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진(IBK기업은행)... 2019-2020시즌 V리그 경기 모습 (2019.11.3)

김희진(IBK기업은행)... 2019-2020시즌 V리그 경기 모습 (2019.11.3) ⓒ 박진철 기자

 
여자배구 대표팀 선수들의 '포지션 변경'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배구팬들은 10일 열린 2019-2020시즌 V리그 여자배구 IBK기업은행-흥국생명 경기 직후 김우재 IBK기업은행 감독을 향해 날선 비판을 쏟아냈다. 이유는 김 감독이 국가대표팀 핵심 선수인 김희진(IBK기업은행)의 포지션을 변경해 출전시켰기 때문이다.

김희진은 이날 경기에서 올해 처음으로 라이트가 아닌 센터 포지션으로 출전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팀은 세트 스코어 0-3으로 완패를 했고, 경기력 또한 좋지 않았다. 핵심 원인은 김희진의 포지션 변경이었다. 주 공격수 역할을 해야 할 김희진은 이날 경기에서 단 1득점에 그치고 말았다. 불과 한 달여 전인 2019 월드컵 대회에서 세계 강팀들을 상대로 20점대를 거뜬히 기록하며 펄펄 날던 모습과 너무도 달랐다.

IBK기업은행 배구단은 지난 4월 V리그 3회 우승을 일궈낸 이정철 감독을 퇴임시키고, 후임으로 김우재 감독을 선임하며 보도자료를 통해 "선수들이 신바람나게 배구를 하고 팬들에게 행복과 감동을 주는 배구단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안타깝게도 현재 IBK기업은행은 '신바람 배구'와 멀어져 있다. 11일 현재 V리그 여자배구 6개 구단 중 최하위다. 최근 5연패도 팀 역사상 최초 기록이다.

'신바람 배구' 천명한 IBK기업은행, 그러나

김희진은 올해 국제대회에서 대표팀의 주전 라이트로 맹활약하며, 지난해보다 가장 크게 기량이 발전한 선수로 평가받았다. 대표팀에서 '라이트 공격수다운 라이트'로 거듭났고, 그의 모습에 배구계과 팬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지난달 20일 2019-2020시즌 V리그 IBK기업은행의 개막전인 KGC인삼공사와 경기에서도 라이트 공격수로서 팀 내 최다 득점(23득점)과 트리플 크라운(후위공격·블로킹·서브 각각 3득점 이상)까지 달성하며 승리를 주도했다. 그런 김희진이 최근 급격한 부진에 빠졌다. 급기야 10일 흥국생명전에서는 감독의 요구로 라이트에서 센터로 포지션까지 변경해서 출전했다.

김희진은 '소속팀에서는 센터, 대표팀에서는 라이트'로 포지션 변경에 대해 수차례 어려움을 호소한 바 있다. 지난 8월 25일 아시아선수권 중국전 승리 직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제대로 된 라이트로 거듭나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그것이 본인이나 대표팀의 미래를 위해서도 옳은 방향이기 때문이었다(관련 기사 : 여자배구 대표팀 감독-선수들, "예전 한국배구로 회귀 안돼").

그런 목표 의식과 치열한 노력 끝에 김희진은 2019 월드컵 대회에서 세계 강호들을 상대로 진정한 라이트 공격수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런데 소속팀에 돌아와서 V리그 개막 이후 불과 6경기 만에 또 다시 감독의 요구에 의해 센터로 포지션 변경을 했다. 올해 1년 동안 쌓아 올린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위기에 빠진 것이다. 

김희진 포지션 변경... 자신감 저하, 결과도 참담
 
 대표팀 시절 '행복 배구'... 표승주(18번)-김희진(4번) 선수

대표팀 시절 '행복 배구'... 표승주(18번)-김희진(4번) 선수 ⓒ 박진철 기자

 
배구팬들은 지난 9일 한국도로공사가 핵심 선수인 박정아(레프트)를 센터로 포지션 변경하자 불만을 표출했다. 그러다 10일 김희진의 포지션 변경까지 이어지자 폭발했다. 특히 김우재 감독의 10일 경기 후 인터뷰 내용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IBK기업은행 감독으로 오기 전부터 김희진이 팀을 위해서 센터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희진이 대표팀에서 라이트를 워낙 잘했다. 처음 생각과 달라지게 됐다. 김희진과 대화를 해봤다. 본인이 라이트에서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김희진을 라이트로 세웠다. 거기서부터 실타래가 꼬인 것 같다. 김희진을 센터로 기용하면 양쪽에서 꾸준히 연습한 친구들과 시너지 효과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수들이 의욕적으로 하지 않는 것도 모두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김 감독은 그러면서 김희진을 계속 센터로 기용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에 팬들은 즉각 비판하고 나섰다. 관련 기사 등에 김 감독을 향한 항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팬들은 "대표팀에서 1년을 공들여 제대로 된 라이트로 성장시켜 놨더니 소속팀에서 한순간에 망가뜨렸다", "팀이 사상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감독은 모든 책임을 한 선수에게만 전가하고 있다", "여자배구 대표팀이 도쿄 올림픽 출전권 획득에 실패하면 국내 감독 탓"이라며 쓴소리를 쏟아냈다.  

