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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서해5도를 방문하기 전에 아름답다는 덕적도를 방문했다. 덕적도는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약 75Km 떨어져 있는 섬이다. 덕적도는 여의도 면적의 열배 반이나 되는 제법 큰 섬이다. 일제 침략전에는 덕물도라 불렸는데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주민들이 어질고 덕이 많다 하여 덕적도라 칭하게 됐다.
 
옛날에는 민어, 조기, 꽃게가 주로 잡혔지만 지금은 꽃게가 주어종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대구, 민어가 주로 잡혔고 인근 굴업도에서는 파시가 섰다.
  
서포리 소나무 산책로로 2백년 이상된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숲이다.
 서포리 소나무 산책로로 2백년 이상된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숲이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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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부유했던 섬에 6.25피란민이 정착하며 인구가 2만명이나 되기도 해 먹여 살릴 게 부족하기도 했다. 어느 섬이나 마찬가지지만 젊은이들이 떠난 섬에는 현재 2천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덕적도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왔기 때문에 면사무소 직원에게 문화해설사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국을 진정으로 사랑한 최분도 신부
 
 바닷가에서 깔깔거리며 조개를 잡는 아이들 소리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끌렸다.  이채이(서울 누원초4년)양은 "게, 새우, 조개, 물고기를 잡아서 좋았어요. 서울에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여기는 조용하고 예쁜집이 많아서 겨울방학에 또 올거에요"라고 말했다.
  바닷가에서 깔깔거리며 조개를 잡는 아이들 소리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끌렸다. 이채이(서울 누원초4년)양은 "게, 새우, 조개, 물고기를 잡아서 좋았어요. 서울에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여기는 조용하고 예쁜집이 많아서 겨울방학에 또 올거에요"라고 말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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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를 안내한 문화해설사 이광식씨는 "덕적도를 알려면 이 섬을 살기 좋은 섬으로 만든 최분도 신부님을 공부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담당자를 소개해줬다.             
서포리 해수욕장 인근에서 안내해 줄 분을 기다리는 동안 소나무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덕적도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서포리는 경사가 완만한 30만평의 넓은 백사장에 2백년이 넘은 울창한 해송 숲과 해당화가 어우러진 천혜의 휴양지다. 예쁘게 생긴 해송 숲사이로 난 데크를 따라 끝까지 다녀오자 필자를 안내할 분이 오셨다.
 
"덕적도에 오시기 전에 최분도 신부님에 대해서 들으셨어요?"
"아니요! 그분이 누군데요. 전혀 모르고 왔습니다. 섬이 예쁘다는 소릴 듣고 그냥 관광왔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최분도 신부님 얘기를 하시네요. 그 분이 어떤 분인데요."
"아이! 덕적도에 오시면서 최분도 신부님 공부를 안 하고 오시면 어떻게 해요. 그분이 덕적도를 위해 하신 일과 살아온 일대기를 그린 책 한 권을 드릴테니 꼭 읽어보세요."

 
'최분도 신부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만나는 사람마다 최분도! 최분도! 하지?' 하는 생각에 틈나는 대로 최분도신부추모위원회가 펴낸 <가거라! 내가 너를 보낸다>를 읽었다.
 
최분도 신부의 일대기를 그린 <가거라! 내가 너를 보낸다>의 표지. 최분도 신부가 아이들을 안고 있다.
 최분도 신부의 일대기를 그린 <가거라! 내가 너를 보낸다>의 표지. 최분도 신부가 아이들을 안고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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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학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미국은 언제나 고마운 나라로 알고 있었다. 6.25전쟁에 참전해 수많은 미군이 목숨을 바쳤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원조를 해준 나라였다.

6.25 전쟁 직후 태어난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 점심시간은 미국에서 보내준 강냉이죽을 배급받아 먹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세계정세를 공부하면서부터는 미국에 대한 평가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5.18광주항쟁 당시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미국을 보며 미국에 대한 평가에 수정을 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분도 신부의 일대기를 다 읽고 난 순간 "천사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국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오늘의 미국이 있는 건 바로 "최분도 신부님 같은 천사가 계셨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외되고 어려운 한국인들을 사랑한 최분도 신부
 
최분도(Benedict A. Zweber M. M)신부는 1932년 1월 7일 미국 미네소타 주 뉴우마켓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노벨 즈웨버와 어머니 에블린 즈웨버의 10남매(5남 5녀) 중 다섯 째(3남)으로 태어났다.
 
<가거라! 내가 너를 보낸다>는 최분도 신부님이 1959년 6월 13일 27세로 사제서품된 그해 10월 대한민국에 선교사로 입국한 후 1990년 2월 초 미국으로 소환되어 미국과 러시아에서 선교활동 중 척수골수암으로 돌아가시기까지의 삶의 기록이다. 그가 한국 선교사 파견을 간청한 이유가 있었다.
      
