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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씨가 지난 3월 11일 오후 광주지법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관련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에 참석한 뒤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으며 법원을 떠나고 있다.
 전두환씨가 지난 3월 11일 오후 광주지법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관련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에 참석한 뒤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으며 법원을 떠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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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기인 지난 1983년 12월 11일, 그날은 나와 철도학교 동문이자 동갑내기 한희철이 군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이다. 한희철(1961.2.11. 마산출생)은 1978년 12월 국립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철도청에 근무하다 1979년 3월 철도장학생으로 서울대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철도고는 공부는 잘하는데 돈 없는 시골학생들이 서울로 많이 '유학'오는 명문학교였다. 학비가 무료였고 졸업 후 철도공무원으로 취직이 100% 보장되던 터라 특히 시골의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당시 철도고 수석졸업자가 서울공대에 합격하면 철도청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100% 지급해 주었다. 한희철은 철도고를 수석졸업하고 서울공대에 합격해서 동문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1979년 3월 철도장학생으로 당당히 서울공대에 입학했다. 나는 1979년 3월 국립 철도대에 입학했는데 당시 철도대 오화석 학장님도 철도고 수석졸업 후 철도장학생으로 서울공대를 나온 훌륭한 분이였다. 나는 이런 학장님을 수시로 찾아뵙고 존경해 마지않았다.

철도대는 당시 용산의 철도고 바로 옆에 있어서 나는 철도고 출신의 철도대 동문들을 통해 '공부벌레' 한희철에 관한 '전설'을 수시로 들으며 대학생활을 했다. 1961년 12월 21일 박정희 정권에게 사형당한 <민족일보>사장 '조용수 평전'의 저자 <경향신문> 원희복 기자도 당시 한희철과 함께 철도고를 다닌 동문이다.

노동자 권익보호에 적극 참가한 한희철

한희철은 1979년 5월 서울공대 재학 중 '가톨릭학생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부터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다. 1980년 성남 YMCA가 창립되자 한희철은 지역청년학생들과 함께 청년모임인 '탄천클럽'의 조직과 활동을 주도했다. 그 후 한희철은 노동자의 권익보호와 민주주의의 실천을 위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한희철은 노동자 야학인 '샘터교양교실'에서 교사로 활동했고, 1981년에는 '성남지역 대학생 연합회' 결성을 주도하고 세미나 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성남 수진동 성당의 '만남의 집'에서 회원으로 활동했다. 한희철은 부친의 권유로 대학 4학년 2학기를 휴학하고 1982년 12월 1일 입대했다. 그는 1983년 1월 5일부터 육군 행정병으로, 전역 이후 노동사목 신부로서 활동할 생각으로 충실히 군대생활을 했다.

한희철은 입대하기 전인 1982년 10월 성남 YMCA에서 외대에 재학 중이던 신○근을 알게 되었다. 1983년 10월 28일 군복무 중 휴가를 나왔다가 한희철은 당시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수배 중이던 신○근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 때는 주민등록 일제갱신기간으로 신○근을 포함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수배 중이던 대학생들이 주민등록증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희철은 이들을 돕기 위해 새로운 주민등록증 용지를 구해 위조 주민등록증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한희철은 같은 성당 친구이자 당시 동사무소에서 방위병으로 복무 중이던 친구 전○일을 찾아갔다. 마침 훈련 중이라 자리에 없던 전○일을 만나지 못하게 되자, 한희철은 전○일 앞으로 주민등록증 용지를 구해달라는 편지를 써서 신○근에게 주고 귀대했다.

그런데 1983년 12월 초 신○근이 전두환정권의 보안사에 의해 검거되었고 수사과정에서 한희철의 편지가 나왔다. 이로 인해 한희철은 1983년 12월 5일 헌병들에게 영장 없이 체포되어 보안사로 연행되었다. 보안사는 당시 시행되던 '녹화사업'의 일환으로 강제징집자에 대한 '심사(조사)'를 하고 있었다. 녹화사업은 1980년대 초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주도로 실시되었는데, 각급 부대는 운동권 출신 병사들을 동향관찰·감시 등 특별 관리했다.

