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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나와 남편은 제주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육지에서 내려가 제주에서 새롭게 직장을 구하고, 일을 배우면서 순식간에 반년이 흘렀다. 그렇게 결혼한 뒤 맞는 첫 명절, 추석이 다가왔다. 짧은 연휴에 제주에서 시댁인 서울과 친정 전라북도를 돌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찔했다. 그렇다고 시댁이나 친정을 가지 않을 순 없는 일, 고민하던 내게 남편이 말했다. 

"우리 어머니가 내려오신다는데?" 

들어보니 서울에 홀로 계신 시어머니가 여행 삼아 좀 길게, 일주일 정도 내려와 계시겠다고 말씀하셨단다. 제주-전라도-서울-제주 코스를 돌지 않아도 된다니 감사한 일이다. 가만 있자... 그런데 그럼 음식을 어떡한다? 남편은 '우리 어머니 아무 거나 다 잘 드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평소 우리가 먹는 것처럼 간단한 찬을 드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혼 후 첫 명절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나는 밑반찬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결혼 후 첫 명절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나는 밑반찬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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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야근과 휴일근무에 치이면서도 밑반찬을 만들었다. 사이사이 짬이 나면 집안 청소를 했다. 드디어 어머님이 오시는 날,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집에 도착해서는 다과를 내어드린 뒤 곧장 부엌에 들어가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날의 저녁메뉴는 은갈치구이에 성게미역국이었던가. 맛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동동거리며 오븐과 가스레인지를 오간 기억만 또렷하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과일을 깎아드린 뒤 설거지를 끝내고 거실에 앉았다. 시어머니가 자리에 앉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셨다.

"얘, 나 이러려고 온 거 아니다." 

그 말을 기점으로 '위로부터의 개혁'이 시작되었다. 시어머니는 앞으로 명절에 전이며 송편 같은 음식대신, 모두가 좋아하는 스테이크나 갈비구이(시어머니와 남편, 시누이는 고기요리를 무척 좋아한다)를 먹자고 제안하셨다. 외식이면 더 좋다는 말씀과 함께. 그리고 내 손을 잡으시며 나는 아침에 토스트 한 쪽과 커피만 마시는 사람이라고, 그것도 손수 토스트 하는 게 편하다고 강조하셨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부랴부랴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보니 노릇노릇 잘 구워진 식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시어머니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분이었다. 그렇게 집밥과 외식의 비율이 3:7인 결혼 후 첫 명절을 보냈다. 
 
갓 구운 토스트가 기다리던 명절 아침
 갓 구운 토스트가 기다리던 명절 아침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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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생, '과도기 세대'인 나의 시어머니 

시어머니는 1949년생 소띠, 그러니까 올해로 71세이시다. 당시 여성들이 많이들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 역시 손 많은 집의 며느리였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현재 시어머니 손윗분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며느리 입장으로 수십 번의 명절을 치렀다. 차례부터 손님상 접대까지... 허리 한 번 제대로 펼 새 없이 반복해서 밥 차리고 설거지를 하다 보면 날이 저물어있었다. 그렇게 살아오셨던 분이 자신의 며느리에게 '명절 외식은 사랑이며 한 그릇 음식은 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어머니... 진짜 전 안 부쳐도 괜찮으세요?"
"우리가 명절에 전 먹으러 모이니? 나는 이제 전 싫다 얘."


그때 깨달았다. 나의 시어머니는 '과도기 세대'이셨던 거라고. 윗세대는 차례를 원하고, 아랫세대는 해외여행을 원하는 그 사이에 위치한 세대. 며느리가 홀로 전 부치는 것이 당연했던 마지막 세대. 시어머니는 결혼 이후 수십 번의 명절을 보내고 나서 결심하셨다. 누군가의 노동에 기대어 보내는 명절을 만들지 않겠노라고. 
 
어느 명절 먹었던 제주의 해물탕, 다같이 먹어 그런지 국물이 끝내줬다
 어느 명절 먹었던 제주의 해물탕, 다같이 먹어 그런지 국물이 끝내줬다
ⓒ 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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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첫 명절이었던 2013년 추석 이후 시어머니와 나는 11번의 명절을 함께 보냈다. 명절 풍경은 자주 바뀌었다. 배경지는 제주였다가 서울이 되었고, 시누이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으면서 사람 수도 늘었다. 오손도손 떡국을 해먹는 설도 있었고, 근사한 예약제 정찬집에 가본 추석도 있었다. 그 가운데서 변하지 않은 것은 딱 하나, 모이는 이들의 '웃는 얼굴'이다. 

상차리기부터 설거지까지 모두가 역할을 분담하니 과도한 노동이 없고, 음식도 갈비찜이나 대하구이 같은 메인 메뉴만 만들어 내놓으니 기름 냄새에 체하는 사람도 없다. 여차하면 외식으로만 식사를 하기도 한다. 덕분에 나는 그 드물다는 명절 증후군 없는 며느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구성원 전체가 즐거워야 명절'이라는 시어머니의 명제 아래 시작된 변화였다. 

전을 부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우리 가족은 다들 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만들지 않는 것뿐이다. 내 시어머니의 말씀처럼, '왜 모였는지'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명절을 사전으로 검색해 보면 '해마다 일정하게 지키어 즐기거나 기념하는 때'라는 설명이 나온다. 줄일 수 있는 일은 줄이고, 줄일 수 없는 일은 공평하게 분담하니, 비로소 명절을 '즐기고 기념하는 때'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부디 이번 추석에는 덜 일하는 집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노동을 덜어낸 만큼 담소를 채워 넣어 풍요로운 한가위 되시기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relaxed)에도 실립니다.


태그:#명절, #추석, #노동, #시어머니,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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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와 밤이 있는 한 낭만은 영원하다고 믿는 라디오 작가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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