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 <조커>의 일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요나>Jonah at Sea(1885-1895), 알버트 핀캠 라이더Albert Pinkham Ryder

<요나>Jonah at Sea(1885-1895), 알버트 핀캠 라이더Albert Pinkham Ryder ⓒ Albert Pinkham Ryder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시오. 그리하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여호와를 신으로 섬긴다는 이 남자의 말에 선원들은 무척 놀랐다. 그들은 이렇게 큰 폭풍을 일으키는 신이 두렵기도 했고, 그 신을 섬기는 사람을 바다에 던지면 혹여 재앙이 닥칠까 봐 두렵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성난 파도에 산 사람을 던질 수가 없어 최선을 다해 노를 저어 육지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그럴수록 풍랑은 더욱 거세졌다. 도대체 그는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하나님의 명을 피하려다 이런 폭풍을 만난 것임을 내가 잘 아오."

결국 성난 바다 한복판에 던져진 남자, 그는 이스라엘의 선지자 '요나'이다. 신은 그에게 '니느웨로 가서 이곳은 곧 멸망한다고 외치라' 명했다. 그는 왜 신의 명을 따르지 않고 애먼 배에 올라탔을까. 그는 왜 늦게라도 신의 명을 따르겠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바다는 바로 잠잠해졌을 텐데 말이다. 요나에게 있어서 성난 파도에 빠져 죽는 게 차라리 나은 도시 '니느웨'는 과연 어떤 도시일까. 혹시 DC코믹스의 간판 그래픽 노블 <배트맨>의 도시 고담 시와 비슷했을까. 
 
 무법천지의 도시 고담 시의 전경을 담은 <배트맨 비긴즈>(2005)의 포스터

무법천지의 도시 고담 시의 전경을 담은 <배트맨 비긴즈>(2005)의 포스터 ⓒ 워너브라더스

 
배트맨 이야기의 실사화는 1989년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을 시작으로, <배트맨 리턴즈>(1992),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 포에버>, <배트맨과 로빈>(1997년)을 거쳐,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과 만나 <배트맨 비긴즈>(2005), <다크 나이트>(2008),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로 흥행과 작품성 모두 꽃을 피운다.

지금까지는 고담 시를 악의 위협으로부터 지키는 영웅 배트맨의 악전고투를 다뤄왔는데, 이번에 특이하게도 악당 조커의 탄생을 그린 영화 <조커 Joker>가 개봉되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를 연출한 토드 필립스 감독이 무려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등 흥행과 작품성 모두 성과를 거두었으나, 악인에 대한 동정적 시각, 폭력시위 조장 가능성 등을 이유로 이 영화의 스탠스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조커>에서 거리 홍보를 하는 광대 아서 플랙(호아킨 피닉스)

<조커>에서 거리 홍보를 하는 광대 아서 플랙(호아킨 피닉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아픈 엄마를 모시고 낡은 아파트에서 하루하루 고된 삶을 이어 가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오늘도 광대 분장을 하고 어느 폐업 가게의 세일 광고를 하고 있다. 거리의 소년들이 그에게 다가가 피켓을 가로채고, 그들을 쫓던 아서는 골목에 숨어 있던 소년들에게 피켓으로 머리를 맞고 린치를 당한다.

소년들은 피켓이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결국 부술 거면서 왜 빼앗았을까? 사장은 아서에게 일하기 싫어 도망쳤으니 일당과 피켓 값을 변상하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아서가 당한 봉변을 뻔히 알면서도 사장은 왜 모른 척하는 것일까?

분노를 삭이고 있는 아서에게 동료 광대 랜들은 총을 건넨다. 정신병력을 가진 아서가 총을 소지할 수 없는 걸 뻔히 알면서 그는 왜 강매하는 것일까? 버스에서는 자기를 계속 쳐다보는 앞 좌석의 아이를 웃게 해 주었는데, 왜 아이의 엄마는 알지도 못하면서 버럭 화를 내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서에게 함부로 대하는가?

