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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완서의 타계 일주년 기념작으로 2012년 1월 소설 <부처님 근처>가 재출간됐다. 작가활동 초기인 73년 발표된 작품인데 이념전쟁의 와중에 오빠가 공산당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실제 경험을 그리고 있다. 좌익에 가담했다가 전향했다는 이유로 양 진영에서 반동, 빨갱이 소리를 들어야 했던 박완서의 오빠. 그는 집 마당에서 '동무'들과 말다툼 끝에 총을 여러 방 맞고 쓰러진다. 작가는 어머니와 함께 오빠의 시신을 처리해야 했다. 
"그들은 갔다. 우리 식구는, 나는 얼마나 소름 끼치게 참혹하고 추악한 죽음을 목도하고 처리해야 했던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산산이 망가진 상체의 살점과 뇌수와 응고된 선혈을 주워 모으며 우리 식구는 모질게도 악 한마디 안 썼다. 그런 죽음, 반동으로서의 죽음은 당시의 상황으론 극히 떳떳지 못한 욕된 죽음이었으니 곡을 하고 아우성을 칠 계제가 못됐다." 
- <부처님 근처> 중에서
그 뒤에 아버지가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빨갱이라면 이를 갈아도 시원찮을 그가 오히려 숨어있던 친구의 자제를 공산당에 밀고까지 했다. 세상이 다시 바뀌고 나서 원한을 품은 사람들의 고발로 아버지는 잡혀갔다.
"1.4 후퇴를 며칠 안 남기고 용케도 풀려 나온 아버지는 전신이 매 맞은 자국과 동상으로 푸룻푸룻 짓무르고 해지고 퉁퉁 부은 채 썩은 냄새를 심하게 풍기는 송장이었다."
- <부처님 근처> 중에서
박완서는 나이 스무 살에 지켜본 오빠와 아버지의 죽음이 뇌리에 상흔으로 남아 평생 고통을 겪었다. 그들은 각기 북과 남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작가가 칠십이 넘은 나이에 한 케이블 TV와 인터뷰 했는데 필자는 우연히 그 방송을 보게 됐다. 그는 이때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통일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될 이념 갈등의 소용돌이가 두렵다는 것이다. 자기 생전에 그런 일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고 했다. 듣는 이의 마음을 서늘하게 하는 말이다. 

최근 박완서가 살아있다면 트라우마를 다시 겪었을 법한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 8월부터 대한민국은 두 쪽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수백만 명"이 모이는 정치 집회가 광화문과 서초동에서 여러 차례 열린 것이다.  

진보 시대의 분기점 '무상급식 논쟁' 
 
오세훈 서울시장이 서울시청 기자실에서 긴급회견을 열어 오는 24일 실시되는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시장직을 걸겠다고 밝힌 뒤 무릎을 꿇고 있다. 2011.8.21
 오세훈 서울시장이 서울시청 기자실에서 긴급회견을 열어 오는 24일 실시되는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시장직을 걸겠다고 밝힌 뒤 무릎을 꿇고 있다. 2011.8.21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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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정치 상황을 이해하려면 2010년을 주목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좌우의 분기점을 맞은 해이다. 이 당시 무상급식은 사실 무리한 요구였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동의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성장일변도로 가면서 분배에 소홀했는데 이때 불만을 틀어막은 논리가 이것이었다.

'파이를 키운 다음에 나눠먹자.'

그러면서 암묵적인 목표로 1인당 GNP 2만 달러를 제시했다. 그러나 2만 달러가 넘은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개선이 안 되자 불만이 점증했다.  

당시 경기도 교육감 선거에서 학생들 점심을 국가가 책임지라는 요구가 나왔다. 보수 집권당이 이에 반대하자 억눌린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 집권당인 한나라당은 각종 선거에서 연전연패하고 당소속 서울시장도 물러났다. 민심을 건드린 것이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은 당명과 당색깔을 바꾸었다. 당강령 1조에 있는 보수 항목을 삭제하자는 논의까지 했으니 얼마나 다급했는지 짐작이 된다. 당시 박근혜 후보의 선거공약집을 보면 민주노동당 공약집인지 헛갈릴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해서 집권한 뒤 1년 동안 눈치를 보더니 둘째 해부터 본격적으로 공약집과 반대의 길로 나갔다. 이 때에 박근혜 정부는 사실상 정치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전두환을 이어 대통령이 된 노태우는 보수였지만 그의 집권기는 87년체제가 시작되는 진보 시대였다. 박근혜와 같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노태우의 선택은 달랐다. 그는 자기 정체성과 달리 '물태우'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남북기본합의서와 7.7 선언 등 진보정책을 폈다.

