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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판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대패삼겹살.
 불판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대패삼겹살.
ⓒ 조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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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마음에 상추하나를 골라 손바닥에 얹는다. 그러는 사이 뜨겁게 달구어진 불판위로 종잇장보다 더 얇은 삼겹살이 치~이이이 소리와 함께 눈 녹는 속도로 빠르게 익어간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노릇한 삼겹살 한 점이 친구들 입속으로 직행한다. 몇 번의 화딱지 나는 경험이 있고 난 후 요령을 터득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 눈앞에서 삼겹살이 순식간에 마술처럼 사라지는 경험할 테니까?

나는 내 몫의 삼겹살 정량을 지키려고 준비부터 확실했다. 삼겹살이 불판에 등판하기 전부터 상추와 마늘과, 파 무침을 미리 상추에 얹고 내 시야 반경 안으로 침투하는 경쟁자들의 젓가락질을 과감하게 차단하면서 그 중 그래도 두툼한 삼겹살 몇 점을 가장 빨리 집어 올릴 위치로 끌어다 놓고 젓가락으로 꾸우욱 눌러놓는다.

불판에서 벌이는 친구들과의 치열한 삼겹살 선점 투쟁은 오롯이 눌러 지킨 삼겹살만이 내입으로 들어온다는 진리를 깨닫게 한다.

내 인생 첫 삼겹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시내를(나와 친구들은 홍명상가분수대 앞, 대전극장 통, 동백사거리 근처를 주기적으로 배회하며 보자고 약속한 공간의 통칭을 시내라고 불렀다) 전전하며 호기를 부리던 한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음악감상실에서 음악을 듣고 허기를 느낄 때쯤인 이른 저녁시간이 되면 이름마저도 우정 넘치는 부라더백화점 뒤 군복골목의 풍전식당을 밥집삼아 드나 들었다.

그 곳에서 처음 맛본 삼겹살. 지금생각해보면 말이 삼겹살이지 삼겹살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얇게 썰어놓았기에 친구들은 대패로 밀어 낸 것 같다 해서 대패삼겹살이라 불렀다. 갓 10대를 넘긴 청춘들에게 1인분에 오백원 하던 삼겹살로는 간에 기별도 할 수 없는, 최소한 10인분쯤 먹어야 이쑤시개를 찾아 고기 좀 먹었다고 의기양양하게 되는 그런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우리보다 몇 년 위의 형들은 진로집에서 두부두루치기를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거나 선화동 뒷골목의 광천식당, 청양식당에서 잦은 회합을 가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도 두부두루치기 집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광천과 청양식당을 두고 두 패로 갈리어 대동소이한 맛 평가 질을 하곤 했다.

그럼에도 적은 돈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식당을 찾을 때는 풍전이 최고였다. 주머니사정을 고려해 보면 고기와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인당 2~3인분의 대패삼겹살을 먹고 난 후 몇 점 고기가 남았을 때 주방을 향해 외치는 '이모, 여기 밥 볶아주세요' 한마디에 인원수만큼의 밥과 남은 반찬을 돼지기름 반 흥건한 불판에 모두 쓸어 넣고 밥공기 뚜껑에 플라스틱 주걱을 지렛대 삼아 현란한 밥 볶기 쇼를 즐기며 얇고 고르게 펴놓고 주방으로 돌아서는 이모를 뒤로한 채 불판에 누른 볶은 밥을 경쟁적으로 긁어 먹는 맛이란 어떤 맛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미였다.

그 후로 한동안 우리의 값싼 단백질과 지방 섭취를 풍전이 책임져 주었다. 다른 우리또래 친구들도 대전극장에서. 중앙시장에서, 유성의 시장골목에서 점점진화 된 삼겹살집의 이모와 아줌마들을 불러댔다. '여기 밥 하나 볶아주세요'를 외치면서 말이다.

당시 우리가 먹었던 삼겹살은 비닐에 쌓아 긴 원통형으로 말아 냉동으로 얼려 아주 얇게 썰어낸 모양이었다. 말이 삼겹살이지 삼겹살이 아니었다. 지금과 확연히 다른 돼지고기를 먹게 된 것은 70년 중반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양돈산업이 시작되면서 일본에 수출되지 못한 부위인 삼겹살과 돼지고기 부산물이 시장에 유통되자 식당주인들이 단백질과 지방을 값싼 비용으로 한꺼번에 섭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이었다.

변두리 시장 한 켠, 대학가주변에서 주머니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학생들과 서민들을 상대로 입맛을 단번에 사로잡은 삼겹살(?)의 성공비결은 불판에 남겨진 돼지기름으로 밥을 볶는 것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고기와 밥 그리고 야채의 적절한 조화는 영양가 만점의 술안주이자 든든한 식사로도 충분했다. 이내 밥 볶는 문화는 대전의 식문화코드로 자리를 잡았다.

밥 볶음 문화를 전국으로 확산시킨 일등공신을 꼽자면 단연 대학생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대전으로 대학 진학을 한 학생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삼겹살 밥 볶음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대전에서 경험한 특별한 맛과 추억을 다른 도시 식당주인들에게 요구했다가 면박을 당했다는 이야기들이 친구들 사이에 오랫동안 추억담으로 회자되면서 삼겹살 밥 볶음은 유행처럼 번져갔다.