보안사는 당시 학사장교를 교관으로 선발, 교육해 보안부대와 보안사에 배치하고 강제징집된 학생들을 대상으로 심사·순화·활용업무 등을 수행했다. 보안사는 이 과정에서 사실상 운동권활동에 관한 광범위한 수사를 했고,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신체적 자유를 침해하는 불법적인 연행·감금·수사를 하며, 정보제공 활동을 강요해 운동권활동에 대한 탄압을 했다. 또한 운동권 활동전력이 있는 한희철 같은 병사들에 대해서도 보안사는 대학 재학시 운동권활동이나 운동권 동료 및 조직에 관한 사항 등을 추궁해 수사과정에서 가혹행위를 하고 자백을 강요했다.

당시 보안사는 한희철 같은 조사대상자를 아무 표식 없는 군복으로 갈아입히고 화장실에 가는 경우 이외에는 조사실 밖으로 아예 나갈 수 없도록 감금한 상태에서 조사했다.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히 차단된 이곳에서 보안사요원들이 직접 조사대상자를 무지막지하게 폭행했다.

한희철도 이곳에서 1983년 12월 5일부터 12월 8일까지 3일간 감금된 채, 입대 전 함께 민주화운동을 했던 동료들에 대한 진술을 강요받았다. 편지가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한희철은 맨 처음 작성한 진술서에서 동아리 활동경력 등을 진술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사를 담당하던 보안사 장교 유○남은 한희철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자 한희철을 엎드려뻗치게 하고 조사실에 있던 80cm 길이의 곤봉으로 엉덩이와 허벅지 부위를 무차별적으로 때리는 등 폭행과 고문을 가했다.

이런 폭행으로 한희철의 허벅지는 시커멓게 멍이 들었고 부대로 복귀하고 난 1983년 12월 10일까지도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한희철은 보안사 조사가 끝나고 부대에 복귀한 뒤 동료병사에게 "다시 오라고 하면 죽어버리겠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자신이 고문 받으면서 받은 고통을 표현했다.

신○근에게 주었던 편지가 발각된 사실을 알게 된 한희철은 보안사가 어느 정도 자신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큰 혼란과 두려움을 겪었다. 특히 보안사요원들의 가혹한 폭력 앞에 외부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된 상황은 한희철이 육체적·정신적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다시 오라고 하면 죽어버리겠다"

한희철은 '일단 살아서 나가려면 진술을 해야 하고 진술을 하다보면 연이은 취조에 사정없이 사건은 커질'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자살을 기도했다. 그는 각종 방법으로 자해를 시도해 보기도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한희철은 결국 보안사 요원이 요구하는 대로 진술서를 작성했는데, 여기에는 '출생 이후 성장과정, 서울대 재학시 학내·학외 운동권서클에서 활동한 사항, 학생운동시 탐독서적, 운동권 친구들의 인적사항과 서클 조직체계도, 신○근을 지원하게 된 경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희철은 진술서뿐만 아니라 '군 입대 전 운동권 활동을 반성하고 앞으로 절대 같은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반성문과 '보안사에서 조사받은 내용에 대해 외부에 절대 누설하지 않겠으며, 귀 사령부 대공업무와 관련 협조 요구시 이에 적극 협조하겠습니다'는 각서도 작성했다.

1983년 12월 9일 한희철은 보안대로 돌아와 하룻밤을 묵고 소속부대로 복귀했다. 1983년 12월 10일 오전 10시 한희철은 자신의 육군부대로 복귀했고, 오후에는 내무반과 근무하던 부관부 사무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날 한희철은 친했던 군 동료들에게 보안사에서 고문 받았던 사실을 털어놓으며 자책감과 두려움을 토로했다. 당시 한희철의 고참병인 김○인은 한희철로부터 "다시 조사받으러 갈지도 모르겠다. 죽을 뻔했고 혼이 났다. 다시 오라고 하면 죽어 버리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허리와 다리 부위의 멍든 상처를 보았다고 훗날 진술했다.

