을 가져와서 썼습니다. 이를 허락해주신 이재형 기자와 무한정보신문께 감사드립니다.

이희천의 B컷
 

이희천 할아버지의 여러모습1 이희천 할아버지의 모습은 겨울장면은 2018년 1월, 여름장면은 2019년 7월 모습입니다. ⓒ 민병래

 
 

이희천 할아버지의 좌판 어르신이 파는 물건, 수십년 손때가 물든 물건들이다. ⓒ 민병래

  
이희천의 프로필

1. 1925년 충남 홍성출생
2. 10대 후반부터 청량리 시장에서 경비원생활
3. 1950년부터 충청남도 예산,당진,홍성일대의 고덕장, 덕산장, 예산장, 홍성장 삽교장을 69년 동안 장돌뱅이로서 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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