노무현은 노태우와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었지만 내용상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가 남긴 책 <진보의 미래>에서 자신은 "보수시대의 진보 대통령"이라며 괴로워했다. 지지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미FTA를 추진한 것은 이런 이유였다. 노태우와 노무현은 자신의 정체성보다 시대의 요구에 따랐다. 박근혜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기서 잠시 시대와 권력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좌파의 시대가 있고 우파의 시대가 있다. 국민 다수가 왼쪽으로 가자고 하면 좌파의 시대이고 오른 쪽으로 가자고 하면 우파의 시대다.

국운이 상승하는 나라는 좌의 시대에 좌파 정부가, 우의 시대에 우파 정부가 들어선다. 이처럼 좌파와 우파가 나선형으로 순환하면서 진전할 때 사회가 발전한다. 나사못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비틀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그런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실정치가 반드시 선순환하는 것은 아니다. 운이 좋게도 문재인 정부는 왼쪽으로 마음껏 나갈 수 있는 조건에 놓여있었다. 두 명의 대통령 구속이 말해주듯 보수 정부의 실패로 인한 반사 이익 때문이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배를 왼쪽으로 끌어당겨 중심을 잡아야 했다. 진보 시대에 들어선 진보 정부이므로 이제 나라가 편해질 것 같이 보였다.
 
'문재인 하야 범국민 투쟁본부'가 10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문재인 하야 범국민 2차 투쟁대회'를 열고 있다.
 "문재인 하야 범국민 투쟁본부"가 10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문재인 하야 범국민 2차 투쟁대회"를 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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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2일 서울 서초역 부근에서 검찰개혁사법개혁적폐청산 범국민연대 주최로 '제9차 사법적폐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10월 12일 서울 서초역 부근에서 검찰개혁사법개혁적폐청산 범국민연대 주최로 "제9차 사법적폐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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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가 극우 세력이 돼 '친박'을 중심으로 강고하게 버티자 문 정부는 시대 과제인 검찰개혁을 밀어붙이려고 강공책인 조국 카드를 꺼내들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필자는 조국 사태로 극심하게 양쪽이 대립하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보수와 협치능력 부족을 꼽는다. 좌우통합기구의 활동 종료가 그 증거다.

국민통합기구, 문 정부 들어 활동 종료

이명박 정부의 사회통합위원회에 이은 박근혜 정부의 국민대통합위원회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활동을 종료했다. 두 위원회는 이념갈등, 지역갈등, 세대갈등 등 우리사회의 통합을 저해하는 분열 원인을 연구하고 해결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대통령 직속 기구로 설립됐다. 그러나 9년간의 활동 결산도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소기의 성과를 완수해서 더는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인가. 그런 의견은 찾기 어렵다. 문 정부 초기부터 태극기부대가 등장해 정치·사회 갈등을 격화시키고 있었다. 지역과 이념 갈등에 이어 다른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남녀 갈등이 나타났다.

그런데 보수 정부에서도 유지됐던 사회통합기구를 폐지했다. 이 점은 문 정부의 명백한 실책이다. '조국 사태'는 이런 국면에서 발생했다.

박완서의 사례가 보여주듯 이념 갈등은 우리 사회 내부를 약화 시킨다. 지난해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열었지만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선진국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없다. 하드웨어만 성장하고 소프트웨어가 갖춰지지 않으면 덩치 큰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앞으로 5회에 걸쳐 한국 사회 이념 갈등의 원인과 해법을 모색해본다.

태그:#이념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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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간에이념연구소’ 대표. '부동산보유세강화시민행동' 집행위원. 80년대 도서출판 오월 발행인을 거쳐 90년대 프랑스동포신문 오니바를 펴냈습니다. 2000년대 재외동포신문 편집국장과 세계로신문 대표, 재외국민참정권연대 사무국장으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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