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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오후 도쿄 치요다구의 한국YMCA회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지난 18일 오후 도쿄 치요다구의 한국YMCA회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 양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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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벌써 10년이나 흐른거야?"
"그래, 너 제일 처음에 갔던 거 기억 안나?"
"음… 기억 안나. 그런데 몇 번 와서 친근하긴 해."
 

2010년 8월 18일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1주기 추도식을 하려고 하는데 준비를 같이 하자는,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당시 아내와 두 아이를 건사해야 했던 나는 취업준비를 하느라 상당히 바빴고, 게다가 그 해 여름은 찌는 듯이 더워 솔직히 도쿄 서쪽의 고가네이에서 동쪽의 우에노까지 왔다갔다하며 추도식을 준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아이들과 아내까지 온 가족이 다 함께 참여했다. 아마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감이 여타의 귀찮음을 이겼을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인 아내가 "김대중 선생님은 훌륭한 분"이라고 말한 것이 컸다. 일본인들에게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온갖 역경을 뚫고 일어나신 입지전적인 영웅, 한일관계를 정립시킨 지도자 같은 이미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때 큰 아이가 만 4살, 둘째는 2살, 그리고 셋째는 아내의 배 안에 있었다. 스무명도 채 안되는 사람들이 10평도 안되는 식당에 모여, 그야말로 김대중 선생님을 진정으로 기리고 추모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모여 했던 조촐한 추도식이 어느새 10번째를 맞이했다. 나는 어느새 그 선배의 회사일을 같이 하고 있었고, 매년 이 행사를 준비하는 스태프가 되었다. 그리고 추도식도 점점 규모가 커져갔다.
 
지난 18일 오후 도쿄 치요다구의 한국YMCA회관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에서 추모객들이 참배하고 있다.
 지난 18일 오후 도쿄 치요다구의 한국YMCA회관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에서 추모객들이 참배하고 있다.
ⓒ 양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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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도 많이 참석... "이럴 때일수록 큰 의미"

사실 추도식이 열리는 8월 18일, 김대중 선생님의 기일은 일본의 오봉연휴(お盆休み)에 해당한다. 다들 휴가가느라 잘 모이지 않는 날인데 스무명도 안되던 추도객들이 늘어나 매년 조금씩 큰 곳으로 장소를 옮겨 올해는 도쿄한국YMCA회관에서 개최됐다. 100년전 2.8 독립선언을 외쳤던 유서깊은 전통이 깃든 곳에서 김대중 선생님, 그리고 올해 돌아가신 이희호 여사님의 합동추도식을 연다는 것 자체가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도쿄민주연합과 도쿄호남향우회가 공동주최한 이번 10주기 추도식은 150여명이 참석했다. 그리고 그중 40여명은 일본인들이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짤막한 강연을 했고, 일본 사민당의 후쿠시마 미즈호 부당수를 비롯해 오카모토 아쓰시 이와나미서점 대표이사 등 출판계의 쟁쟁한 인사들도 대거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일본언론도 관심을 보였다.

TV아사히의 지카라이시 디렉터는 "요즘 한일 양국 관계가 좋지 않은데, 이럴 때일수록 김대중 대통령 같은 분의 추도식이 도쿄에서 열린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며 취재의도를 설명했다.

김상열 도쿄민주포럼 대표는 "작년보다 더 많은, 특히 요즘같은 시기에 추도식의 취지에 공감하시는 일본분들이 많이 와주셔서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또 김용덕 도쿄호남향우회 회장도 "연휴기간이라 걱정도 했었는데, 솔직히 이렇게 많은 분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주셔서 놀랐다"고 말했다.
 
기념강연에 나선 한명숙 전 총리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생전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기념강연에 나선 한명숙 전 총리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생전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 양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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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전 총리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말씀 되새겨야"

한편 한명숙 전 총리는 기념강연을 통해 "여기 모인 분들은 대통령님과 이희호 여사님을 거의 알고 계실 분들"이라며 "알려진 이야기들이 아닌 에피소드를 말하겠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대중 선생님은 평생을 공부하신 분인데요. 제가 특히 인상에 남는 것은 영어공부를 쉰살에 시작하셨다는 겁니다. 처음엔 농담이려니 했는데 제가 언제 한번 김대중 선생님 차를 타는데 뒷좌석에 앉게 됐어요. 그런데 뒷좌석에 아주 너덜너덜한 영어 단어장과 사전이 놓여 있는 겁니다. 진짜 공부하시고 계시구나 하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대통령이 되시고 유엔에 가셨는데 제가 그때 여성부 장관이었는데 '영어로 연설하면 안되나? 아, 영어로 연설하고 싶은데'라며 그동안 배우신 영어 그걸 본격적으로 써보고 싶다고 정말 몇번이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결국 안 하시긴 했는데 아주 아쉬워 하더라구요."

