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사진보기
▲ 피렌체와 르네상스 관련 도서들  2014년부터 모은 책들이다. 지금은 60권을 훌쩍 넘어섰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여행은 같은 장소를 가더라도 개개인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형태와 경험으로 나타난다. 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여행관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여행관이 확립되는 데 영향을 준 계기가 있다.  

2014년 6월, 첫 번째 피렌체 여행을 다녀온 후 곧바로 그해 10월 두 번째 피렌체 여행을 결심했다. 배경지식 없이 다녀온 첫 번째 여행이 아쉬워서 열심히 책을 읽으면서 준비했다. 사실 여행보다 더 즐겁다는 여행 준비 단계에서 머리 싸매고 책을 파는 일은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다. 특히 거의 처음 접하는 생소한 분야이다 보니 아무리 책을 읽어도 부족한 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두 번째 여행에서는 하루 정도 '지식 가이드 투어'라는 것을 신청했다.

2000년대 초부터 새로운 여행 문화가 생겼다. 여행 일정은 내가 원하는 대로 짜지만 해당 도시에서는 전문 가이드의 투어를 신청하는 것이다. 이런 가이드들은 현지 공식 가이드 자격을 보유한 한국인 유학생이거나 교민인 경우가 많다. 현지 사정도 잘 알고 역사와 문화재에 대한 전문성까지 갖추었기에 이들을 '지식 가이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체 패키지와 달리 자유도가 높고 가성비가 좋아 배낭 여행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나도 2014년 6월에 만족스러운 이탈리아 남부 지식 가이드 투어를 받은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두 번째 피렌체 여행에서 지식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다. 하지만 아는 만큼 여행의 재미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르는 것만큼 잘못된 가이드를 받는 경우도 있다.

운이 좋다고?

내가 신청한 투어는 피렌체 시내를 돌아 우피치 미술관을 관람하는 코스였다. 투어를 맡은 가이드는 피렌체에 왔다가 그 아름다움에 빠져 눌러앉게 됐다고 했다. 활기차고 힘 있는 목소리로 재미있는 해설이 막힘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설명을 듣는 중에 조금씩 이상한 점을 느꼈다. 묘하게 사실관계를 약간씩 왜곡하거나 과장하는 듯했다. 그래도 여행객들에게 좀 더 재미있는 경험을 제공해주기 위한 가이드의 입담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우피치 미술관에서 문제점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가이드는 일행을 이끌고 이런저런 설명을 곁들이며 미술관 복도를 걸어갔다. 일행들은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사진 촬영에 정신이 없었다. 이 모습을 본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여러분들은 정말 운이 좋은 겁니다. 우피치 미술관은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촬영이 허가됐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매우 기뻐했다. 일행 중 한 중년 남성은 아내에게 자신이 여행 시기를 잘 잡은 거라며 뿌듯해했다. 하지만 나는 불과 4개월 전에 이 미술관을 방문했었고, 그때도 사진 촬영에 대한 제한은 '플래시 사용금지' 외에는 전혀 없었다.
  

큰사진보기
▲ 우피치 미술관 복도  가이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진촬영이 불가했다고 했지만, 나는 이 사진을 4개월 전인 2014년 6월 18일에 찍었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원근법을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

이후 우리는 보티첼리의 유명한 작품 '봄'을 보러 갔다. 가이드는 작품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 원근법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원근법을 체험해보기 위해서 작품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작품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그림 속 인물의 발끝이 여러분들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걸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더했다.

"이것이 원근법을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가이드의 말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분주히 오갔다. 그리고 정말 발끝이 자신들의 시선을 따라온다며 신기하다고 했다. 가이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연실색했다.

그림 속 인물의 발끝이 시선을 따라오는 듯이 보이는 것은 2차원 평면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당연히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과 달리 왜곡된다. 정면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만 봐도 인물의 시선이 나를 따라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건 평면 이미지라면 모두 나타나는 현상이며 르네상스 미술의 특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된 원근법 감상법이라니…

작품 앞에 모인 여러 국적의 관람객들은 가만히 서서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직 우리 일행들만 분주히 작품 앞을 오가면서 다른 이들의 관람을 방해하고 있었다.
  

큰사진보기
▲ 보티첼리의 "봄"  우리 일행은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이 그림 좌우를 왔다갔다 했다. (본 사진은 2018년에 찍은 사진이다. 2014년 사진에는 가이드와 일행들의 얼굴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 박기철	관련사진보기

 
나중에는 카라바조의 '메두사' 앞에서도 좌우로 움직이면서 감상하라고 할 때는 정말 할 말을 잃었다. 결국 귀국 후에 해당업체 홈페이지에 항의글을 올렸다. 이후 해당 업체와 가이드는 적극적인 사과와 해명을 해주었고 일부 오해가 풀릴 수 있었다.

물론 모든 가이드들이 이렇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경험했던 그 가이드를 포함해 대부분의 가이드들은 유익한 투어가 될 수 있도록 성실하게 노력할 것이다. 다만 사람인지라 잘해보겠다는 욕심이 앞서서 실수한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 해당 업체와 소속 가이드들은 현재까지도 매우 만족도 높은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대상에 대해 강렬했던 경험은 오랫동안 남아 향후 행동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결국 나는 이 일로 인해 '아는 만큼 보인다'는 여행관을 확고히 가지게 됐다.

그리고 실제로 피렌체는 아는 만큼 보이는 도시이기도 하다.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