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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과 봉화에서 흘러온 냇물은 안동에서 몸을 섞어 서(西)안동, 풍산에 이르러 제법 몸집을 불리더니 강물의 티를 낸다. 큰물을 끼고 있는 풍산들은 물산이 풍부한 풍요의 땅이다. 여기에 오미마을, 가일마을, 하회마을, 소산마을, 하리마을이 들어섰다. 이번에는 이 중에 종택을 중심으로 고택들이 짜임새 있게 들어찬 오미와 가일, 하회마을을 둘러볼 참이다. 맨 먼저 들른 마을은 오미마을이다.
 
오미광복운동기념탑 언덕에서 내려다본 마을 전경이다. 몇 집 되지 않은 조그만 마을에서 24명의 독립운동가가 나왔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온 마을사람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오미마을 전경 오미광복운동기념탑 언덕에서 내려다본 마을 전경이다. 몇 집 되지 않은 조그만 마을에서 24명의 독립운동가가 나왔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온 마을사람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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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물이 자작한 가르마 논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마을 앞 다섯 그루 왕버들이 앞을 가린다. 저만치 섰을 때 마을이 쉬 드러나지 않더니만 바로 이 나무 때문이었다. 오미마을의 내력이 400년 묵은 이 꼬부랑 나무에 주렁주렁 달렸다 하니 알아봐야겠다.

풍산김씨 집성마을, 오미마을

오미마을의 실질적 입향조는 허백당 김양진(1467-1535)이다. 장암 김의정(1495-1547), 화남 김농(1534-1591)을 거쳐 유연당 김대현(1553-1602)에 이르러 대종가를 이뤘다.

이때부터 풍산김씨의 오미시대가 활짝 열렸다. 김대현은 아홉 형제를 두었다. 그중 여덟째 김술조는 17세에 낙동강에서 물놀이하다 요절하고 나머지 8형제는 모두 급제하여 집안을 빛냈다. 그 중 오형제인 봉조, 영조, 연조, 응조, 승조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아홉 그루 버드나무(구수나무)는 마을이 훤하게 들여다보여 허한 곳을 보하기 위해 심은 비보나무다. 400년 묵은 꼬부랑나무, 동네사람들은 추억거리 하나쯤 달고 있는 나무이겠다.
▲ 구시나무거리 아홉 그루 버드나무(구수나무)는 마을이 훤하게 들여다보여 허한 곳을 보하기 위해 심은 비보나무다. 400년 묵은 꼬부랑나무, 동네사람들은 추억거리 하나쯤 달고 있는 나무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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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에 왕버들 나무를 심은 이가 바로 김대현의 장자 김봉조다. 비보수(裨補樹)로 원래 아홉 그루를 심었다 하는데 묘하게 김술조가 요절하였듯 한그루는 일찍 고사하고 어느덧 다섯 그루만 남았다. 마을사람들은 이 거리를 구수나무거리라 불렀다. 국수가 국시가 된 이치인가, 오랜 세월 구전되면서 '수'는 '시'로 변하여 구시나무거리가 되었다.

오미 독립운동의 산실, 영감댁

마을 한가운데에 영감댁이 있다. 회화나무 세 그루가 자라고 있어 제법 유거(幽居)의 분위기가 나는 그윽한 집이다. 평대문을 보면 왜 이리 마음이 평안해지는지, 평대문이 가쁜 숨을 잡는다.

영감댁은 1759년 김상목이 처음 짓고 1826년 학남 김중우가 증축하였다. 3대에 걸쳐 지은 단단한 집이다. 집 꾸밈새는 잔재주를 부리지 않아 선이 굵고 시원시원하다. 모나지 않은 둥글넓적한 바위덩어리 덤벙주초와 앞마당에 턱하니 서 있는 몸집 좋은 굴뚝이 그렇다.
  
