씹을 때마다 다양한 맛이 나는 요리처럼, 반복해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 영화가 좋다. 혹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싶어서 다시 보게 되는 영화가 좋다. 내겐 이창동감독의 영화가 대부분 그렇다. 볼수록 곱씹어 생각할 거리들이 많고 여운이 오래 남는 작품들이 대다수다. 2시간 남짓의 분량 안에 맛이 다양한 재료들이 들어간 느낌이다. 맛은 익숙하진 않아도 불쾌하지도 않다. 결코 섞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것도 제법 어우러져 맛을 낼 때, 우린 그것을 즐기게 된다.

영화 <버닝>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의 영향을 받아 만든 작품이라고 했다.(물론 'barn burning'이라는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이 원작일지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무 연관이 없다고 했지만.) 제목에서처럼 헛간을 태우는 상징이 영화에도 등장한다. 물론 영화에선 헛간이 아닌, 비닐하우스와 외제차를 태우는 장면으로 대체된다. 제목에 나온 것처럼 무언가를 '태우는 행위'는 중요한 소재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선 태워버리는 대상이 세 번 나온다. (일부는 장면대신 대사로 등장한다.) 그 대상을 생각하면 <버닝>을 볼 때마다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 버닝 > 스틸컷.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어정쩡한 종수(유아인 역)의 시선이 영화 전체를 관조하고있다.

< 버닝 > 스틸컷.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어정쩡한 종수(유아인 역)의 시선이 영화 전체를 관조하고있다. ⓒ CGV 아트하우스

 
1. 몽환적인 스토리

주인공 종수(유아인)은 작가지망생으로서 택배 상하차 일을 하며 산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치게 된 옛 동창 혜미(전종서)와 연인인 듯 친구인 관계가 된다.

처음으로 둘이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혜미는 팬터마임 이야기를 꺼낸다. 요즘 자신이 배우는 것인데, 예를 들어 귤을 먹는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라고. 실제로 귤은 없지만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돼"라는 그녀의 말처럼 종수는 무언가가 없다는 것을 잊어야 살아갈 수 있는 청년이다.

삶의 의미를 찾고 싶던 혜미는 한 달간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한다. 종수에게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를 돌봐달라고 부탁을 한 혜미는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혜미네 고양이를 돌봐주기 위해 그녀의 집에 왔지만 고양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낯선 사람이 오면 잘 숨곤 한다던 혜미의 말 때문이었을까, 고양이가 보이지 않아도 종수는 그다지 의아함이 없다.

한 달 정도가 지난 후, 혜미를 마중 나간 공항에서 종수는 그녀와 함께 귀국한 남자를 보게 된다. 이름은 벤(스티븐 연). 그는 한 눈에 보기에도 부유해 보이는 인상이었고 걸음걸이마저 여유로워 보였다. 종수는 순간 긴장한다.

너무나 달라 보이는 세 사람이 함께 저녁을 먹으며 술을 한 잔 하게 되고, 벤은 종수에게 관심을 보인다. 얼핏 보면 벤은 종수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글을 쓴다는 종수에게 벤은 언젠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술에 취해 졸고 있는 혜미를 보며 귀여워하기도 한다. 한껏 경계를 하는 종수와는 다르게 벤은 어떤 타인이든 아무렇지 않게 흡수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종수는 벤이 어떤 사람인지 점점 더 궁금해진다.
 
벤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점점 더 테두리를 없애는 듯 보인다. 혜미와 종수의 애매모호한 관계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던 시점에, 새롭게 등장한 인물 벤은 모호함에 더 확연한 불을 지핀다. 벤도 명확히 혜미의 연인이라 할 수도 없고, 혜미가 누구를 좋아하는지도, 종수는 정말 혜미를 좋아하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다.