고담 시 빈민에게 내려진 주문, "Put on a happy face."
 
 토크쇼 출연자 대기실 거울에 "얼굴에 '행복한 표정'을 걸치라"라고 낙서하는 아서 플랙

토크쇼 출연자 대기실 거울에 "얼굴에 '행복한 표정'을 걸치라"라고 낙서하는 아서 플랙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직업 광대인 아서 플렉은 실제로도 '조커'이다. 카드 한 팩에 들어 있지만, 스페이드(권력자), 다이아몬드(상인), 하트(성직자), 클로버(농민) 등 4개의 슈트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조커. 사회에 존재하지만,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존재. 유일한 가족인 엄마 페니 플렉 역시 그에게 관심이 없다.

페니 플렉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이 일했던 웨인 가문의 주인 토마스 웨인에게 편지를 쓰고 답장 기다리는 것. 답장을 받은 적 없는 페니 플렉 역시 철저히 격리된 존재이다. 그들이 사는 고담 시 역시 빈부격차가 심하고 방화와 폭발이 빈번하며 쓰레기가 넘쳐나는, 주정부로부터 외면받고 공권력으로부터 격리된 슬럼 도시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하는 무법천지 고담 시의 빈민들에게는 대략 네 개의 선택지가 있다. 힘이 있다면 악당이 되거나 비질란테(자경단)가 되고, 힘이 없다면 운 좋게 살아남거나 죽거나다. 무력한 어린 생존자는 성인이 되면 악당이 되거나 비질란테가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아서를 괴롭히고 폭행한 거리의 소년들 역시 무력한 생존자 광대를 정확히 알아본다. 아서가 소인증 환자인 게리를 살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던가. "나에게 잘 해 준 사람은 너뿐이었어." 게리가 아서에게 잘 해 준 이유는 게리가 고담 시 슬럼 피라미드의 최하위에 위치해서가 아니었을까. 게리에게 주어진 잔인한 주문, "무조건 미소를 걸쳐"의 충실한 이행 아니었을까.
 
 <조커>에서 아서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 소피와의 데이트 장면. 따듯한 미소와 눈 맞춤은 현실인가 망상인가.

<조커>에서 아서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 소피와의 데이트 장면. 따듯한 미소와 눈 맞춤은 현실인가 망상인가.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다시 고대 이스라엘 선지자 요나에게 돌아가 보자. 바다에 빠진 요나는 신이 예비한 큰 물고기에 의해 삼켜진다. 물고기 배 속에서 기도하며 3일을 버티다가 신의 명을 이행해야 함을 받아들이고 뭍으로 토해진다. 그러고도 머뭇거리자 신의 명이 재차 내려진다. 요나는 도대체 왜 니느웨로 가려 하지 않는가.

니느웨는 당시 근동 지방을 지배한 아시리아 제국의 주요 도시였다. 아시리아가 주변국들을 점령하며 자행한 약탈의 만행은 잔인하기 그지없었으며, 이스라엘 역시 아시리아에 짓밟혀 겨우 유다왕국의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였으니, 이스라엘의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에 적개심을 갖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신의 주문은 "니느웨는 그 악행으로 인해 곧 멸망한다"라는 전언이었다. 요나 역시 니느웨는 멸망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저 전하기만 하면 될 뿐인데, 도대체 왜 안 가려는 것일까?

