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 전 야구 대표팀 감독이 22일 오전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야구는 선동열' 에세이 출판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선동열 전 야구 대표팀 감독이 22일 오전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야구는 선동열' 에세이 출판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선동열 전 감독이 오랜만에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선 감독은 최근 자전적 에세이 <야구는 선동열-자신만의 공으로 승부하라>를 출간하며 출판기념회를 통하여 자신의 야구인생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선 감독은 지난해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우승 직후 병역혜택과 오지환-박해민의 발탁을 둘러싼 각종 논란에 시달리다가 자진사임한 이후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왔다.

선 감독은 한국야구 사상 최고의 투수로 꼽힌다. 통산 367경기에 평균 자책점 1.20, 다섯 차례 시즌 0점대 자책점 달성은 현대야구에서 영원히 깨지기 어려운 불멸의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지도자 인생은 현역 시절에 비하여 평탄하지 않았다. 처음 사령탑을 맡았던 삼성에서는 두 번이나 정상에 올랐으나 기존의 팀 스타일과 다른 불펜 중심의 재미 없는 야구와 레전드 홀대 논란 등으로 연고지 팬들로부터는 내내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2012년에는 현역 시절을 보낸 친정팀 기아 타이거즈 감독으로 금의환향했으나 3년 연속 가을야구 진출 실패라는 초라한 결과물을 남기며 재계약에도 불구하고 홈팬들의 반발로 자진 사임해야 했다. 마지막 명예회복을 꿈꿨던 야구대표팀에서마저 각종 구설수에 휩싸이며 불명예스럽게 물러났다.

국정감사, 그리고 선동열

선 감독을 지지하는 팬들은 어쩌면 지도자 길만 걷지 않았다면, 그가 지금까지도 존경받는 야구계 레전드로 남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사실 선 감독을 둘러싼 부정적인 이미지는 대부분 지도자 시절에 형성된 것이었다. 배영수에 대한 혹사, 양준혁-이종범 등 구단 레전드들의 강제 은퇴, 박찬호에 대한 팔 각도 조언, 이승엽의 국내 복귀 거부, 안치홍의 군입대 연기 강요설, 국가대표팀에서의 오지환-박해민 발탁 논란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이로 인하여 선 감독은 '레전드 킬러' '각동님'같은 별칭 등을 얻으며 선수나 팬들의 마음을 헤아릴줄 모르는 '냉정하고 권위적인 지도자'란 이미지로 굳어졌다. 

하지만 지난해 국정감사에서의 굴욕과 야구대표팀에서의 자진 사퇴 이후 오히려 선 감독을 바라보는 동정론이 늘어났다. 야구에 대하여 기본적인 이해가 없는 국회의원들의 무례하고도 황당한 질문 세례 속에 선 감독의 표정은 외롭고 초라해보였다. 평생 야구계 전설로서 쌓아온 명예가 무너지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선 감독에게는 화려한 선수시절 이미지 때문에 실패의 아픔을 모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하지만 선 감독은 출판기념회에서 자신이 걸어온 야구인생을 회고하며 "많은 사람들이 내가 성공만 해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1996~1999)에서 좌절을 맛봤다. 당시 2군도 아닌 3군에도 가봤다. 요즘 팬들은 그런 이야기를 잘 모르는 분들도 많지만 내가 좌절을 극복했던 경험을 힘들고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다"며 책을 출간한 이유를 밝혔다.

선 감독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암시했다. "인생에서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하는데 나에겐 선수가 첫 번째 찬스였고, 지도자가 두 번째였다. 앞으로 나머지 한 번의 찬스가 또 있을 거라 생각한다"며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야구인으로서의 활동을 재개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국민적 비난에 직면한 차범근, 그러나