특히나 벤은 혜미와 종수를 자신의 부유한 친구들 사이에 초대해 재미있는 예능프로를 보듯 편안하게 웃고 즐거워한다.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아하는 혜미는 부유한 사람들 앞에서 자칫 우스워 보일 수 있는 춤도 추고, 윗도리를 다 벗고 알 수 없는 팬터마임을 하기도 한다. 벤은 혜미라는 존재를 앞에 두고 직접적인 희롱은 하지 않은 채 즐거워하는, 애매한 선을 지킨다.

종수는 이 모든 것들을 명확하게 하고 싶다. 벤은 혜미를 노골적으로 갖고 노는 것이고, 벤의 부유한 친구들은 자신과 혜미를 무시하는 것이며, 혜미를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 따위는 벤에게 아무 것도 아닐 것이라고.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인 수수께끼의 세상 속에서 그런 점들이 명확히 확정되어야, 자신이 가진 분노의 근원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벤에게 향하는 열등감인지, 질투인지, 혜미를 애인으로 삼지 못하는 답답함인지, 사고뭉치 부모에 대한 억울함인지 모를 것들이 명확한 궤도는 없이 자꾸만 샘솟는다.
 
영화는 이 모든 것을 메타포로 삼고 있는 듯 했다. 세 인물의 성향, 스토리, 보이지 않는 고양이, 주인공 종수가 느끼는 애매모호한 감정들 모두, 우리가 눈으로 확정할 수 없는 은유다. 무엇을 원관념으로 두고 상정한지 모를 은유들이지만 어찌됐든 그런 모호함 속에서 종수는 답을 찾고 싶어 한다. 무엇을 쓰고 싶은지 모르는 소설가로서, 버려진 자식으로서, 계급적 박탈감을 느끼는 인간으로서.
 
2. 벤의 비닐하우스
 
종수가 사는 파주에 벤과 혜미가 놀러 온다. 종수는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야 그 나마 유지할 수 있는 외곽진 삶의 터전인 곳이지만 벤은 혜미를 차에 태우고 유유자적 경치를 즐기며 올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벤은 자신이 악취미가 있다고 한다. 종종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사람들 시선에서 버려지고 불필요한 비닐하우스를 두 달에 한 번씩 태우면 그게 그렇게 짜릿할 수 없다고. (다음은 종수와 벤의 대화 장면이다.)
 
"그게 쓸모없고 불필요한 건지는 형이 판단하는 건가요?"

"나는 판단 같은 거 하지 않아요. 그냥 받아들이는 거지. 그것들이 태워지길 기다리고 있다는 걸. 비 같은 거예요. 비가 온다. 강이 넘치고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떠내려간다. 비가 판단을 해? 거기에 옳고 그른 건 없어요. 자연의 도덕만 있지. 자연의 도덕이란, 동시존재 같은 거예요. 난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다. 난 파주에도 있고 반포에도 있다. 서울에도 있고 아프리카에도 있다. 그런 거. 그런 밸런스?"

 
이 장면에서 종수는 어딘가 허탈한 표정을 짓는다. 저녁 때라 빛도 차츰 없어지고 혜미는 종수의 집 안에서 잠들어 있다. 고요한 집 마당에서, 대마초를 피우며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종수와 벤. 그곳에서 종수의 표정은 점점 더 기울어 가고 모호함의 정점인 '비닐하우스'라는 단어가 관객들의 귓가에 박힌다. 정말로 벤은 실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사람인지.
 
그 이후, 종수는 벤이 태우고자 하는 비닐하우스가 자신의 집 주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집 주변 모든 비닐하우스를 샅샅이 살핀다. 그가 태우는 비닐하우스가 눈에 보여야, 확정이 되어야 무언가 안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벤이 태운 비닐하우스는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불이 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다 종수는 꿈을 꾼다. 어릴 적 자신이 집을 나간 엄마의 옷을 태웠었는데 꿈속에서는 어릴 적 자신이 불타는 비닐하우스 앞에서 멍하니 무언가를 응시하는 장면이 꿈에 나온다. 종수는 벤이 정말로 비닐하우스를 태운건지, 자신이 태운 것이 엄마의 옷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혜미는 사라졌다.
 
