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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어디서든 홍시를 볼 수 있다. 홍시를 볼 때마다 난 아버지가 생각난다. 그날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조금 쌀쌀했음에도 달빛과 별빛 그리고 집 앞에 있던 동네 으슥한 곳을 비추는 보안등 불빛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아마 그 나이 때 찾아온 겉멋이었지 싶다.

아무튼 달빛과 별빛 그리고 보안등이 빚어 내는 나만의 낭만을 즐기고 있던 그때 언덕을 오르는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언덕을 오르고 계셨다. 난 나만의 멋들어진 낭만이 꽤 익숙한 삶의 모습으로 깨져버리는 것에 화가 났다.

어느새 올라온 아버지는 장독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를 보더니 손에 든 검은 봉지를 쑥 내밀었다.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밥은 먹었느냐니, 추운 데 뭐하느냐니 뭐 이런 일상적인 말씀도 없으셨다. 그저 검은 봉지만 내미셨다. 
 
아버지가 막내아들 생일 선물로 홍시를 사 오신 것이었지만 난 그게 더 화가 났다.
 아버지가 막내아들 생일 선물로 홍시를 사 오신 것이었지만 난 그게 더 화가 났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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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났지만, 아니 반복되는 아버지의 모습에 짜증이 났지만 난 검은 봉지를 받아 들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 안에는 홍시가 들어있었다. 그것도 몇 개는 터져버린 상태였다. 홍시가 든 검은 봉지를 주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신경질적으로 따라가며 엄마에게 그 검은 봉지를 인계했다.

엄마는 "뭐니?" 하고 물었고 난 "아버지가 갖고 온 거야" 했다. 엄마는 "웬일이래, 뭔 데?" 하며 검은 봉지를 열었고 홍시인 걸 확인했다. 그리고 그중에 몇 개는 터져버린 것을 꺼내며 남편의 칠칠치 못함을 탓하셨다.

나는 내 방에서 깨져버린 낭만에, 반복되는 아버지의 음주에 씩씩대다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공부 아니, 살아야 하는 내 처지가 한탄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때 엄마가 쟁반에 깨끗이 씻은 예쁜 홍시를 갖고 들어오셨다.

"아버지가 너 먹으라고 사 오셨구먼. 너 생일이라고." 
"뭐 내 생일이라고?" 
"그래, 엄마도 정신없어 니 생일인지도 몰랐는데 아버지가 막내아들 생일이라고 사 오셨구먼." 

정말 난 내 생일인지 몰랐다. 변명을 하자면 내 기억에는 내 생일날 특별한 이벤트(?) 같은 것을 한 적이 없었고 아침에 미역국 먹는 것이 전부였다. 그 당시 우리 가족은 내 생일뿐만 아니라 모두 먹고사는 것에 바빠 가족 생일을 챙기지 못했다. 그러니 내 생일을 잊어버린 것도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막내아들 생일 선물로 홍시를 사 오신 것이었지만 난 그게 더 화가 났다. 다른 아이들처럼 돈을 주거나 멋진 선물은 아니더라도 검은 봉지에 든 홍시 그것도 터져 버린 홍시는 아니었다. 나를 무시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장난한 것 같았다. 난 "안 먹어!" 하고 안방에 계신 아버지에게 들리도록 소리쳤다.    

이제 나도 예전의 아버지처럼 나이를 먹었다. 또 그때의 나보다 더 큰 아들과 딸이 있다. 그리고 예전 아버지처럼은 아니지만 취하도록 술을 마시곤 한다. 그리고 자연스레 아버지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자식의 생일을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홍시를 사고, 또 그것을 무사히 갖고 오기 위해 어떻게 하셨을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삶이 힘들어서 술을 마실 때면 아버지 역시 이러셨겠구나 싶다. 그것도 모르고 또 술 마셨다고 싫어했던 내가 너무 부끄럽다. 또 나 밖에 몰라 버릇없이 아버지를 탓하고 나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던 나 자신이 너무 창피하다. 그것이 삶의 무게와 자식 사랑이었음을 알게 된 후에도 난 아버지에게 사과하지 못했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고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죄스러움은 여전히 내 가슴속 멍에로 자리 잡고 있다. 가을 끝자락 단풍이 떨어지고 홍시가 나오면 난 아버지가 그립고 그립다. 

태그:#아버지 사랑, #홍시,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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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소재 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교사입니다. 또 학교에 근무하며 생각하고 느낀 바를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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