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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5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KEC-기륭 사태 해결촉구 기자회견'에서 KEC노동자가족대책위 소속 최승아씨(왼쪽에서 세번째)와 김은숙씨(왼쪽에서 두번째)가 KEC 사태 해결을 호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0년 10월 25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KEC-기륭 사태 해결촉구 기자회견"에서 KEC노동자가족대책위 소속 최승아씨(왼쪽에서 세번째)와 김은숙씨(왼쪽에서 두번째)가 KEC 사태 해결을 호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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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부품을 생산하는 중견기업인 KEC가 남성만 관리직으로 승진시키고, 여성은 모두 승진에서 배제하는 등 수십 년간 여성 노동자를 차별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최영애, 아래 인권위)는 19일 "여성을 남성보다 낮은 등급으로 채용해 단순·반복 업무에만 배치하고, 승진에 필요한 직무와 직위는 남성에게만 부여하는 등 여성을 승진과 임금에서 차별했다"며, KEC에 성차별 해소를 위한 적극적 조치를 시행하라고 권고했다.

20년 이상 일한 여성은 모두 사원급, 남성은 모두 관리자급

지난 1969년 전신인 '한국도시바'로 출발해, 서울 본사와 경북 구미 공장에 591명이 일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KEC는 지난 2010년부터 노조 파괴와 정리해고, 노조 상대 손배가압류 등으로 노사 갈등을 겪고 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구미지부 KEC지회(지회장 이종희, 아래 KEC지회)는 지난해 2월 7일 회사에서 성별을 이유로 임금과 승진에서 차별하고 있다면서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회사에서 생산직 노동자를 채용할 때 여성은 남성보다 낮은 등급을 부여하고, 채용 후에도 같은 사원으로 입사한 여성 노동자들이 모두 사원으로 머무는 동안 남성은 모두 관리자급으로 승진시켰다는 것이다.

실제 인권위 조사 결과, KEC에서 20년 이상 일한 생산직 노동자 108명 가운데 여성 52명은 모두 사원급인 J등급(J1, J2, J3)에 머문 반면, 남성 56명은 모두 관리자급인 S등급(S4, S5)으로 승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생산직 노동자 전체 353명 가운데 여성이 151명이었지만 S등급 이상 관리자급은 단 1명도 없었고, 남성은 202명 가운데 90.1%에 이르는 182명이 관리자급이었다. KEC의 임금 체계 역시 등급의 절대적 영향을 받고 있어, 여성 노동자들은 임금에서도 남성에 비해 상당한 불이익을 받고 있었다.

이에 KEC쪽은 "생산직의 제조 업무 중 현미경 검사 등 세밀한 주의를 요하는 업무에는 과거부터 여성 노동자를 많이 채용했는데 숙련도가 필요하지 않는 단순반복 작업이므로 생산직 중에서 가장 낮은 등급을 부여했고, 관리자는 전체 공정의 이해와 함께 설비에 대한 기본지식이나 경험이 있어야 하고 무거운 장비를 다뤄야 하므로 '체력이나 기계를 다루는 능력'을 겸비한 남성 노동자가 상대적으로 승격에 유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권위는 "생산직 제조직렬 노동자의 경우 남·여 구분 없이 3조 3교대로 운영되고 있고, 출하 및 품질관리 직렬 노동자들도 제조 직렬에서 순환 근무를 하고 있었다"면서 "생산직 남녀 노동자들의 작업 조건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없고 책임이나 노력의 정도 또한 실질적 차이가 크지 않다"라고 밝혔다.

또한 인권위는 "설령 생산직 노동자들에게 설비에 대한 기본 지식이나 경험이 필수적이라고 하더라도 교육훈련이나 직무부여 등을 통해 여성 노동자들도 그 능력을 갖추게 할 수 있음에도, 회사는 수십 년간 설비에 대한 기본 지식이나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남성 노동자에게만 부여하고 여성 노동자에게는 이와 관련한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전혀 제공하지 아니하였던 점은 회사가 여성 노동자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인권위는 "KEC가 여성 노동자는 '숙련도가 필요하지 않는 단순반복 작업에 적합'하거나 '위험하고 무거운 부품을 관리하는 업무는 담당하기 어렵다'는 성별 고정관념과 선입견에 기인하여 여성 노동자를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남성은 가족 책임져야 하니 이해하라?" 여성 노동자들 '모멸감' 심해

KEC 노동자는 사원급인 J1, J2, J3과 관리자급인 S4, S5 등 5개 등급으로 나뉘는데, 채용 시 여성은 가장 낮은 J1등급을 부여하는 반면, 남성은 한 단계 높은 J2 등급을 부여했다. KEC지회에 따르면 등급간 승격 기간도 여성은 보통 7~8년이 걸리는 반면, 남성은 3~4년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수십 년간 여성 노동자가 S4 등급 이상으로 승격한 사례도 없었다고 한다. 실제 1988년 입사한 한 여성 노동자의 경우 지난 2010년 이전 S4등급 승급 시험과 논문을 통과했지만 면접에서 '단순 업무'라는 이유로 떨어졌다. 반면 '단순 업무'를 하는 남성 노동자가 승급돼 항의하자, 면접관이 "남성 사원은 가정이 있는 사람이고 가족을 책임져야 하니 이해하라"고 했다고 한다.

인권위는 "수십 년간 승격에서 배제되고 승진에서 누락되면서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면서 모멸감, 자괴감을 느끼는 동시에 열심히 일해도 존재를 부정당하는 심한 박탈감을 느꼈고, 자존감이 낮아지거나 무력감을 느꼈다고 호소하고 있다"고 밝혔다.

금속노조 KEC지회는 이날 "KEC가 여성노동자의 저임금에 기초해 사업장을 운영했고 남녀 간 임금 격차가 크다는 걸 인권위에서도 인정한 것"이라면서 "지난해 2월 진정한 뒤 1년 7개월 넘어 많이 늦었지만 인권위에서 차별을 인정한 건 다행"이라고 밝혔다.

다만 백회선 금속노조 경북본부 교육국장은 "회사에서 인권위 권고대로 적극적 개선 조치를 하진 않을 거라고 보고 후속조치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회사를 상대로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형사처벌을 요구하고, 그동안 부당한 차별 때문에 받지 못한 임금청구소송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태그:#KEC, #인권위, #성차별, #여성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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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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