한동안 혜미와 연락이 되지 않은 종수는 혜미네 집에 찾아가보지만 집도 다 뺀 상태고, 혜미의 행방을 알 수 없다. 답답한 마음에 벤이 사는 곳에 찾아가 벤의 그동안의 행적을 살피지만, 그의 곁에 혜미는 없고 새롭게 사귄 다른 여자가 있다. 결국 벤에게 혜미의 행방을 물어봐도 벤도 그녀와 연락이 안 된다는 말뿐, 혜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만날 수 없다.

있던 게 없어진 게 아니라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없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던 것처럼 종수에게 혜미는 팬터마임 속 귤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혜미는 없이, 종수는 벤을 찾아가본다. 벤의 집 화장실 선반을 열어보니 주인 없는 여성용 액세서리들이 넘친다. 새로 생긴 여자와 벤은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가 사라졌다고 고양이를 찾으러 지하 주차장을 헤맨다. 종수도 그들을 따라 고양이를 찾아 헤맨다. 그 순간 종수는 고양이를 찾고 '보일아'라고 조심스레 불러본다. 고양이는 종수의 손길에 반응한다. 마치 몇 번 따라본 적 있던 사람인 것처럼. 실제 혜미가 키우던 고양이 보일이처럼.

혜미가 사라지고 나서 모호했던 것들을 바로잡고 싶었던 종수의 욕구가 정점을 찍는다. 벤이 혜미를 죽였다. 죽인 게 맞다. 죽여야 한다. 죽였으면 좋겠다. 벤은 혜미를 죽이고 고양이 보일이를 데리고 가 키운 것이다. 종수의 머릿속은 이런 명확함이 샘솟는다.
 
종수는 벤을 자신이 사는 파주로 불러낸다. 낡고 녹슨 트럭을 몰고 온 종수는 화려한 외제차를 끌고 온 벤과 대치한다. 황량한 비포장도로에서 종수는 벤에게 칼을 꽂는다. 그 후 차를 타고 도피하려던 벤을 붙잡아 끝내 죽이고선 외제차에 불을 지른다. 피가 묻은 옷을 다 벗어버린 종수는 자신의 옷가지마저 벤의 불타는 차에 집어 던진 후 맨몸으로 트럭을 끈다. 카메라 앵글에 가까워지는 트럭 뒤의 창문을 통해 활활 타는 불길이 보인다. 창문에 안개가 껴 애매하고 모호한 장면으로. 그렇게 종수는 이야기를 마친다.
 
 
 < 버닝 >의 스틸컷. 해미(전종서 역)는 남자 배우들의 편협한 시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 버닝 >의 스틸컷. 해미(전종서 역)는 남자 배우들의 편협한 시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 CGV아트하우스

 
3. 사라진 혜미
 
혜미는 사라졌다. 원래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종수가 만들어낸 없다는 것을 잊어버린 환영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랑할 사람,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혜미라는 캐릭터를 종수의 부속품처럼 '활용'한 것 같아서 약간의 아쉬움은 있다.

물론 어떤 작품이든 주인공의 틀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조연들을 다루겠지만 단순히 이 시대 청년들의 허기를 다루기 위해 혜미를 가져다 쓴 것이라면, 또한 종수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한 수단으로만 쓴 것이라면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다.
혜미에겐 수수께끼 같은 세상을 견뎌내 보려는 강인함이 있었다.

세 인물 중 유일하게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했고 그것을 위해 아프리카까지 가는 행동력까지 있었다. 누군가에겐 순수하고 철없어 보일 수 있어도, 혜미 만큼 현실에 타협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는 인물은 없다. 혜미는 그저 자신이 존재하는 대로 세상을 보려했고 이해되지 않으면 답을 찾으려 했다. 종수가 건넨 "왜 이렇게 남자들 앞에서 옷을 잘 벗느냐. 그런 건 창녀나 하는 것이다" 와 같은 싸구려 말 속에 혜미가 가둬질 순 없는 것이다.