또 한희철의 부대 동료인 이○구도 군부대에서 한희철이 "고문에 못 이겨 동료와 조직을 털어놓지 않으면 보안사를 빠져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사실대로 털어 놓았다"고 자책하는 것을 들었다고 훗날 진술했다. 1983년 12월 10일 밤 8시경 한희철의 고참병 임○권도 한희철로부터 "보안사에 끌려가서 죽다가 살았는데, 죽으면 죽었지 다시 보안사에 가지 못하겠다"는 말을 들었으며, 양쪽 허벅지가 시커멓게 멍이 든 것을 보았다고 훗날 진술했다.

한희철은 1983년 12월 10일 밤 10시부터 '유서'와 '성남YMCA 총무에게 드리는 글'을 작성했다. 다음날인 1983년 12월 11일 자정~새벽 1시경 침상에서 자고 있던 이○구에게 수첩, 사진, '성남 YMCA 총무에게 드리는 글' 등이 들어 있는 봉투를 누가 조사를 나올지도 모르니 잘 보관해 달라며 건네줬다.

한희철은 보안대에서 소속부대로 막 복귀했으므로 1983년 12월 10일 야간근무명령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외박을 나간 고참병인 전○희를 대신해 1983년 12월 11일 새벽 4시부터 5시 30분까지 근무하게 되었다. 한희철은 새벽 4시경 일직사관에게 이병 임○수와 근무신고를 하고 실탄 15발을 지급받은 후 경계근무를 섰다.

근무하던 한희철은 갑자기 계단위로 올라와 편지봉투를 던졌다. 임○수는 계단 중간에 떨어진 편지봉투를 주워 "이것이 뭡니까?"라고 물었고, 한희철은 "나중에 내무반 사람들과 돌려보면 알 거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임○수는 그 편지를 자신의 바지주머니에 넣고 경계근무를 계속했다. 한희철은 자신의 경계호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뒤 새벽 4시 25분경 경계호에서 연발 총소리가 들렸다. 총소리를 들은 임○수는 경계호로 가서 한희철을 불렀으나 낮은 신음소리만 들리자 즉시 일직사관에게 사고발생 사실을 보고했다.

일직사관과 근무 중이던 헌병 2명은 사고 현장에 달려갔다. 일직사관은 누워 있는 한희철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며 깨우려 했으며 방한복을 헤치고 가슴을 보았더니 3발의 총탄 자국이 확인되었다.

한희철은 보안사에 연행되어 감금된 채 가혹한 고문을 당하면서 심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었고, 결국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운동권 동료와 조직에 대해 털어놓게 됨으로써 크나큰 양심의 가책과 인간적 좌절을 느꼈다. 한희철은 1983년 12월 10일 부대에 복귀한 뒤 동료병사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보안사의 고문이 가져오는 육체적인 괴로움이나 두려움보다 자신의 진술로 인해 동료들이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죄책감과 앞으로 동료들과 같이 민주화운동을 계속해 나갈 수 없다는 좌절감을 토로했다.

전두환에게 쓴 한희철의 유서
 
전두환씨가 지난 3월 11일 오후 광주지법에서 열리는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을 받기 위해 도착하고 있다.
 전두환씨가 지난 3월 11일 오후 광주지법에서 열리는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을 받기 위해 도착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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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한희철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더욱 이런 문제에 강한 죄책감과, 또다시 보안사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이용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보안사의 고문과 공작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좌절감 속에서, 한희철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동료들에게 닥친 위기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더불어 보안사의 가혹행위를 사회에 고발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리해 '성남 YMCA 총무에게 드리는 글'에서 보안사에서 고문을 당한 사실과 자신이 진술한 운동권 동료들에게 위험을 알리려 했고, '유서' 말미에 "전두환 보안사령관 귀하"라고 기재함으로써 보안사에 의해 자행되었던 불법적인 인권유린을 널리 고발하려 했다.

사건이 발생하자 수사를 담당했던 사단 헌병대는 적극적인 수사를 벌이기보다는 보안사에 관련된 부분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헌병대장 유○채는 변사사건 수사 중 한희철이 보안사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후 귀대한 다음날 사망했으며, 한희철의 엉덩이와 허벅지 부위에 보안사에서 고문한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그러나 유○채는 당시 보안사의 위상을 고려해야 한다며 수사관에게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말라고 축소 수사를 지시했다. 결국 사건의 공식적인 조사결과에서는 보안사 관련부분이 배제된 채 발표됨으로써 진상이 은폐되었다.

