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30 08:21최종 업데이트 20.04.24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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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벌써 2년 전 일입니다.

손님= "안녕하세요. 저기... 좀 오래된 만년필인데 수리가 가능할까요?"
나= "펜 상태가 어떤지요?"
손님= "제가 젊었을 때 쓰던 펜인데, 20년 전쯤 서랍에 넣어두고 잊고 살았네요. 제 딸아이가 다음 달 결혼하는데, 사위 될 사람이 만년필 좋아한다는 걸 엊그제 알았어요. 며칠 온 집안을 뒤져 겨우 찾아냈지요. 그런데 희한해요. 겉보기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잉크가 안 나와 쓸 수가 없어요. 워낙 오래된 펜이라 수리 맡길 데도 없어 포기했다가 혹시나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통화 후 며칠 뒤 부산에서 펜 한 자루가 올라왔습니다.
 

파카75 전체컷 ⓒ 김덕래


파카75 만년필 F촉. 스털링 실버(Sterling Silver)는 92.5%의 은과 다른 원소의 금속 7.5%를 포함한, 이른바 불순물이 아주 적은 '표준은'을 뜻합니다. 캡 링에 새겨진 925란 숫자는 그런 의미입니다.
 

캡 ⓒ 김덕래

 
순은은 워낙 물러 내구성이 떨어지므로, 동이나 백금, 기타 금속을 섞어 만든 합금을 사용했습니다. 재질 특성상 사용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얼룩덜룩 변색되지만, 전용 관리도구를 사용하면 어느 정도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펜은 잉크가 충전된 상태로 오랫동안 잠들었던 상태라 외관도 내부도 험합니다.

만년필을 한동안 사용하지 않을 땐, 꼭 세척 후 건조한 다음 보관해야 합니다. 내부에 잉크가 들어있는 상태로 방치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천천히 굳어집니다. 마치 입자가 거친 모래 알갱이처럼 딱딱해집니다. 이 찌꺼기들이 잉크가 지나가야 할 통로를 막아버리니 잉크가 충전될 수도, 써질 수도 없는 게 당연합니다.
 

파카75 수리 ⓒ 김덕래

 
파카75는 1964~1993년까지 생산된, 파카의 75주년을 의미하는 모델입니다. 필기구 애호가들 사이에서 최고의 빈티지 만년필 중 하나로 손꼽힐 만한 이유는 곳곳에 있습니다. 만년필의 핵심이랄 수 있는 닙은 14K 금촉, 바디는 92.5%의 은을 사용했으며, 표면 전체에 치즐(cisele) 패턴을 넣어 개성을 표현했습니다.

펜 전체를 휘감은 체크 문양은 클래식한 느낌을 배가시키며, 그립감 역시 한층 끌어올리는 기능적 요소로 작용합니다. 삼각형태 그립 또한, 당시로선 파격적인 디자인 언어로 읽힙니다. 유사한 그립부 디자인을 가진, 국내 만년필 대중화를 선도한 라미 사파리가 1980년 만들어졌으니, 60년대의 파카75는 분명 시선을 잡아 끌만한 요소들로 중무장한 파카의 전략적 모델입니다.


1941년, 회심의 명작 파카51이 등장해 고가 필기구 시장을 평정했습니다. 당시 도전정신과 패기로 사기가 오른 파카는, 보급형 시장도 점령할 야심찬 계획을 세웁니다. 1948년 파카21을 발표해 학생층을 흡수하고, 1960년 청록파 시인 박목월의 애장펜으로도 잘 알려진 파카45를 내놓으며 대중의 인기를 끌어모았습니다.

몇 년 뒤 1964년 파카75라는 플래그십 모델을 내놓으며 프리미엄 만년필시장의 주도권을 쥐려 한 파카는 당시 남다른 전투력을 보여줬습니다. 마치 다른 필기구 제조사들에게,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그러면 난 더 멀리 달아나 줄테니!' 이렇게 소리치는 것만 같았지요.

파카51이 대중적인 명작이라면, 파카75는 차별화된 명품이랄 수 있습니다.

나= "보내주신 펜 잘 받았어요. 다행히 생각보다 상태가 양호해요. 내부 세척하고, 펜촉 손보면 다시 쓸 수 있겠어요. 장인어른의 젊은 시절 함께한 펜을 선물받다니, 이분 복이 많네요. 부러워요. 제가 어떻게든 컨디션 끌어올려 볼게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주세요."
손님= "아~ 정말인가요? 진짜에요? 세상에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보내긴 했지만, 사실 큰 기대는 안했어요. 고치기 힘들 거라 생각했거든요. 정말 고맙습니다. 아직 시간은 좀 있어요. 잘 부탁합니다!"


분해해 구석구석 꼼꼼히 세척하고, 틀어진 펜촉은 반듯하게 맞췄습니다.
 

파카75 펜촉 ⓒ 김덕래

  

파카75 펜촉 ⓒ 김덕래

 
언제나 함께하는 나만의 반려펜

펜촉이 어느 정도 자리잡으면 잉크를 충전합니다. 지금부터 최적의 잉크 흐름과 필감을 찾아내야 합니다. 만년필 펜촉은 아주 섬세합니다. 마치 갓 돌 지난 어린애 같아, 무심히 대하면 투정부리기 일쑤입니다. 긁힘과 끊김. 형편없는 손맛을 보여주는 펜이더라도 공들여 다듬다 보면 조금씩 순해집니다.