꽤 매력적이었던 혜미라는 인물은 팬터마임 귤처럼 보이지 않게 됐다. 적극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구체적인 인물을 사실은 송두리째 몽환적이었던 인물로 써버린 것이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그래서 더 씁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청년들에게 아니 인간에게 세상은 정말 없다는 것을 잊어야 살 수 있는, 그런 수수께끼로 가득 찬 곳이어야 마땅한 걸까. 모든 것은 메타포로 이루어져있어 메타포를 즐길 수 있는 권력자만이(극중 벤)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인걸까. 혜미같은 인물은 패배자 마인드의 종수가 결국에 벤의 차에 방화를 저지르게끔 하는 동력으로밖에 쓰일 수 없었던 걸까. 혜미는 종수의 자위를 도와주지만, 가장 삶에 열정적이었던 스스로가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은 현실 그 어디에도 없었다.
 
3.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비닐하우스는 정말 비닐하우스일 수도, 혜미일 수도, 종수 자신의 분노일 수도, 죽어버린 벤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모호하다.

마치 영화는 이 시대 청년들의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모호함으로 가득 찬 세상, 그것을 담아내야만 하는 예술의 한계를 보여주려 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뭐든 주제의식을 달아버리면 굉장히 단편적이고 명확해진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 단순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주제의식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질 만큼 이야기에 경계가 없다.

명확함이 부재한 세상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존재는 이 시대의 가장 큰 힘을 가진 존재들뿐일 것이다. 이 시대 가장 큰 힘은 보편적으로 돈, 자본이다. 적어도 자본이 있으면 모호함의 일부는 줄일 수 있다. 그런 자에게만 숨을 쉴 틈을 주는 세상인 것이다. 그런 세상이 예술과 대치한다. 예술은, 그 자체로서도 모호하지만 예술이 담아내는 세상은 돈의 궤도를 벗어나면 끝없이 메타포로 가득한 것들뿐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쉽게 외면한다. 명확하지 않은 것들을.

극 중 글을 쓰던 종수는 결국 그 모호함에 불을 지른다. 불을 지른다는 건 태워버린 다는 뜻도 있지만 적어도 잠깐 동안은 더 활활 타오르게 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끝없이 펼쳐진 모호함을 받아들이겠다는 표시일 수도 있고, 예술의 갈 길을 흔드는 자본을 죽인(벤을 살인한 것.)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불길의 끝은 재뿐이다. 발길에 치여서 사라질 잿덩이. 난 종수의 예술이 어디로 사라지게 될지 모르지만, 한 순간 활활 타오른 불길을 보며 이상하게 짜릿함을 느꼈다.

 
 버닝

버닝 ⓒ cgv아트 하우스

 
물론 <버닝>을 두고 자본주의를 비웃는 영화라고 말할 순 없다. 역시나 아무리 봐도 이 영화는 어떤 것이라고 꼬리표를 달고 싶지 않다. 그래서 여러 번 볼수록, 아무리 자주 봐도, 또 다른 매력이 보이는 것이다. 볼 때마다 낯설지만 거북하지는 않은, 모호하지만 그 속에서 명확함을 찾고 싶은.
 
세상은 수수께끼다.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도,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알게 될 때보다 모르게 될 때가 더 많다. 모든 건 의미 부여로 내가 중점을 두는 것들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의미 부여와 나의 의미 부여가 대치하고 그 접점이 없을 때 우린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낀다. 열등감도 그 감정의 일부다.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 세상은 그저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곳이라는 명확함을 피부로 느낄 때, 갑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모호해지고 두려워진다. 그리고 당시 세상이 주장하는 그 힘이 내겐 없을 때, 삶의 의미를 잃게 되는 수준까지 갈 수 있다.

교과서적인 말로 세상을 살아가기엔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초라할 만큼 부족하다. 매번 수수께끼의 답을 정해가듯 세상을 살뿐. 그럴 거라고, 그래야 한다고 믿으며.
 
 
 
 
 
 

 
버닝 이창동 유아인 전종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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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기사와 문학 그리고 영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저의 부족한 생각과 관찰을 통해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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