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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대 트레일 중 가장 길고 험하다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이하 피시티) 4300km. 미국 LA 문화단체 '컬쳐앤소사이티(대표 줄리엔 정)' 기획으로 고난의 행군을 자처한 한국 하이커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 기자말

7년 전 특전 부사관이 되겠다는 꿈을 접고 학생군사교육단(ROTC)으로 군 장교가 되기 위해 4년제 대학교 체육교육과에 입학했다. 자유로운 캠퍼스 낭만을 꿈꾸며 무엇이든 경험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맞닥뜨린 건 체육교육과에 팽배한 상명하복 문화였다.

입학 하루 전, 학교가 나를 처음 찾은 건 체대 단체기합이었다. 농구하다 왼쪽 발목을 다쳐 깁스한 나는 목발을 짚으면서 말 못할 단체 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딱딱한 규율과 터무니 없는 명령들. 내가 꿈꾸던 곳이 아니었다.

자연을 좋아해 대학 산악부에 들었다. 그런데 술 취한 선배가 욕을 해댔다. 체대생은 외부 동아리에 못 들어간다며 내가 규율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경멸감이 생겼다. 결국 1학년 1학기를 마치기도 전에 휴학했다. 다른 대학 식물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재수를 했다. 하지만 그것마저 실패. 왜 나는 되는 것이 없나 자책했다.

'나는 누군가'라는 질문이 이끈 4300km 트레일

그러고는 군입대를 했다. 2년 뒤 복학한 대학. 하지만 대학은 여전히 따분했다. 목적 없이 수업을 들어야 했다. '왜 살까?'라는 생각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누군가, 무엇을 좋아하는가. 나는 왜 이 강의실에 있나. 해답 없이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당시 페이스북 친구를 통해 4300km 미국 서부를 종주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아래 피시티)를 알게 됐다. 페북 친구는 피시티를 완주하며 찍었던 사진을 페이스북에 업로드했다. 광활한 자연과 그 속에서 고생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저 뜨거운 사막을 어떻게 걷지?' '수염 난 것 봐, 씻지도 못하네' '엄청 힘들겠다' '진짜 개고생이다' 사진만 보며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러다 피시티를 다룬 영화 <와일드(Wild)>를 봤다. 도전과 실패, 자연과의 사투. 그때 결심했다. 그래 나는 피시티다!
          
    영화를 보고 가야겠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 와일드 영화  영화를 보고 가야겠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 W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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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건설 현장서 여행경비 800만원 마련

여행 경비를 벌어야 했다. 2015년도 피시티 종주자 양희종이 쓴 책 <4300km>에는 피시티 비용이 8천~9천 달러가 든다고 적혀 있었다. 1000만원을 모으기로 하고 2016년 8월, 대학에 휴학계를 내고 청주에 있는 화장품 공장에 들어갔다.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10시까지 일했다. 레일을 타고 들어오는 상자를 지게차 운반용 팔레트에 쌓는 일이었다.

3주 뒤에는 인력소로 갔다. 숙식 제공에 일당 11만 원. 충북 진천군의 아파트 건설 현장이었다. 콘크리트를 타설 전 배관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6개월 동안 800만 원을 모았다. 비행기를 예약하고 피시티 허가증, 미국 관광비자인 B1/B2 비자를 받아 2017년 3월 25일 출국했다.
 
  여행 경비를 벌기위해 전기골조 작업을 숙식하면서 일을 하였다.
▲ 진천군 맹동면 현장에서   여행 경비를 벌기위해 전기골조 작업을 숙식하면서 일을 하였다.
ⓒ 정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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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현지 한국인 도움으로 피시티 출발지인 멕시코 국경마을 캠포로 곧장 이동했다. 도움을 준 사람은 삼촌 뻘인 초등학교 동문 선배의 사촌이었다. 사실상 남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6시간이나 차를 태워 멕시코 국경지대까지 바래다 주었다. 너무 감사했다.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한인분께 한 달 치 식량을 담아 놓은 박스를 한 달 뒤 도착할 장소로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걸음을 나섰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뭔가 시작한다는 것이 그때, 피부로 와 닿았다. 언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손에 잡히지 않은 시간이었다.