감독의 선수 탓?... 불난 집에 기름 붓다
      
감독들이 선수 포지션을 변경하는 건 팀 상황에 맞게 선수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또한 부상 등으로 공백이 생길 경우 이를 타개할 방안으로 포지션 변경을 통해 주전 선수를 재구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희진과 박정아의 경우는 정반대로 흘러 갔다. 팀은 더 무기력해졌고 수렁에 빠진 인상을 주었다.

포지션 변경 전략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최근 세계 배구의 흐름과도 거리가 멀다. 팀의 핵심 선수일 경우 포지션 변경은 신중을 기해야 할 사안이다. 자칫 이도 저도 아닌 선수로 전락시키는 치명적인 실험이 될 수도 있다. 선수, 소속팀, 대표팀 모두에게 손상을 줄 위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핵심 선수의 포지션 변경을 단행했을 때는 수긍할 만한 결과가 반드시 나와야 한다.

핵심 선수마저 믿지 못하고 포지션 변경을 요구하는 것은 선수의 자존감과 사기를 떨어뜨리고, 슬럼프에 빠뜨릴 위험도 있다. 이는 팀 전체의 조직력과 단결력까지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김우재 감독은 비시즌 동안 '백목화 리베로' 카드를 준비했다. 결과적으로 패착이 됐다. 수비의 핵심인 리베로가 서브 리시브와 디그에서 크게 흔들리면서 상대 팀의 집중적인 목적타를 받는 상황이 돼버렸다. 팀 조직력이 무너지고 연패에 빠진 첫 번째 요소이다. 여기서부터 먼저 실타래가 꼬인 것이다. 결국 김 감독은 지난 3일 현대건설전부터 백목화 카드를 스스로 철회하고, 주전 리베로를 교체했다. 

김희진의 부진은 좀 더 들어가면, 세터와 부조화 영향도 크다. IBK기업은행의 세터진은 다른 팀과 비교해서 라이트와 센터 속공 토스에 약점이 있다. 김희진과 김수지라는 대표팀 주전 라이트와 주전 센터를 가지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수지라는 정통 센터도 활용하지 못하는 판국에 라이트 김희진을 센터로 바꿔서 효과를 보겠다는 전술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시즌 동안 세터들을 라이트와 센터를 많이 활용할 수 있도록 먼저 만들어 놨어야 했다. 김희진이 대표팀에서 라이트로 맹활약하는 걸 보면서도 김수지와 짝을 이룰 센터를 집중 육성하거나 보강해 놓지 않은 것도 문제다.

쏟아지는 비난 여론에 대해 IBK기업은행 핵심 관계자는 11일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사실 작년에도 김희진 선수가 센터로 뛴 경험이 있어서 감독님도 변화를 주기 위해 선택하신 것 같다"며 "다만 올해는 김희진 선수가 대표팀에서 라이트를 워낙 잘했고, 올림픽 예선이라는 중요한 대회도 앞두고 있어 우려와 비판 시각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표승수 선수도 부상을 당하면서 안 좋은 일이 겹쳐서 나타났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포지션 변경, '만병통치약' 아니다... 믿어주는 것도 역량

소위 '대표팀 차출 탓'도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상당수 감독들이 '소속팀 선수들이 대표팀에 오래 활동해서 손발을 맞출 시간이 부족했다'고 항변했다.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현재 V리그에서 가장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선수들은 대부분 올해 마지막 국제대회인 2019 월드컵까지 뛴 선수들이다. 소속팀에서 손발을 맞춘 기간이 가장 짧았던 선수들이 펄펄 날고 있다.

반면, V리그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며 8월 아시아선수권과 9월 월드컵에서 미리 빠졌던 대표팀 선수 중 상당수가 오히려 부진을 겪고 있다. 일부 전문가는 "올해는 차라리 대표팀에서 끝까지 있어야 했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어려울수록 정도를 가라는 말이 있다. 포지션 변경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포지션 변경을 하면, 그 자리와 시스템에 적응하는 데 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사용하는 근육도 다르고 빨리 적응하려다 부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가장 큰 우려는 이도 저도 아닌 선수로 퇴보할 가능성이다. 그럴 시간에 믿어주고 더 잘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상책일 수 있다. 

리그 개막 전에 기존 선수들과 손발을 맞춘 기간이 고작 10일밖에 안된 고교생 신인을 주전급 선수로 활용하고 있는 팀이 있다. 반면, 매년 1~2순위 유망주를 선발해가고도 자신의 힘으로 주전급 선수를 단 한 명도 키워내지 못한 팀도 있다. 

선수는 감독을 잘 만나야 하고, 감독은 선수의 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누구나 아는 기본 상식이다. 그러나 잘 안 풀리는 팀일수록 기본을 망각하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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