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05 15:02최종 업데이트 19.09.05 15:16
예술의 경지는 노력만 가지고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아무리 재능을 타고나도 환경이 받쳐 주지 못하면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없고, 좋은 환경이라도 선천적 재능이 뒷받침 되지 못하면 뛰어난 예술가가 되지 못한다. 대개는 타고난 재주와 환경이 잘 어울렸을 때 완성된다. 그런 면에서 예술은 선택받은 이들의 전용 무대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서양에서도 고흐나 피카소 등 세계적인 화가들은 미술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었고, 조선시대 안견이나 김홍도, 김정희 같은 사람들도 모두 미술가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조선시대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만 보더라도 대를 이어 하거나 주변 환경이 화가로 성장할 여건이 된 경우가 많았다.

안동 김씨 집안 4형제 서예가
 

송영방 작 ‘김충현 초상’과 백악미술관 전경. ⓒ 황정수

 
한국미술사에서 한 집안 형제들이 예술적 재능이 많기로는 개성 황씨 4형제가 유명하였다. 일제강점기 개성 출신의 서화가 황씨 4형제는 네 사람 모두 각기 다른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첫째 황종하(黃宗河)는 호랑이 그림으로 유명하였고, 둘째 황성하(黃成河)는 산수화와 지두화로 이름을 날렸다. 셋째 황경하(黃敬河)는 서예로, 넷째 황용하(黃庸河)는 사군자 특히 국화 그림이 독보적이었다.

개성에 황씨 4형제가 있었다면 서울에는 안동 김씨 4형제가 서예로 명성을 날렸다. 이들 4형제는 경인(褧人) 김문현(金文顯, 1913-1974),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1921-2006),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 1923-1991),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1926-2007) 등이다. 네 사람은 모두 각각 다른 재능을 보이며 각 분야에서 빼어난 활약을 보여, 어떤 집안의 형제들도 따르기 힘든 수준을 보여주었다.


첫째 김문현은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써 이름을 날렸다. 그의 글씨는 단아하고 품격이 있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 더 이상 재주를 뽐내지 못했다. 둘째 김충현은 중동학교 다닐 때부터 서예로 유명하였다. 같은 문중의 서화가 김용진(金容鎭)으로부터 서예를 익혔다. 4형제 중 서예가로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셋째 김창현은 한시에 밝고 글씨를 잘 썼다. 중앙고보를 나와 경복고와 중앙고에서 한문을 가르쳤다. 한시를 잘 해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교지 등에 한시를 발표하였다. 그의 글씨는 단정하면서도 칼같이 날카로운 면이 있다. 넷째 김응현은 영문학을 전공하였으나 서예에 전념하여 평생 서예가로 살았다. 5체 모두에 능했으나 특히 육조 해서에 특히 뛰어났다. 1956년 '동방연서회' 창설에 관여하였으며, 서예 잡지 '서통(書通)'을 창간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흔적은 인사동 지역에 많이 남아 있다. 관훈동에는 붉은 벽돌 건물로 지은 '백악미술관'이라는 보기 좋은 건물이 있다. 주로 서예 관련 전시회를 많이 하는 곳으로 이들 형제 중 '김충현'을 기리는 건물이다. 이곳 3층에는 늘 김충현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김충현 형제의 집안 내력

김충현 등 4형제는 조선시대 이후 최고 명문 중 하나인 안동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학문과 예술에 조예가 깊어 많은 학자와 예술가를 배출하였다. 김충현 형제들이 모두 학문과 서예에 특출한 재능을 보인 것처럼, 그의 부친 형제들도 모두 학문이 깊었다. 또한 그 이전의 선대들도 한 시대를 풍미한 학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조선시대 저명한 문신인 김창집(金昌集)의 6형제 중 막내 김창립(金昌立)의 후예로, 고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증조부 김석진(金奭鎭)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자결하여 순국한 인물이다. 조부 김영한(金甯漢)은 광무 연간에 관료를 지냈으며, 학문과 서예에 일가를 이룬 인물이었다.

김충현의 부친인 김윤동(金潤東)과 그 3형제도 모두 학문과 예술에 빼어난 재능을 보였다. 부친인 김윤동은 한학에 뛰어났으며 글씨도 잘 썼다. 숙부인 김순동(金舜東)은 성균관장을 지냈으며, 윤용구(尹用求)에게 배운 글씨도 좋다. 막내 숙부인 김춘동(金春東)은 한문학을 공부하여 고려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한문학사'를 저술하여 한문학 체계의 기틀을 잡았다.