우리에게 밥을 비벼먹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한식을 대표하는 비빔밥을 봐도 그렇다. 비벼먹는 문화는 바쁜 농사철 시간을 아끼려는 식사법이기도 했고, 양반들의 제사 식문화에도 제사음식을 비벼 나누어 먹음으로서 공동체의식을 공유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런 비빔의 식문화DNA를 가진 민족이기에 밥 볶음 문화의 출현은 그리 낯선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에서의 밥 볶음문화는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 온 피난민과 농촌에서 도시로 삶의 터전을 바꾼 궁핍한 서민들이 당시로서는 저비용으로 영양까지 해결할 수 있는 새롭게 시도 된 식문화라는 점에서 기존의 비빔과 다른 것이다.

궁핍이 낳은 독특한 맛

궁핍은 필요를 낳고 저렴한 식재료는 대전의 독특한 맛을 낳았다. 30년을 넘게 시민의 사랑을 받아 온 한밭칼국수(선화초등학교 앞 골목에서 옛 목척시장방향), 이곳에서도 '아줌마 밥 볶아주세요'소리가 주방을 향한다. 점심시간이면 대기표를 받아야 할 정도로 손님이 많은 대전 사람들만 아는 숨은 맛 집중의 하나. 특히, 비오는 날이나 해장이 필요한 인근의 직장인들로 항상 분빈다.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외지인에게는 생소한 '두부탕'이다

삼겹살의 밥 볶는 문화가 두부와 칼국수에 접목되어 새롭게 변형된 특별한 맛이다. '두부탕'이 특별한 이유는 이 음식이 주인과 손님의 합작품이기 때문이다. 30여 년 전 두부두루치기를 주문한 손님에게 그만 실수로 두부가 국물에 둥둥 떠 있는 이상한 모양이 되었단다. 이를 본 손님이 주인에게 국수를 넣어 달라고 했고 그 맛 또한 나쁘지 않았단다. 그렇게 주인의 실수와 손님의 아이디어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두부탕'이 되었다.

는 방법도 독특하다. 냄비에 두부를 넣고 넉넉히 육수를 부어 한소끔 끓어오르면 먼저 두부를 건져 먹고 남은 국물에 칼국수 면을 넣어 먹은 후 자작한 국물에 밥과 김을 넣고 냄비에 밥이 눌릴 때까지 기다렸다 먹는 맛이란... 상상하지 마시고 대전에 오실 때 꼭 맞보시라

'당신이 어떤 것을 먹는 지 알려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 주겠다'는 미식예찬의 저자 브라야 사바랭의 말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음식은 소속된 사회의 역사가 녹아있다. 음식을 먹는 다는 것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것을 넘어 작게는 가족공동체에서 넓게는 한 사회를 이 해하는 척도가 된다.

'대전은 먹을 것이 없다'라는 자주 듣게 되는 데 원래 충청도 사람들은 상다리가 휘도록 음식을 차려 놓고도 차린 것 없다고 말하는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입장에서 대전음식을 소개해 달라는 요구에 '대전은 먹을 게 없는데...'라며 말을 흐리게 된다. 그런데 대전 사람들의 이런 태도를 모르고 말 그대로 듣게 되면 정말 먹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전음식을 소개받고 싶다면 질문을 바꿔보라 '대전 사람들이 즐겨 먹는 것은 무엇인지' 아니면 '대전에서만 맛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 물어보면 틀림없이 대전 사람들의 삶이 담긴 음식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음식은 곧 삶이다 

대전음식에는 대전 사람들의 삶이 투영되어있다. 도시 대전은 일제의 손에 의해 건설된 일본인을 위한 신도시로 반세기를 살았고, 전쟁을 피해 내려온 피난민과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사람들이 도시의 구성원 되어 또 반세기를 살아 낸 곳이다. 각기 다른 성향의 사람들과 다른 환경에서 살다온 사람들이 아무 연고도 없는 대전에서 산다는 것은 자신들의 성향과 환경을 버리고 살아야 내는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어머니가 물려주신 입맛이었을 것이다. 가진 것 없이, 연고 없이 새로운 환경인 대전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치열함과 그리운 고향, 어머니의 손맛들이(칼국수로, 냉면으로, 닭볶음탕으로, 돌솥밥으로, 때론 국밥이 되어)대전 사람들의 삶이 담긴 음식들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대전 사람들은 대전의 맛을 어느 한 음식으로 대표반열에 올릴 생각이 없다고 생각한지 오래다. 그저 식당마다 차려진 음식 수만큼의 어머니 손맛이 그리울 때 대전 원도심의 허름한 식당골목을 찾아들거나 대전에 추억한 자락 쌓아놓은 인연이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기억을 더듬어 삶으로 터득한 밥 볶는 문화를 마음껏 즐기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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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대전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고 대전문화연대 협동처장으로 활동하며 영상기획 제작을 하는 오렌지나인 대표로 있다.

태그:#대전, #대전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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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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