군인으로 대한민국에 왔던 둘째 형 '메달도'씨가 제대 후 한국을 못 잊어 다시 왔다가 광나루에서 급류에 휘말린 어린이 두 명을 구하고 세상을 떠난 것. 형의 장한 삶에 감동을 받아 한국선교사 파견을 자원했다. 한국에 온 그가 맨 처음 그가 부임한 곳은 연평도였다.

이역만리 한국에 온 그가 가장 먼저 부닥친 어려움은 언어와 식생활이었다. 특히 고추, 마늘, 젓갈이 질색인 그는 도시에서보다 더 짜고 매운 음식에 기가 질렸다. 그래도 그 음식을 군말없이 먹고, 혀를 갉아내는 듯한 매운 통증과 배앓이, 설사와 호된 진통을 참았다.
 
낯설고 물설고 말과 생활이 다른 선교지, 문화 시설이란 한 가지도 없다.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섬,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다. 답답한 현실에 믿을 곳은 오직 주님뿐이다. 그가 밤새워 묵상 기도한 내용을 보면 그가 절실하게 하고픈 내용이 들어있다.
 
"하느님 아버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고, 무엇부터 착수해야 합니까? 전등, 병원, 상수도, 가난…모두 급한 일입니다. 동족끼리 전쟁을 한 대한민국 가난한 이들이 이곳 주민입니다. 마음이 아파요. 어렵고 헐벗고 사는 게…. 게다가 아픈 이들이 많아요. 병원이 없어요. 먹고 사는 것도 급하지만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여기에 병원을 세우고 아픈 사람 낫게 해서 마음의 아픔도 치료해 주고 싶어요"
 
 
그는 주민 후원방법으로 미국의 월간지에 이곳 사정을 알리고 후원자 모집광고를 냈다. 미국 각지에서 후원금이 답지하자 6.25때 참전했던 쾌속정을 2천 달러에 구입해 '바다의 별'이란 병원선으로 개조해 아픈 사람들을 치료했다.
 
최분도 신부는 한국전쟁 때 참전했던 배를 2천 달러에 사 <바다의 별>이란 병원선으로 개조해 환자들을 치료해 줬다
 최분도 신부는 한국전쟁 때 참전했던 배를 2천 달러에 사 <바다의 별>이란 병원선으로 개조해 환자들을 치료해 줬다
ⓒ <가거라! 내가 너를 보낸다>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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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지원을 받아 건설한 화력발전소를 지은 그는 전신주를 설치하기 위해 주민들과 함께 전신주를 나르기도 했다. 식량증산을 위한 간척사업, 유아 돌봄교육 사업, 퇴폐풍조 근절사업, 해외 입양사업 등도 실시했다.
 
정의로운 민주사회를 꿈꿨던 최분도 신부에게 추방명령이 내려지기도

 
1978년 5월 10일 인천 만석동에 있는 동일방직회사에서는 한국 노동운동사에 처음으로 여성이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회사는 온갖 방해 공작을 시도하며 노조위원들에게 똥물을 뿌렸고 이들이 최분도 신부가 있는 성당으로 숨어들자 이들을 숨겨줬다.
 
정부에서는 최분도 신부에게 추방명령을 내렸다. 최 신부의 사목 활동을 잘 알고 있었던 김수환 추기경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최 신부를 추방하면 최 신부가 미국 뿐아니라 전 세계에 유신헌법에 대하여 한국 정부의 잘못을 보도할 것"이라며 만류해 추방 명령이 취소됐다.     
  
최분도 신부 공덕비. 서포리 소나무 산책로 인근에 세워진 공덕비로 1976년 5월 8일 덕적도 주민 6천여명의 마음이 모아진 공덕비다
 최분도 신부 공덕비. 서포리 소나무 산책로 인근에 세워진 공덕비로 1976년 5월 8일 덕적도 주민 6천여명의 마음이 모아진 공덕비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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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초 본국으로 소환된 후 3년이 지나도 미국 메리놀본부에서 한국에 재파견을 안 하자 신자와 성직자 등 2000여 명이 서명하며 최분도 신부 재파견을 요청한 것을 보면 그의 헌신을 알 수 있었다. 최분도 신부가 덕적도에 계실 때 덕적도 주민 1만여명 중 7천여명이 천주교도였다고 한다.
 
최분도 신부 때문인지 덕적도 주민의 다수가 크리스천이라고 한다. 필자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 하지만 최분도 신부의 전기 <가거라! 내가 너를 보낸다>를 읽으며 종교적 헌신과 인간애를 보여준 사람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최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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