김충현의 한글 서예
 

김충현 중동학교 시절 글씨 ⓒ 백악미술관


집안 내력의 재능을 받은 4형제 중 서예가로서 가장 빼어난 재능을 보인 이는 둘째 '김충현'이다. 그는 이미 중동학교 다닐 때부터 서예에 재능을 보여 학생 공모전에서 수상을 할 정도였다. 그 때 쓴 한글 글씨와 한문 글씨 두 종이 남아 있는데, 모두 뛰어난 솜씨를 보인다.

김충현은 한글 글씨와 한문 글씨 모두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서예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한글 서예'를 발전시킨 일이다. 그의 초기 한글 글씨는 주로 '흘림체'였는데 조선시대 '궁체(宮體)'를 이으면서도 현대 철자법에 어울리게 만들었다.
 

김충현 ‘우리 글씨 쓰는 법’ 1971년 ⓒ 백악미술관

 
1942년에 '우리 글씨 쓰는 법'을 펴냈는데, 이때 조선시대 한글을 발전시켜 '한글 고체'를 창안하였다. 이 글씨체는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등의 옛 판본체에 전서와 예서의 필법을 더하여 고안한 것으로 정인보(鄭寅普)에 의해 '고체(古體)'라 이름 지어졌다. 1947년에 쓴 '유관순 기념비'는 해방 이후 최초의 한글 비문으로, 이후의 한글 비문 제작에 견인차가 되었다.

그의 한글 글씨는 해방 후에도 국가의 중요한 일에 자주 쓰였는데, 그 중에서도 '한강대교'를 세울 때 다리 이름을 한글로 쓴 것은 매우 유명하다. 1956년 복구된 '한강대교'의 한글 현판은 원래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를 받으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한문은 잘 썼으나 한글 글씨에는 익숙하지 않아 평소 재주를 눈여겨 본 김충현을 추천하여 쓰도록 했다는 일화다. 이후에도 이승만은 김충현의 글씨를 좋아하여 여러 가지 국가 행사의 일을 맡게 하였다.

김충현의 한문 서예
 

김충현 ‘화목련실’ 1970년대 ⓒ 백악미술관

 
김충현의 한문 글씨는 전·예·해·행·초 5체를 두루 썼다. '북비남첩(北碑南帖)'이라 불리는 전통 서예 학습에 전념하여 해서를 습득하였고, 또한 '금석문(金石文)'을 바탕으로 하여 전서를 갖추었고, '한예(漢隸)'를 바탕으로 예서를 가다듬었다.

그의 5체 글씨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예서'다. 그의 예서는 다른 서예가들과는 다른 고졸한 멋이 출중하여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한나라 예서뿐만 아니라 예기비(禮器碑), 장천비(張遷碑) 등 한대 걸작을 섭렵하여 새로운 형태를 창조한 독특한 필체였다. 이는 추사 김정희의 '법고창신(法古創新)' 정신을 따른 것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김충현은 김정희의 예술정신을 사랑하였으나 글씨만은 '추사체(秋史體)'를 따르지 않았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정신은 따르면서도, 자신의 예술 근간은 한나라 예서를 자기화하는 데서 그 정신을 찾으려 하였다. 그의 예서가 이름을 얻은 것도 이렇게 자신만의 굳건한 세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충현. ‘건춘문’, ‘영추문’ 1975년 ⓒ 황정수

 
김충현은 서예가로서 승승장구하였다. 수많은 국가 기관의 현판이나 행사의 글씨를 썼다. 전국 방방곡곡에 쓴 유려하고 정갈한 현판만도 수백 개에 달한다. 궁궐, 사찰, 서원 등 없는 곳이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현판은 역시 경복궁 중건할 때에 쓴 '건춘문(建春門)'과 '영추문(迎秋門)'의 현판일 것이다.

김충현 본인 스스로도 두 현판을 쓴 일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안동 김씨 명문 후예로서 궁궐의 현판을 쓴 것에 대해 더욱 영광스러워 했다. 그는 "옛날 대궐문 현판은 명필로서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썼다는 전통이 있어 두 대궐문 현판을 쓴 데 대해 일생의 영광으로 삼고 있다"고 하였다.

필자는 광화문에 있는 '건춘문', '영추문' 두 곳의 글씨를 볼 때 마다 '광화문(光化門)' 현판을 생각한다. 김충현의 두 현판은 어느 현판 못지않게 진중하고 격조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현재 재현한 '광화문 현판'은 컴퓨터에 의해 새로 재현되며 서예 특유의 '기운생동'하는 맛이 없다.

그런 면에서 '광화문' 현판을 김충현의 글씨처럼 현대 서예가들에게 공모하여 새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또한 글씨체도 우리나라의 자랑인 '한글'로서 누구나 쉽게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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