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영화 <시빌> 포스터

영화 <시빌> 포스터 ⓒ 영화특별시SMC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때때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에 뛰어들게 될 때가 있다. 자신이 아니면 그 일이 해결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이성을 차리고 뒤돌아 생각해보면 자신에게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인데 타인의 삶에 깊게 관여하게 되는 때 말이다. 특히, 그 대상이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에 그런 경험들을 하게 될 때가 많다. 동일한 경험이나 유사한 상황의 이해에서부터 시작되는 연민 혹은 유대감이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이러한 일들이 선명한 감정 상태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동안 잊고 지내온 기억 혹은 완전히 지워냈다고 생각했던 경험의 잔여물이 자신도 모르게 발단이 되어 그 장면을 끌어당기게 되면, 이미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는 쉽게 발을 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기도 한다.
 
 영화 <시빌> 스틸 컷

영화 <시빌> 스틸 컷 ⓒ 영화특별시SMC


02.

시빌(버지니아 에피라 분)은 심리치료사다. 환자들이 어려움을 겪는 지점의 이야기들을 직접 들어주고 소통하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7년이 넘게 상담을 진행해 온 환자도 있는 걸 보면 꽤 오랫동안 이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온 것처럼 보인다.

어느 날, 그런 그녀가 치료사의 직분에서 벗어나 소설을 쓰겠다고 선언한다. 전업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 진행 중인 환자들과의 관계를 모두 정리해야 하기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심리 치료 분야에 있어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생각보다 훨씬 더 내밀한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의 만류에도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어려운 기존 환자들과의 관계 정리가 끝날 때쯤 마고(아델 엑사르코풀로스 분)가 그녀를 찾아온다. 함께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유명 배우 이고르(가스파르 울리엘 분)의 아이를 갖게 되었지만, 그는 영화의 감독인 미카(산드라 휠러 분)와 연인 사이이기에 복잡한 관계와 배우로서의 커리어 사이에서 갈피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리치료사로서의 일을 모두 내려놓은 시빌은 그녀의 도움을 처음에는 모른 척 하지만, 그녀를 보며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하는 가브리엘(니엘스 슈나이더 분)로 인해 그 처지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심리치료사와 작가 사이의 모호한 경계. 시빌은 그 위에서 마고의 삶에 조금씩 개입하기 시작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자신의 소설로 데려와 글로 쓰기 시작한다.

03.

저스틴 트리엣 감독의 세 번째 장편 극영화 <시빌>은 우연히 만나게 된 환자를 통해 자신의 마음 속에 묻어두었던 기억과 감정을 마주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이다. 현실의 관계와 자신이 촬영 중인 영화 속 관계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인물 마고와 그런 마고의 삶을 돕고자 하는 마음과 소설 위에서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 경계에서 흔들리는 시빌의 이야기가 미묘한 거리를 두고 마주하며 진행된다. 그 과정을 위해 활용된 액자식 구성은 이 영화를 더욱 밀도 있게 만드는 장치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서로 관여하고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데 일조한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해 서로의 동력이 되어 나아가는 것이 이 극의 구조적 에너지라면, 스토리 내부에서는 이전부터 이어온 개인 혹은 관계의 갈등이 채 봉합이 되기도 전에 새로운 갈등 상황이 형성되며 극을 이끌어간다.

시빌이나 마고 개인의 갈등은 물론, 극중 감독인 미카의 촬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도 모두 갈등의 중첩이 다음 상황을 이끌어낸다. 아무것도 결정된 바가 없는 상황에서 영화 촬영지인 화산섬 스트롬볼리로 모이게 되는 시빌과 마고, 이고르, 미카, 네 사람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에서도 마고의 주치의로서 영화 촬영에 개입하게 되는 시빌이 이고르와 지속적인 접점을 만들게 되면서 그 이후의 또다른 갈등을 유발하게 된다. 이런 식의 물고 물리는 구성이 지속된다.
 
 영화 <시빌> 스틸 컷

영화 <시빌> 스틸 컷 ⓒ 영화특별시SMC

 
04.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시빌이 극 중 다른 인물들과 차별화 되는 건 나름의 주체성을 갖고 행동한다는 점이다. 작품 속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 상황 속에서 시빌은 다른 인물들과 달리 상황을 외면하지 않는다. 작가로의 전업을 결정하고 자신의 오래된 환자가 큰 배신감을 토로할 때도 그랬고, 화산섬에서 이고르와의 부정한 관계가 들통난 뒤에도 그런 모습이었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충분히 추측 가능한 그녀의 과거 속 여러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상황을 어쩔 줄 몰라 하는 마고는 물론,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장을 돌연 떠나버리는 미카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부분이다.

이 글의 처음에서 언급했던 부분, 심리치료사라는 직업을 내려놓기로 결정한 시빌이 마고의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끌리게 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되는, 가브리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때때로 찾아오는 당시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내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적극적 행동을 통해 그때 이후 자신에게 남은 부산물들을 통제해보고자 한다.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직접 키우고 있는 것 또한 그렇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볼 때, 감독이 시빌이라는 인물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결코 과거의 어떤 지점, 특정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 같다. 그 기억이 부정적이면 부정적일수록 우리는 그 지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상황을 회피하고 단기적으로 잊어보려고 하는 식으로는 근원적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영화의 처음에서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던 시빌의 아이도, 시간이 지나 영화의 말미가 되니 자신의 의지대로 진짜 아버지가 누구냐며 물어오지 않나. 피하려고 해도 피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05.

다시 한번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감독이 현실의 세계와 허구의 세계를 평행하게 놓고 그 경계에 인물을 세워둔 까닭에 영화 속 인물은 어떤 선택을 하든, 어느 세계에 입장하든 다른 한 쪽의 영향을 받게 된다.

마고의 이야기로 소설을 쓰고자 하는 시빌이 작가로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심리치료사로서의 윤리를 저버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마고가 영화라는 허구의 세계 속에서는 이고르와 함께 절절한 사랑에 빠진 연인을 연기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조금도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일종의 모순적 관계라고나 할까. 영화 속에서는 표현되고 있지 않지만 반대의 경우를 선택하는 때에도 다른 한 쪽은 선택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점에서 반대쪽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실제와 허구,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 마땅히 그리해야 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등. 이 영화가 그려내는 경계의 선은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나의 인물이 각 상황을 대표하는 지점만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기에 한소끔이라도 호흡을 놓치게 된다면 단순히 복잡한 영화로만 기억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작 지점에서부터 조용히 쌓아 올리기 시작한 갈등이 어느 지점에 이르러 터지기 시작하고, 그 지점의 이야기가 또 다른 장면의 발단이 되어 다시금 발화할 때 그 연쇄적 반응을 보고 있으면 어떤 희열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뜬금없는 지점에 배치되어 실소를 터뜨리게 하는 코믹함 역시 매력적일 정도로 말이다.
영화 무비 시빌 버지니아에피라 아델에그자르코풀로스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