미국 산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산을 좋아하던 나는 23살 군전역후 좋은경험으로 파키스탄을 다녀왔다.
▲ 2015 한국 청소년 오지탐사대 파키스탄 팀 산을 좋아하던 나는 23살 군전역후 좋은경험으로 파키스탄을 다녀왔다.
ⓒ 정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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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산행을 시작했다. 대학 산악부 활동을 하며 제법 산행 경험이 있었다. 설악산 2주 동·하계훈련, 히말라야 파키스탄 트레킹 250킬로미터, 일본 동계 북 알프스 2주 원정 등을 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피시티는 이제까지 경험한 산과 전혀 달랐다. 한국산은 오밀조밀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뭉쳐 있는 느낌이라면 미국은 거대하고 넓은 사막과 들판, 산들이 끝이 없었다.
   
광활한 대자연 정말 넓은땅이 미국이라고 생각되었다.
▲ 넓은 사막 광활한 대자연 정말 넓은땅이 미국이라고 생각되었다.
ⓒ 정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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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30km를 매일 걷는 것도 처음이었다. 새끼발가락, 엄지발가락, 발바닥 뒤꿈치까지 물집이 골고루 잡혔다. 기온은 낮에 뜨겁다가 밤에는 뚝 떨어졌다. 특히 배낭이 너무 무거웠다. 배낭에는 담배 한 보루와 헤드랜턴에 쓰는 다량의 건전지, 응급치료 키트, 3.5kg 2인용 텐트 등 모두 25kg 정도였다.

내 배낭에는 또 '중학 영단어' 책이 있었다. 하이킹의 또 다른 어려움은 영어 회화였다. 우체국에 가서 택배를 보내려고 해도 영어가 안 돼 프린트한 종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아이 원 투 센드 히얼(I Want To Send Here)"이라고 어설프게 말했다.

식당에서도 다른 사람처럼 속이 가득 찬 햄버거를 먹고 싶었지만 나에게 돌아온 것은 고기 패티 한 장에 야채 몇 조각이었다. 무슨 재료를 올려 먹을 건지 설명해야 하는데 말이 안 돼 기본 재료만 올라간 것이었다. 외국인 하이커와 술을 마시며 왁자지껄 대화하고 싶었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위스키를 숟가락으로 떠먹다
  
피시티에서는 하이커들끼리 별명인 '트레일 네임(Trail Name)'을 만들어 부른다. 캘리포니아 남부 모레나 호수(Lake Morena, 운행 2일째, 운행 거리 32km)에 도착해 상점에서 파이어볼(fire ball)이라는 위스키를 샀다. 시나몬 맛이 나는 독특한 위스키였다.
 
나의 트레일 네임이 된 FIRE BALL 위스키
▲ FIRE BALL(파이어볼) 위스키 나의 트레일 네임이 된 FIRE BALL 위스키
ⓒ 정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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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외국인 하이커들에게 위스키를 나눠주며 인사를 했다. 그때 한 미국인 하이커가 나를 "파이어 볼(fire ball)"이라고 불렀다. 그날로 내 이름은 파이어 볼이 됐다. 왠지 만화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입에 착착 붙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가끔 물이랑 헷갈려서 마신적이 있기에 네임펜으로 술이라고 크게 써놓았다.
▲ 페트병 술통 가끔 물이랑 헷갈려서 마신적이 있기에 네임펜으로 술이라고 크게 써놓았다.
ⓒ 정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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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좋아해 위스키를 1리터 페트병에 담아서 다녔다. 술이 부족한 날이면 캠핑용 컵에 남은 술을 부은 뒤 숟가락으로 떠 마셨다. 그러면 빨리 취할 수 있었다. 한 날은 위스키를 많이 마시고는 배낭에 있던 물을 모두 마셔버렸다.

아침이 돼서야 사태를 확인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그날 물 없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 16km를 걸어야 했다. 작열하는 태양은 나를 미라처럼 바짝 마르게 했다. 머리가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았다. 갈증의 끝을 보았다.
      
남부 캘리포니아 끝 테하차피(Tehachapi, 운행 37일째, 운행거리 911km)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상점에서 소고기와 수박, 초코우유를 잔뜩 샀다. 잘 곳을 찾다 건설 현장 구덩이를 발견했다. 주변에 흙도 쌓아 올려져 사람들 눈을 피하기 좋아 보였다.

페트병에 담긴 위스키를 꺼내 마셨다. 순간 외로움이 몰려왔다. 문득 나 자신이 처량했다. 머리는 떡 지고 발 냄새는 올라오고 손톱에는 때가 잔뜩 끼었다. 온몸에 쉰내가 풀풀 났다. 가족과 친구가 그리웠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태그:#정기건, #PCT, #PACIFIC CREST TRAIL, #피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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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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