선 감독처럼 현역 시절 명성을 떨치던 스타 출신이지만 지도자로서는 큰 좌절을 맛본 이들은 적지 않다. 야구에는 이만수 전 SK 감독, 김성한 전 기아 타이거즈 감독, 농구의 이충희 전 원주 동부(현 DB) 감독, 축구의 차범근-홍명보 전 국가대표팀 감독 등이 대표적이다. 단순히 지도자로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차원을 넘어, 현역 시절의 명성을 모두 깎아먹고 두고두고 오랜 시간 트라우마로 남을만한 타격을 입은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을 통하여 보란 듯이 좌절을 극복하고 재기에 성공하는 사례도 있다. 차범근과 이만수가 대표적이다. 차범근 전 감독은 널리 알려진 대로 1998년 프랑스월드컵 본선에서의 실패로 국민적 비난에 직면했다. 네덜란드전 5-0 참패 이후 월드컵 기간 중 경질되어 강제 조기 귀국당하는 굴욕에 이어 승부조작 발언 파문과 협회 비난을 이유로 대한축구협회로부터 5년 자격 정지라는 중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차범근의 축구인생을 통틀어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차범근 감독은 이후 월드컵 축구중계 해설위원을 맡으며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특히 본인이 대표팀 감독 시절 언론과 축구인들로부터 과도한 공격을 많이 받았던 아픔에도 불구하고, 해설위원으로 나서면서는 대표팀 후배 감독과 선수들의 편에 서서 다독이고 감싸안는 따뜻한 '대인배' 행보를 보여 재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이후 K리그 수원 삼성의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다수의 축구팬들에게 차범근은 지도자보다는 선수 시절과 해설위원 시절의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 

이만수 전 SK 감독은 프로야구 감독 시절에는 엄청난 악플과 인신공격에 시달려야했다. SK에서 감독과 수석코치로서 인연을 맺었던 김성근 감독과의 악연은 유명하다. 2011년 김성근 감독이 구단과의 불화 끝에 경질되고 이만수 감독이 지휘봉을 물려받으면서 안티팬들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일부 관객들이 경기중 그라운드에 난입해 이만수 감독에게 욕설을 퍼붓고 구단 기물을 파손하는 등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만수 감독은 3년간 SK를 이끌고 나름의 성과를 냈지만 우승에는 실패했고 내내 김성근 감독과의 비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야구인 이만수의 행보는 프로야구 감독직을 떠나면서 오히려 다시 빛났다. 야구 불모지인 라오스에 '재능 기부'를 통한 야구 전도사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만수 전 감독은 한국 스포츠 지도자로서 한국-라오스 국가 간 민간 외교와 라오스 야구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에는 라오스 총리 훈장을, 2018년에는 대통령 표창과 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다. 야구를 통하여 얻은 사랑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이만수 감독의 순수한 노력과 야구 열정에 많은 팬들이 박수를 보냈다.

허재 전 농구대표팀 감독은 특이하게도 '예능인'으로서 부활한 케이스다.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에 그친 후 친아들 형제 발탁을 둘러싼 논란과 성적부진 속에 불명예 사임했던 허 감독은, 올해 여름 축구예능 <뭉쳐야 산다> 출연 이후 가장 핫한 스타가 되어 방송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차범근이나 이만수 전 감독이 안티팬들의 비난 여론과 부정적인 이미지를 딛고 재평가받기까지 3~4년이상이 걸린 것과 비교할 때 불과 1년도 안되어 재기에 성공한 허재 감독은 대단히 운이 좋은 케이스이기도 하다.

현역 감독으로서의 무게를 벗자, 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모두 '현역 감독'으로서의 무게를 벗어나며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각종 스트레스와 비판을 달고 다니던 시절과 비교했을 때 얼굴색부터 달라졌다는 평가다. 한국스포츠가 배출한 슈퍼스타들을 아끼는 팬들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이들이 굳이 지도자로 현장에 돌아오기보다는, 이제 그냥 존경받는 레전드로 남기를 원하는 목소리도 많다.

박지성이나 박찬호의 사례처럼 화려한 현역 시절을 보낸 스타 출신이라고 해서 반드시 지도자가 되어야할 필요는 없다. 그것만이 자신의 분야에 공헌하는 유일한 방법도 아니다. 한편으로 한국 스포츠에 엄청난 족적을 남긴 레전드들이 지도자로 성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경험과 재능이 쉽게 묻혀지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누구나 명성만큼 오점이나 얼룩도 생길 수 있다. 그래도 레전드는 레전드다. 지도자로 겪었던 아픈 경험과 시행착오를 한국 스포츠 발전을 위해 자양분으로 삼는다면,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지도자 시절은 그들의 기나긴 인생에서 한 부분일뿐, 그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쌓아온 수많은 업적 자체를 폄하하는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때로는 혹독한 실패의 경험에 대하여 관대해질 필요가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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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허재 스타출신감독 와신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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