평대문에 회화나무 세 그루가 자라는 영감댁은 속세를 떠나 외딴 곳에 머물만한 거처(유거)로 어울릴만한 그윽한 집이다.
▲ 영감댁 정경  평대문에 회화나무 세 그루가 자라는 영감댁은 속세를 떠나 외딴 곳에 머물만한 거처(유거)로 어울릴만한 그윽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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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기와를 번갈아 두툼하게 쌓았다. 이집안 출신의 독립운동가의 심지를 세상에 드러내듯 앞마당에 보란 듯이 서있다.
▲ 영감댁 굴뚝 흙과 기와를 번갈아 두툼하게 쌓았다. 이집안 출신의 독립운동가의 심지를 세상에 드러내듯 앞마당에 보란 듯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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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에 달려있는 '학남유거(鶴南幽居)' 현판에 속세를 떠나 외딴곳에 살고자 한 학남의 뜻이 담겼다. 그러나 유거는 비겁하게 은둔하는 삶은 아니다. 이집 후손들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 몸 사리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와 과감히 몸을 던졌다.

경주최부자댁 최준을 사위로 둔 김정섭, 사회주의 이념을 갖고 항일투쟁한 김응섭(1878-1957), 1924년 일본궁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김지섭(1884-1928)은 이 집안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다.

김재봉(1891-1944) 생가, 학암고택

영감댁 옆집은 학암고택이다. 1800년대에 학암 김중휴(1797-1863)가 지었다. 집 앞에 뽀얀 돌비석이 빛난다. 김재봉의 친필 어록비로 "조선독립을 목적하고.."가 새겨져 있다. 김재봉은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여운형, 김규식, 홍범도, 김단야 등과 함께 참석하여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함"의 어록을 남겼다.
  
목적과 희망을 담은 김재봉의 친필어록 중에 목적만 적고 희망은 “..”으로 처리했다.
▲ 김재봉 어록비 목적과 희망을 담은 김재봉의 친필어록 중에 목적만 적고 희망은 “..”으로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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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봉은 애국계몽운동을 하다가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에 참가하고 1921년 사회주의 운동가로 전환하였다. 1925년 4월 경성부 황금정에 있는 중국집 아서원(雅敍園)에서 조선공산당창립대회를 주도하고 초대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12월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중문을 가운데 두고 사랑채와 안채가 양 옆으로 있고 안채 오른쪽에 곳간이 있는 독특한 구조다. 판벽과 판문, 휘어진 보의 나뭇결이 곱다.
▲ 학암고택 외벽 중문을 가운데 두고 사랑채와 안채가 양 옆으로 있고 안채 오른쪽에 곳간이 있는 독특한 구조다. 판벽과 판문, 휘어진 보의 나뭇결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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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조그만 띠살문 방과 토방 위의 아주 작은 굴뚝이 참 잘 어울린다. 집 떠난 집주인(고택은 현재 빈집으로 남아 있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이따금 들리는 객을 홀로 맞이하며 집주인 노릇하고 있다.
▲ 학암고택 굴뚝 아주 조그만 띠살문 방과 토방 위의 아주 작은 굴뚝이 참 잘 어울린다. 집 떠난 집주인(고택은 현재 빈집으로 남아 있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이따금 들리는 객을 홀로 맞이하며 집주인 노릇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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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은 중문을 사이에 두고 왼쪽은 사랑채, 오른쪽은 안채로 나뉘는 독특한 구조다. 사랑채 아궁이에 판문을 달아 놓은 점 또한 이채롭다. 사랑채와 안채, 곡간의 외벽은 판벽과 판문, 휘어진 보의 나뭇결이 살아 있어 하나의 커다란 예술품으로 보인다.

동쪽에 사랑채 한 채가 더 있다. 사랑채 대청에는 '죄인 김재봉'의 사진과 함께 활동내용이 나부낀다. 안채 토방에 키 작은 굴뚝이 집주인을 대신해 배웅하고 학암고택 동쪽 흙벽돌담 아래 이별초가 작별을 고한다. 담 따라 쭉 올라가면 학암고택과 영감댁 뒷골목길이다. 판담과 흙벽돌담의 황토색 색감이 향토적 서정을 안긴다.
이집의 또 다른 특징은 본 사랑채를 증축하지 않고 별도로 동쪽에 사랑채를 들였다는 점이다. 이 사랑채 대청에 김재봉의 사진과 활동내력을 담아 놓았다.
▲ 새 사랑채 대청  이집의 또 다른 특징은 본 사랑채를 증축하지 않고 별도로 동쪽에 사랑채를 들였다는 점이다. 이 사랑채 대청에 김재봉의 사진과 활동내력을 담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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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당(虛白堂) 닮은 수수한 허백당종택

학암고택과 영감댁 뒷길은 마을에서 제일 깊숙한 곳이다. 여기에 풍산김씨 종택인 허백당종택이 자리 잡았다. 1554년 유연당 김대현이 처음 지은 후 임란 때 소실되어 1600년에 장남 김봉조가 다시 지은 집이다. 허백당은 아쉽게도 문이 닫혀있어 까치발로 집안을 보았다.

