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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성 전투에서 당당하게 일본군을 대항하며 성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의 벽화
 남원성 전투에서 당당하게 일본군을 대항하며 성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의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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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성춘향과 이몽룡의 러브스토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임진왜란 후기에 만여 명의 사람들이 희생된 남원성 전투는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남원읍성(사적 제298호) 정유재란(1597) 때 조선군1,000명, 명군3,000명, 성안의 주민 6,000여명이 합세하여 56,000명의 왜군의 공격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남원읍성은 동학혁명과 전라선철도 개설 등으로 많이 허물어졌는데, 최근에 일부를 복원하였다.
 남원읍성(사적 제298호) 정유재란(1597) 때 조선군1,000명, 명군3,000명, 성안의 주민 6,000여명이 합세하여 56,000명의 왜군의 공격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남원읍성은 동학혁명과 전라선철도 개설 등으로 많이 허물어졌는데, 최근에 일부를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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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성 전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1만여 명의 민·관·군이 처절하게 순절한 전투입니다. 임진왜란때 일본군은 이치에서 권율에게 패하고, 남해안에서는 이순신에게 패하여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정유재란(1597~1598) 때는 전라도 지역을 먼저 점령한 뒤 북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남원읍성(사적 제298호) 전라북도 남원시 동충동에 있음.
 남원읍성(사적 제298호) 전라북도 남원시 동충동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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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선조30년) 화의교섭의 결렬로 재침한 일본군은 호남·호서 지역을 점령한 뒤 북상할 계획을 세웠고, 같은 해 7월 28일부터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대장으로 한 1대 5만 병력은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로 들어오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운봉으로 들어와 남원을 공격한 것입니다.
  
만인의총 사적지 내에 있으며, 2000년 12월 건립되었다.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절한 고귀한 희생정신을 3개의 수직기둥과 상단부의 불꽃으로 형상화 하였다.
▲ 만인의사 순의탑 만인의총 사적지 내에 있으며, 2000년 12월 건립되었다.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절한 고귀한 희생정신을 3개의 수직기둥과 상단부의 불꽃으로 형상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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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명 연합군도 남원을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여겨 남원부사 임현의 군사 1000여 명과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군사 3000여 명이 함께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8월 13일 일본의 주력군이 남원성을 포위하자, 14~15일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16일에 중과부적으로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만인의총 내 충렬사 입구에 있는 홍살문
 만인의총 내 충렬사 입구에 있는 홍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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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성 전투가 끝나고 피난했던 주민들이 돌아왔을 때, 성안에는 겨우 민가 17가구만이 남았었다고 합니다. 당시 얼마나 치열하고 무자비한 전투였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612년(광해군4년)에 사당 건립 후 1653년(효종4년) 사액을 받았으며, 사당 내에는 접반사 정기원, 전라병마사 이복남 등 53위 충신 위패와 [남원부성순절만인지위] 무명용사 대표 위패를 모시고 있다.
▲ 충렬사 1612년(광해군4년)에 사당 건립 후 1653년(효종4년) 사액을 받았으며, 사당 내에는 접반사 정기원, 전라병마사 이복남 등 53위 충신 위패와 [남원부성순절만인지위] 무명용사 대표 위패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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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남원역이 있던 곳에 만여 명을 한 곳에 묻어 무덤을 만들었는데, [만인의총(萬人義塚)]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역의 역사연구자들과 대다수 시민들은 일제가 남원역을 이곳에 개설한 것에 대해 '일본의 과거 흔적 지우기'의 의도로 보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성민들은 1612년 사당을 건립하여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8충신을 모시고 춘추로 향사하여 왔으나, 일제 강점기에 제단을 파괴하고 제사마저 금지했습니다. 그러다 광복과 더불어 다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모셔오다가 1981년 사적 제27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만여 명의 의로운 충혼을 모신 무덤으로 정유재란(1597) 당시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민,관,군 1만여 명을 합장한 곳이다. 동충동(구 남원역 부근)에 있었으나 196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 만인의총(萬人義塚) 만여 명의 의로운 충혼을 모신 무덤으로 정유재란(1597) 당시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민,관,군 1만여 명을 합장한 곳이다. 동충동(구 남원역 부근)에 있었으나 196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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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의 역사라서 잊혀 졌을까? 400여 년이 지난 역사라서 잊혀 졌을까? 남원은 호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지역적인 위치 때문에 전쟁을 치러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었습니다. 작금에 일본의 몰지각한 무역전쟁으로 반일·항일의 국민정서가 고조되는 이때, 과거 역사 속에서 잔인하게 우리나라를 유린한 현장을 답사해봄으로써 극일의 마음을 가다듬고자 합니다.
 
만인의총 사적지 전경
 만인의총 사적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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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만인의총, #남원성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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