니느웨는 성을 관통하는 데 3일이 걸리는 큰 도시였다. 요나는 3일 동안 성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라고 외쳐야 했는데, 실제로는 하루만 외쳤다. 그것도 크게 외치지도 않았다. 니느웨 사람들이 멸망에 대비하는 것조차 싫었을까. 곧 비밀이 풀린다. 괴이하게도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들릴까 말까한 목소리를 기가 막히게 알아듣고 회개하기 시작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성읍 주민들의 이런 회개 소식을 듣자 니느웨 성주까지 나서 사람이나 짐승 모두에게 금식령을 내리며 회개를 촉구하며 니느웨 성의 멸망을 막고자 최선을 다한다. 패악한 성 니느웨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왜일까. 아마도 먼 옛날 소돔과 고모라 성의 몰락을 구전으로 들어 알았을 수도 있고, 그 즈음 발생했던 일식과 천재지변 등을 심판의 징후로 이미 이해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결국 성 주민들의 큰 변화에 신은 마음을 바꾸어 재앙을 거둔다. 

높은 곳에 앉아 니느웨 성의 멸망을 기다리는 요나

결국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을 면할까 봐, 그리고 더 강성해져서 이스라엘을 더 압제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두려움이 현실이 되자, 요나는 신에게 분노한다. 은혜롭고 오래 참으며 인자하시다며 비아냥대면서,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고 성을 낸다. 다음 날 요나는 성 동편에 초막을 짓고 성이 언제 망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신이 예비해 두었던 박 넝쿨이 제공하는 그늘 아래서 말이다. 다음날 신은 박 넝쿨을 사라지게 하고, 내리쬐는 해로 고통을 받던 요나는 박 넝쿨을 없앤 신을 원망하며 죽기를 자처한다. 이에 신의 마지막 말이 이어진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나서 4장 11절)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는 신발의 오른쪽과 왼쪽을 구별 못하는 자, 곧 어린아이를 뜻한다. 악행의 도시 니느웨에는 죄 없는 어린아이가 십이만여 명이나 있고 인간이 돌봐야 할 가축도 많이 살고 있었다. 악한 도시를 살고 있는 죄 없는 어린 생존자들과 무력한 생존자들인 가축마저 아끼는 신의 마음을 요나는 끝까지 거부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택받은 민족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며, 이민족의 하나님은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이스라엘을 괴롭힌 아시리아를 멸절해야 우리 하나님이며, 아시리아를 멸하지 않으면 우리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나가 평범한 신도라면 모를까, 신의 선지자라면 달라야 하지 않는가.

지금 여기, 한국 땅에 요나의 환생 징후가 보인다. 그들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광장 한복판에 진을 치고 '나만의 하나님,' '우리만의 하나님'을 외치고 있다. 만물의 조물주라고 일컬으면서도, 만물이 아닌 자기들의 요구와 기도만 선택적으로 들어줄 것이라고 확신에 차 있다. 당시 멸망을 피한 니느웨는 악행을 반복하다 결국 바벨론 연합군에 함락당한 후 재해로 땅속 깊이 가라앉았다가 고고학자 레이어드 박사의 7년간 발굴로 1853년 모습을 드러냈다.

신의 섭리는 철저히 신에게 달려있다. 창조주에게 피조물은 똑같이 소중해서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 삼은 것이지, 이스라엘이 뛰어나서 벼슬을 달아 준 것이 아니다. 제사장과 선지자는 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 아니었던가. 약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가라는데, 가라는 곳엔 안 가고 왜 애먼 곳에 가서 엉뚱한 소리를 하며 공동체에 풍랑을 일으키는가. 요나들이여, 당신들이 기도할 때 신의 응답이 있었는지 잘 생각해 보라. 어색한 진공 상태를 경험했다면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그러나 응답이 있었다고 우긴다면 갈 길이 멀다.

요나서는 특이하게도 결말이 없어 요나가 신앙을 회복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신을 향한 독점욕은 그렇게 역사가 길다. 무려 선지자도 빠지는 '요나 딜레마'가 언제 덮칠지 모르니 신실한 신도들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덫에 사로잡혀 있는 그 순간에 이 땅의 아서를 조커로 전환시키는 마지막 한 방울이 떨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도서출판 참서림의 블로그에도 실려 있습니다.
조커 호아킨 피닉스 요나 니느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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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영화를 봐도 성경이 떠오르는 노잼 편집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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