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에게> 포스터

<윤희에게> 포스터 ⓒ (주)리틀빅픽처스


부치지 못한 편지에는 아련함과 안타까움이 서려 있다.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상황에 편지를 쓰지만, 미처 그 편지를 붙이지 못할 사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화제를 모았던 영화 <윤희에게>는 평생 부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편지가 전해지면서 펼쳐지는 섬세하고도 여린 감성을 그려낸 영화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윤희(김희애 분) 앞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편지를 몰래 읽어본 딸 새봄(김소혜 분)은 그 편지가 바다 건너 일본에서 온 것임을 알게 된다. '윤희에게. 잘 지내니?'로 시작하는 편지는 윤희를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새봄은 윤희에게 편지를 본 사실을 숨긴 채 편지의 발신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조른다. 갑작스러운 딸의 부탁에 윤희는 당황한다.

남편과 이혼을 한 윤희는 한 번도 건조하고 차가운 일상을 벗어난 적 없다. 그런 그녀에게 일본여행은 특별한 용기를 내야만 하는 순간처럼 다가온다. 새봄과 함께 일본으로 떠난 윤희는 끝없이 눈으로 덮인 그 거리에서 옛 추억을 떠올린다. 마음에 품은 비밀스러운 첫사랑을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에 찬 윤희를 위해 새봄과 남자친구 경수(성유빈 분)는 특별한 순간을 준비한다.
   
 <윤희에게> 스틸컷

<윤희에게> 스틸컷 ⓒ (주)리틀빅픽처스


이 영화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눈과 같다 할 수 있다. 영화의 배경에서 강조될 뿐만 아니라 감정과 주제에 있어서도 눈을 연상시킨다. 작품 속 눈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눈처럼 새하얀 감정이다. 엄마의 첫사랑을 찾아가는 이 작품의 구성은 알맹이를 꽉 채운 드라마보다 인물의 감정이 주를 이룬다. 스토리를 통한 자극보다는 인물의 정서를 앞에 둔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이 새하얀 도화지를 배우들은 각자의 캐릭터가 지닌 감정으로 물들여간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캐릭터가 지닌 감정에 동화되며 스토리가 지닌 굴곡과 인물 사이의 갈등이 아닌 그들 내면의 목소리와 생각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는 눈처럼 맑고 깨끗한 이 영화의 감정을 한 방울의 얼룩도 없이 본연의 색으로 칠해나간 비결이라 할 수 있다.
 
 <윤희에게> 스틸컷

<윤희에게> 스틸컷 ⓒ (주)리틀빅픽처스


두 번째는 눈처럼 차가운 현실이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새봄은 아름다운 것만 찍는다고 말한다. 새봄이 찍은 사진에는 인물은 한 명도 없다.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 새봄에게 사람은 따뜻하고 정겨운 존재가 아닌 차갑고 낯설게 느껴진다. 이는 윤희 역시 마찬가지다. 말할 수 없는 과거를 지닌 윤희는 가족에게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는 현재까지 마음에 남아 그녀를 고독하게 만든다.

세 번째는 눈과 같은 추억이다. 시간이 흐르면 현재는 추억이 되고 감정은 추억 속에 남게 된다. 봄이 되면 눈이 녹아내리듯 그 어떤 아픔과 고통, 잊어야만 하는 감정도 추억 속에서 사라질 거라 여긴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다시 눈이 내리듯 추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윤희에게 온 편지의 발신인인 미스터리한 존재 준(나카무라 유코 분)의 등장 장면이 아버지의 장례식인 것은 이런 삶의 순환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계절로 표현하자면 봄이란 탄생부터 겨울이란 죽음까지다. 누군가의 죽음이 다른 누군가의 탄생이 되듯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다시 겨울이 온다. 윤희에게 20년 전 추억은 겨울마다 찾아오는 눈과 같다. 감정은 추억에 담겨 잊히지 않고 다시 다가온다. 시간의 흐름 속 감정은 눈처럼 녹아내리지만 겨울이면 다시 내리는 눈처럼 찾아온다. 추억은 그 자리에 머무는 주인이 아닌 다시 찾아오는 손님과 같다.
 
 <윤희에게> 스틸컷

<윤희에게> 스틸컷 ⓒ (주)리틀빅픽처스

 
<윤희에게>는 서늘하고 차가운 현실 속에서 첫사랑과 같이 순수하고 아련한 감정을 전해주는 깊은 울림이 있는 영화다. 윤희가 일본을 방문하면서 지난 추억에 잠겨 과거의 감정을 다시 떠올리는 지점과 편지의 주인공과의 사연은 서정적인 여운을 남긴다. 이런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는 비결은 새봄의 캐릭터에 있다. 잔잔하고 사건이 적은 영화의 전개는 자칫 늘어질 수 있는 약점이 있음에도 새봄이란 변속기어를 통해 적당한 속도감을 유지한다.

새봄과 경수 커플은 귀엽고 코믹한 모습을 보여주며 작품의 분위기가 지나친 서정으로 빠질 즈음 한 번씩 분위기를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김소혜는 10대 소녀의 당돌한 면모와 더불어 엄마를 지켜주고 싶어 하는 따뜻한 모습을 지닌 새봄 캐릭터를 사랑스럽게 소화해내며 배우로 한 걸음 더 성장한 면모를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추억으로 남았다 여기지만 여전히 생각만 하면 눈에 눈물이 고이고 가슴에 차가운 바람이 부는 눈과 같은 그때의 감정이 있다. 20년 전 미처 떠나보내지 못한 첫사랑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맑고 투명하게 윤희라는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며 사랑이 지닌 소중함을 말한다. 올 겨울 마음 한 구석에 담긴 사랑의 사진첩을 다시 꺼내보고 싶은 여운을 느끼고 싶은 관객들에게 <윤희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준모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브런치, 씨네리와인드에도 게재됩니다.
윤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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