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1일에 있었던 제40회 청룡영화상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위한 '즉위식' 같은 행사가 됐다. 실제로 <기생충>은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과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미술상 등 5개 부문을 휩쓸었다. 올해 5월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은 국내외 영화 평론가 및 마니아들의 극찬을 받았을 뿐 아니라 흥행에서도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며 2019년을 '<기생충>과 봉준호의 해'로 만들었다.

여우주연상 부문에서도 봉준호 감독에게 발탁된 두 배우가 각축을 벌였다. <괴물>과 <설국열차>에 차례로 출연하며 정변의 모범을 보였던 고아성은 영화 <항거: 유관순이야기>를 통해 열연을 선보이며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떠올랐다. 여전히 고아성을 <괴물>에서 고모(배두나)의 양궁경기를 보다가 괴물에게 납치되는 현서로 기억하던 관객들은 <항거> 속 고아성의 '폭풍성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유관순 열사를 표현하기 위해 5일이나 금식하며 촬영에 임했던 고아성의 뜨거웠던 연기도 <기생충> 열풍을 넘진 못했다. 2019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트로피는 <기생충>에서 부잣집 사모님 연교를 연기했던 배우 조여정이 차지했다. 30대의 끝자락에 연기인생의 정점을 찍은 조여정은 4일 첫 방송되는 KBS 드라마 <99억의 여자>를 통해 우연히 현금 99억을 손에 쥔 주부를 연기하며 <기생충>의 기세를 이어갈 예정이다.

노출도 불사한 과감한 변신
 
 조여정은 방자전에서 '열녀의 대명사' 춘향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해 눈길을 끌었다.

조여정은 방자전에서 '열녀의 대명사' 춘향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해 눈길을 끌었다. ⓒ CJ 엔터테인먼트

 
1997년 패션지의 모델로 데뷔한 조여정은 1997년 <뽀뽀뽀>의 역대 최연소 '뽀미 언니'로 활약했다. 1998년에는 최창민(개명 후 최제우), 송혜교, 김승현 등 당시 청춘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시트콤 <나 어때>에 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지현, 송혜교, 김민희, 배두나 등 또래의 패션지 모델 출신 배우들이 하나 둘 청춘스타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과 달리 조여정은 청순한 이미지로 주목 받았을 뿐 이렇다 할 대표작을 만나지 못했다.

조여정의 초기작 중에는 최고시청률 57.1%을 자랑하는 대작 드라마 <야인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야인시대>에서 조여정은 김두한(안재모 분)을 짝사랑하는 기생 설향(허영란 분)의 친구이자 김두한의 친구B 문영철(장세진 분)의 애인 애란을 연기했다. 이야기의 중심에 뛰어 들기 보다는 한 발 뒤에서 설향을 나무라거나 조언을 해주는 역할이었다. 실제로 조여정이 연기한 애란은 광복 후의 이야기를 다룬 2부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2000년대 여러 작품을 찍었음에도 대중들에게 크게 돋보일 기회가 없었던 조여정은 2010년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을 통해 파격변신을 시도했다. 고전 소설 춘향전을 방자의 시각으로 각색한 영화 <방자전>이었다. 조여정은 <방자전>에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방자(고 김주혁 분)와 이몽룡(류승범 분)을 동시에 유혹하는 대범한(?) 성격의 춘향을 연기했다. 조여정의 변신이 돋보였던 <방자전>은 전국 3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청순한 이미지의 조여정은 <방자전> <후궁 : 제왕의 첩>로 의미 있는 도전을 했다. 조여정은 노출에만 관심을 갖는 관객들의 시선에 아쉬움을 보이면서도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장면이라면 노출 연기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당당히 밝혔다. 조여정의 그 태도 속에서 <후궁> 역시 260만 관객을 모으며 나쁘지 않은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조여정은 2014년 <방자전>을 함께 했던 김대우 감독의 신작 <인간중독>에서 김진평 대령(송승헌 분)의 아내 이숙진을 연기했다. 남편의 출세를 위해 두 발 벗고 나서는 푼수끼 있는 부인을 잘 표현한 조여정은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데뷔 후 처음으로 연기상을 받았다. 비록 <방자전>이나 <후궁>에 비하면 비중이 큰 작품은 아니었지만 조여정에게 첫 연기상을 안겨준 <인간중독>은 남다른 의미로 남은 작품이 됐다.

<99억의 여자>로 대세 굳힐까
 
 조여정을 <기생충>을 통해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인생의 정점을 찍었다.

조여정을 <기생충>을 통해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인생의 정점을 찍었다. ⓒ CJ 엔터테인먼트

 
2016년 단막극 <베이비시터>, 2017년 드라마 <완벽한 아내>에 출연하며 한 동안 드라마에 전념한 조여정은 작년 봉준호 감독의 신작 <기생충>에 출연 제의를 받았다. 봉준호 감독은 조여정이 가진 특유의 맑은 느낌이 시나리오 속 연교라는 캐릭터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고 캐스팅 이유를 밝혔다. 봉준호 감독은 조여정의 맑은 이미지를 여전히 잘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여정은 연교가 가진 캐릭터를 그대로 살린 순수한(?) 연기로 봉준호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송강호의 연기에만 익숙하던 해외 관객들도 조여정이 보여준 뜻밖의 열연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기생충>을 통해 '인생연기'를 보여준 조여정은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통해 배우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조여정은 수상소감을 전하는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생충>이 받게 될 지 저만 몰랐나 봐요"라는 '시그니처 대사'도 잊지 않았다).

배우들은 보통 큰 작품을 마치면 일정기간 휴식기를 갖는 경우도 있지만 <기생충>을 통해 흥행력과 연기력을 인정 받은 조여정을 방송국에서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조여정은 4일 첫 방송되는 <99억의 여자>를 통해 시청자들을 만난다. 마지막회 시청률 23.8%로 종영한 <동백꽃 필 무렵>의 후속작으로 많은 기대를 받는 작품이다. <99억의 여자>는 조여정이 연기하는 정서연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만큼 조여정이 짊어진 책임이 결코 작지 않다.

<99억의 여자>에는 조여정 외에도 김강우가 마약 사건을 조사하다가 뇌물사건을 뒤집어 쓰고 바닥으로 추락한 전직형사 강태우를 연기한다.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색깔을 보여준 배우 정웅인은 아이를 잃고 사업이 풀리지 않는 분노를 서연에게 퍼붓는 남편 홍인표 역을 맡았다. 그리고 작년 연말 < SKY캐슬 >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오나라는 언제나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서연의 어릴 적 친구 윤희주 역을 통해 연기변신에 도전한다.

1981년 2월에 태어난 조여정은 이제 내년이면 한국나이로 마흔이 된다(물론 빠른년생인 조여정은 1980년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배우에게 마흔이라는 나이는 롱런의 고비가 찾아오는 시기이기도 하다. 다행히 조여정은 <기생충>을 통해 30대의 마지막을 누구보다 완벽하게 보냈다. 이제 <99억의 여자>를 통해 30대의 마지막과 40대의 시작을 잘 보낸다면 '청룡 여왕'의 새로운 10년에도 탄탄대로가 열릴 것이다. 
 
 KBS의 새 수목드라마 <99억의 여자>는 조여정의 30대를 마감하는 작품이자 40대의 시작을 여는 드라마다.

KBS의 새 수목드라마 <99억의 여자>는 조여정의 30대를 마감하는 작품이자 40대의 시작을 여는 드라마다. ⓒ <99억의 여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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