정상적인 만년필은 손에 힘을 빼고 써도 잉크 흐름이 끊기지 않아야 합니다. 펜촉이 종이를 거칠게 긁지 말아야 합니다. 맞습니다. 힘을 주지 않아도 잘 나오는 펜이라면 구태여 과한 필압을 주고 쓸 이유가 없지요.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답답해지고, 그래서 손에 힘을 줘 눌러 쓰는 겁니다. 그러면 펜촉은 점점 더 틀어지게 됩니다. 종이를 긁고 잉크 흐름도 불규칙해집니다.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처럼, 망가진 펜은 고치면 됩니다. 잘 손봐진 펜은 촉에 단차가 없고, 슬릿 간격도 적당합니다. 그러면 가볍게 쥐고 써도 잘 나오고 부드럽습니다. 그 상태로 오래 길을 들이면 만년필은 점점 더 내 것이 되어 갑니다. 언제나 함께하는 나만의 반려펜이 됩니다.

수리도구는 오직 두 손뿐. 손가락 끝 손톱을 세우고 눕혀 펜촉을 휘고 폅니다. 절대 연한 펜촉보다 강한 금속도구를 사용하면 안됩니다. 펜촉을 수리하다 보면 손톱 끝이 조금씩 우둘투둘하게 깨집니다. 너무 짧으면 도구로서의 제 기능을 못하고, 또 길면 힘을 받을 때 휘어버려 곤란합니다. 수시로 깎아 손톱 끝을 반듯하고 적당하게 유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유일한 수리 도구니까요.

만년필을 수리한다는 건, 마치 펜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습니다. 불편하다 호소하는 부분을 한곳 한곳 손보다 보면 어느새 한 자루의 필기구가 살아나 있습니다. 컨디션을 회복한 펜은 부드럽고 매끈한 필기감으로 화답합니다. 가끔 만년필에도 생명이 있는 게 아닐까?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해요.

수십 장 써가며 필감을 끌어올립니다. 만년필은 장식품이 아니니 겉보기만 좋아선 안 됩니다. 손에 힘을 주지 않아도 술술 부드럽게 써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주 쓰게 되고, 그러다 보면 점점 더 좋아집니다.

만년필은 예민한 구석이 있는 도구라 사용자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합니다. 마치 반려동물과 같습니다. 정성이 드는 만큼 애착도 더 깊어집니다. 내 손길이 필요하니 마음이 쓰이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기원전 4세기경 이집트인의 갈대펜 이전에도 인류는 나뭇가지나 돌을 뾰족하게 갈아 기록도구로 사용해 왔습니다. 사람은 손을 이용해 뭔가를 기록하며 문명을 발전시켜 온 거지요. 그런 이유로 모든 필기도구엔 인문(人文)의 향이 배 있습니다. 기운이 스며 있습니다.

펜 내부 세척, 펜촉을 손본 다음, 잉크를 충전해 충분히 테스트 해줬습니다.
 

파카75 세척 ⓒ 김덕래

 
이제 절반 왔습니다. 써지지 않는 만년필. 외관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을 겁니다. 은세정용 융과 세척액으로 꼼꼼히 닦아 광을 내줍니다. 표면이 매끈했으면 금방 끝났을 텐데, 틈새 사이사이 놓치지 않으려다 보니 마냥 시간이 갑니다.

이 펜엔 길고 깊은 이야기가 스며 있습니다. 딸을 품에서 떠나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사위에게 파카75를 건네는 아버지의 속내를 감히 짐작해 봅니다. '내 청춘이 담긴 펜일세. 내가 오래된 이 펜을 잘 간직해 온 것처럼, 내 몸보다 더 아껴온 딸아이를 이젠 자네가 살피고 보듬어 주길 바라네.'

숙성이 잘 된 스테이크는 이미 그 자체로 근사한 맛을 보여줍니다만, 향 좋은 나무로 잘 훈연하면 풍미가 배가 됩니다. 좋은 펜 한 자루는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있는 게 맞습니다만, 속 깊은 이야기로 적셔지면 더 귀해집니다.

아버지가 사위에게 줄 수 있는, 이보다 더 근사한 선물이 또 있을까요? 만년필이 써지게끔 수리하는 데 든 것보다, 외관 복원에 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융 한 장을 다 쓸 정도로 많은 검정이 묻어났습니다. 흰 융이 검게 변해갈수록, 먹빛이던 펜에 조금씩 생기가 돕니다.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입니다. 세상에 오직 단 한 자루뿐인, 뭣과도 바꿀 수 없는 펜을 살려내는 일이니까요.
 

파카75 세척융 ⓒ 김덕래

 
 선물용 케이스에 병잉크를 같이 담아 보내드렸고, 한 달 뒤 전화가 왔습니다.
 

파카75와 병잉크 케이스 ⓒ 김덕래

 
결혼식 잘 끝내고 손편지 한 장 넣어 사위 손에 쥐어 줬는데 얼마나 놀라고 기뻐하던지 아주 뿌듯하더라는. 덕분에 사위와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아 고맙단 반가운 말씀.

연필, 볼펜, 샤프, 수성펜 등등 다양한 쓸 것이 있지만, 만년필만큼 내 마음을 담아 건네주기 좋은 필기구가 또 있을까요? 저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 파카(PARKER)
- 1888년 미국, 조지 섀포드 파카(George Safford Parker)에 의해 탄생한 가장 전통있는 필기구 생산업체 중 하나.
- 청록파 서정시인 박목월, 소설가 박완서, 조정래 등 많은 작가들이 즐겨 사용한 국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만년필 제조사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광주여대신문 특집란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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