"가택연금 당했을 때 이야기인데, 그 동교동 자택에서 아침에 항상 7시에 딱 일어나셔서 식사한 후 말끔히 의관을 정제하고 가방도 들고 그렇게 해서 불과 대여섯발자국 떨어진 옆방, 그러니까 서재로 출근하시는 겁니다. 그것도 매일 그렇게 했습니다. 그만큼 공과 사의 구별도 확실히 하셨고, 좀 나태해질 법도 한데 절대 그러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아주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너그러운 분이셨습니다."

"김대중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실 때 저는 이희호 여사님을 빼놓아선 안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많은 분들이 이희호 여사님을 영부인으로 생각하고 계신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저는 두 분 중 누굴 더 존경하냐고 물어본다면 50%는 선생님, 50%는 여사님이라고 말합니다. 한국의 여성운동에 있어 뚜렷한 족적을 남기셨고, 특히 89년에 있었던 가족법 개정은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지배해왔던 호주제, 친권제, 남녀상속차별 등이 모조리 개정된 아주 역사적인 개정인데요. 이 개정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분이 김대중 선생님의 평민당이었고, 김대중 선생님께 이것만큼은 반드시 개정해야 한다고 여사님께서 말씀을 하셨죠. 선생님도 여성의 권리신장에 아주 큰 관심이 있어서 여사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셨구요. 사실상 두분의 합작품이었던 셈입니다."

"김대중 선생님이 생전에 자주 하셨던 말씀 중에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섯차례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시고, 가택연금 당하시며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탄압받으신 분이 인생은 아름답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그런 분이 대통령이 되신 후에는 확실히 역사를 발전시켰습니다. 정적을 모두 용서하셨고 일본과도 미래적인 관계를 여셨죠. 한국과 일본이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하나라는 생각을 할 때 김대중 선생님의 이 말씀을 한 번쯤 떠올려보면 어떨까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우리 가족이 한명숙 총리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우리 가족이 한명숙 총리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 양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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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인 2010년 김대중 전 대통령 1주기 추도식에 참석했던 큰 아이 미우(만4세), 둘째 유나(2세).
 9년 전인 2010년 김대중 전 대통령 1주기 추도식에 참석했던 큰 아이 미우(만4세), 둘째 유나(2세).
ⓒ 박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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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4명이 된 아이들... 그들의 미래는 지금보다 낫겠지

한명숙 전 총리의 1시간 남짓한 강연이 끝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단체사진 촬영이 이어졌고, 한참 노트필기를 하던 나에게 아이들이 다가와 "사진 찍으러 가자. 아빠"라고 말한다. 1주기 때 둘, 아니 뱃속의 셋째까지 포함해 세명이었던 아이들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하나를 더 낳는 바람에 네명이 됐다. 단체사진을 찍으려는데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제일 앞에 앉으라고 한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제일 앞줄 이희호 여사님 영정옆에 나란히 앉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물었다. 어땠냐고. 그러자 아이들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기 오면 '태극기'를 볼 수 있어서 좋아!"라고 말한다. 국민의례와 애국가가 흘러나올 때 스크린에 투영되는 태극기를 말하는 것이다. 국적 상관없이 우리 아이들은 '상징'을 좋아한다. 평소 거의 보지 못하는 태극기, 그리고 치마저고리 등을 보거나 입으면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눈이 생글생글 빛난다.

아마 아이들은 이 추도식을 왜 하는지 아직은 잘 모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될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후 십년간 이만큼 컸고 또 십년이 흐르면 그땐 단순히 태극기라는 상징뿐만 아니라 "김대중 할아버지는 존경하는 위인이자 선생님"이라는 말이 아이들 입에서 흘러 나올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을 기다린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이런 말을 하게 될 그 미래는, 아마 한국과 일본과의 사이가 지금보단 나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지난 18일 오후 도쿄 치요다구의 한국YMCA회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이 끝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지난 18일 오후 도쿄 치요다구의 한국YMCA회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이 끝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 양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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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대중, #이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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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도쿄거주. 소설 <화이트리스트-파국의 날>, 에세이 <이렇게 살아도 돼>, <어른은 어떻게 돼?>, <일본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를 썼고, <일본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를 번역했다. 최신작은 <쓴다는 것>. 현재 도쿄 테츠야공무점 대표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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