빌 허에 빈 백, 허백당 김양진은 호처럼 살려했다. 재물에 욕심이 없고 평생 청렴하게 산 인물이다. 녹봉을 털어 백성을 구휼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후손 김봉조는 고조부 허백당의 뜻을 따랐는지, 허세부리지 않고 수수하게 집을 지었다.
  
내외담, 공갈담으로 불리며 집안 여성들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담이다. 헛담은 평대문과 함께 이 집의 얼굴이다. 곱고 수수한 마음씨가 읽힌다.
▲ 허백당종택 헛담 내외담, 공갈담으로 불리며 집안 여성들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담이다. 헛담은 평대문과 함께 이 집의 얼굴이다. 곱고 수수한 마음씨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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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의 얼굴은 기와와 흙을 곁들여 만든 구멍 난 헛담, 공갈담이다. 집안 여성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담이다. 헛담을 보고 옆에 있던 아내는 "굴뚝이 엄청나게 크네요"라 하기에 아니라는 말 대신 그냥 웃어 넘겼다. 아닌 게 아니라 영감댁 굴뚝을 보고 온 터라 담 넘어 까치발 들고 보았으니 그리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 삼벽당이 있다. 18세기 중엽 김상구(1743-1814)가 지은 집이다. 집은 비었지만 정갈하다. 책방 마루 밑 깊숙한 곳에서 시작한 길고 도톰한 가래굴 간이굴뚝은 배추벌레 닮았다. 금방이라도 마당으로 기어 나올 것만 같다. 삼벽당(三碧堂)은 김상구의 아들 김종한의 호다. 삼벽당 이름에서 짐작은 하겠지만 집주인은 멋을 아는 양반이겠다.
  
책방 마루 밑 깊숙한 곳에서 시작한 길고 도톰한 가래굴이 굴뚝 역할을 하는 간이굴뚝으로 내 눈에는 배추벌레처럼 보인다.
▲ 삼벽당 간이굴뚝  책방 마루 밑 깊숙한 곳에서 시작한 길고 도톰한 가래굴이 굴뚝 역할을 하는 간이굴뚝으로 내 눈에는 배추벌레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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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상징, 오미광복운동기념탑

삼벽당 뒤 마을 언덕에 오미광복운동기념탑이 있다. 마을로 뻗은 다섯 줄기 능선 중 세 번째 줄기 끝이어서 마을이 훤하게 내려다뵌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단식으로 순절한 김순흠(1840-1908)을 비롯하여 김응섭, 김지섭, 김재봉과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김만수(1894-1924) 등 24명의 오미마을 독립운동가를 기리고 있다. 사회주의계열이든, 민족주의계열이든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힘을 합쳐 들어 올린 횃불모양의 탑이다.
 
24명의 마을출신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횃불모양의 기념탑이다.
▲ 오미광복운동기념탑 24명의 마을출신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횃불모양의 기념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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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E.H. 카는 "사실이라는 것은 역사가가 불러줄 때만 말을 한다. 어떤 사실에게 발언권을 줄 것인가, 또 어떤 순서로 어떤 맥락에서 말하도록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역사가인 것이다"라 했다. 숱한 인물이나 사실이 역사가가 또는 우리가 불러줄 때까지 발언권을 얻지 못하고 봉인된 채 잠들어 있다.

김재봉은 조선독립을 위해 최전방에서 투쟁, 헌신했으나 사회주의계열이라는 이유로 서훈 대상에서 배제되고 2005년이 돼서야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아 발언권을 얻었다. 한 눈을 현재에 두고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역사학에 있어서 모든 죄악과 궤변의 원천이라 했던가.

과거의 사실, 상황을 고려치 않고 우리가 숨 쉬는 공기의 압박 때문에 봉인된 채 발언권을 얻지 못한 독립운동가들. 그들에게 발언권을 주고 불러줄 때 밀봉한 자리에 찍힌 낙인은 흐려지고 결국 봉인은 해제될 것이다.

태그:#오미마을(안동), #오미마을굴뚝, #영감댁(안동), #학암고택, #허백당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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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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