또한 한희철의 소속부대를 관할하는 보안부대는 한희철의 유서 중 '보안사령관 전두환 귀하'라고 기재된 부분을 임의로 잘라내어 보안사와의 관련성을 은폐했다. 보안사는 한희철의 사망 이후에도 그와 관련된 운동권 동료와 조직을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를 계속했다. 한희철의 관물대에서 메모지가 발견되었는데, 보안사는 보안부대와 사단 헌병대 요원을 동원해 고인이 된 한희철의 가택을 수색해 수첩과 노트를 수거해 대공수사처로 넘기기도 했다.

이후 1984년초 국회에서 '녹화사업'과 관련된 의문사 문제가 제기된 이후 한희철의 부친은 1984년 4월경 보안사령부 법무담당관, 감찰담당 등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한희철의 부친은 한희철이 보안사에서 고문당한 적이 없냐고 물었으나, 보안사측은 여전히 한희철을 고문한 사실이 없다며 진상을 은폐했다.

또한 육군 의무대 군의관 구○서는 사체를 검안할 때, 경험이 없는 군의관이 수사관에게 사체를 옮기라는 등의 지시를 내리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현장에서 사체를 덮고 있는 천을 들추고 한 번 살펴보기만 했으며 군복을 헤치고 총상 정도를 살펴보거나 사체의 등쪽을 살펴보지도 않았다. 그 결과 구○서는 사체에 대한 검안서를 의무대 선임하사의 설명만 듣고 작성 하는 등 자신의 직무를 소홀히 했다.

한희철의 죽음과 전두환의 삶, 이게 나라인가? 
 
전두환씨가 12.12 쿠데타 주역들과 함께 서울 강남 모 고급 중식당에서 1인당 20만 원 상당의 코스요리를 즐기는 모습이 지난 12일 확인됐다.
 전두환씨가 12.12 쿠데타 주역들과 함께 서울 강남 모 고급 중식당에서 1인당 20만 원 상당의 코스요리를 즐기는 모습이 지난 12일 확인됐다.
ⓒ 정의당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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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은 군입대 전 가톨릭학생회·탄천클럽·샘터교양교실·만남의집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런 활동은 당시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노동현장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활동이었다.

또한 한희철이 입대한 이후 1983년 10월 휴가기간 중에 당시 정권에 의해 수배 중이던 신○근과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주민등록증 일제갱신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이들을 도와주려 했다. 한희철의 이런 행동은 당시 자신의 행위가 실정법에 의해 처벌될 수 있다는 위험을 각오하고 군인신분이었음에도 전두환정권으로부터 억압받는 운동권 활동을 자발적으로 도왔다는 면에서 민주화운동에 대한 의지와 열정을 표현한 행동이었다고 확신한다. 

1980년대 초 전두환의 보안사는 정권유지를 위해 강제징집된 사병과 운동권 활동 전력이 있는 사병을 대상으로 '녹화사업'을 시행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과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한희철은 보안사에서 고문조사를 받은 뒤 부대로 복귀해 유서와 '성남 YMCA 총무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전두환 보안사의 인권유린과 녹화사업의 실상을 고발했다. 지난 2002년 필자가 몸담았던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너무도 짧았던 한희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보안사령부의 '녹화사업'에 대한 고발과 항거의 표현인 '자살'은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으로 판단해 한희철은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사망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1983년 12월 11일 한희철의 죽음으로부터 36년 흐른 2019년 12월 12일, 그날은 내게 너무도 잔인한 비수로 다가왔다. 그날 광주민주화운동의 학살범이자 한희철 죽음의 가해자인 전두환과 그의 수족들은 강남의 한 고급식당에서 1인당 20만 원짜리 코스요리를 먹으며 1979년 12·12 군사반란 40주년을 축하하는 호화오찬을 즐겼다.

이게 나라인가?

태그:#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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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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