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한석규.

배우 한석규. ⓒ 롯데엔터테인먼트

 
한석규에게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아래 <천문>)는 어쩌면 '재회'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2011년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이미 세종대왕을 독보적으로 표현했던 그가 이번 영화에서 다시 세종 역을 맡았다. 여기에 20여 년 전 <넘버3>와 <쉬리>에서 호흡을 맞췄던 최민식과의 만남. 

그래서였을까. 말 한마디마다 한석규의 숨은 깊었고 속도는 느렸다. 40년간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며 껌을 씹고 있던 그가 툭 던진 말이 "쓸쓸하다"였다. 혹시 촬영장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귀를 쫑긋 세우던 찰나 그가 '기분 좋은 쓸쓸함'이라고 보다 정확하게 감정 상태를 표현했다. 영화 개봉 직전 삼청동에서 만난 그에게 '다시 만남'을 화두로 인터뷰를 청했다. 

두 번의 세종, 그리고 어머니 

드라마에서의 세종은 찰진 욕도 시원하게 하며 조정 대신들과 수 싸움을 극적으로 하는 이였다. 꽤 거칠었고 날이 서 있는 모습이었다면, <천문> 속 세종은 보다 부드럽다. 특히 천민이던 장영실(최민식)을 발탁해 등용하는 과정, 장영실이 위기에 몰리고 대신들이 왕권에 공세를 가할 때 어떻게든 사람을 지키고자 했던 면모가 강조됐다. 이를 한석규는 아버지로부터 영향받은 세종과 어머니로부터 영향받은 세종을 구분해 해석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이도(세종), 즉 위인을 연기한다? 40이 넘을 때까지 상상해본 적이 없다. 좋다 싫다가 아니라 상상력이 동원돼야 하거든. 제가 막 데뷔했던 어렸을 땐 연기라는 게 남을 표현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40세가 넘으면서 보니 결국 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거더라. 나를 정확하게 알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에 만난 인물이 바로 이도였다. 2011년, 그러니까 마흔일곱 때 만난 이도라는 사람이 궁금했다. 그의 업적이 아니라.

조선만의 시간을 만들고, 단위를 만든 그 상상력의 원동력은 뭘까. <뿌리깊은 나무> 땐 아버지 때문이라 생각했거든. 왕권과 이도를 위해 많은 사람을 죽인 아버지. 그의 아들로서 그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했는데 50세가 넘어 다시 이도를 만났을 때 그게 아니더라. 어머니의 영향을 분명 받았겠구나 싶었다. 고려 시대 잘 나가던 집안의 딸, 정략결혼하고 집안 남성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아온 세종의 어머니는 세종이 왕이 되는 걸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세종 역시 되게 하기 싫었을 거야. 하루에 두 번 문안 인사를 어머니에게 했다는데 거의 미친 것처럼 앉아있던 어머니를 보며 말이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은 위엄과 권위의 모습이었다면, <천문> 속 세종은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닌 살리려는 군주였다. 반란에 가까운 신하들의 행위에도 분노로만 갚지 않고 큰 뜻을 위해 또 다른 선택을 하는 모습이 영화에 묘사된다. 그 선택이란 장영실을 살리는 일이었다.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장영실의 최후를 영화는 산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단순히 임금과 신하 사이가 아니라 친구이자 동료에 가까웠던 세종과 장영실을 제시한 것.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컷

<천문: 하늘에 묻는다>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약간 다른 상상을 한 거지. 장영실이 천민이었다는데 제가 신분 사회를 살아본 적 없어서 상상이 안 가더라. 근데 인도의 사회를 다룬 어떤 다큐 프로를 봤다. 너무 천한 나머지 종교마저 못 가지는 불가촉천민이 나오더라. 화장터에서 일하는 그들을 인도에선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걸 보면서 장영실을 생각했다. 엄마는 노비, 아버지는 여진족이라든데 정확히 누군지도 모르고. 그럼 조선 사회에선 사람이 아니었지. 근데 재주가 좋아. 그런 그를 세종이 해방시켰고, 심지어 내관보다 더 가까이 곁에 두고 토론하고 얘기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 관계였는데 장영실을 죽였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이 아닌 자를 등용했으니 유교 국가, 그 시스템에 젖어 있던 신하들은 당연히 마음이 안 좋겠지. 자기들은 나름 열심히 했는데 장영실보다 급이 낮으니 불만 많았겠지. 이도가 참 외롭고 괴로웠을 것이다. 영실과 놀 듯이 관계를 맺다가 위기에 몰린 그를 보면서 말이다. 하지만 영실은 전혀 신경 안 썼을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을 전폭적으로 믿고 지지해준 세종이 있으니 말이다.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이 자기 원동력은 (박정희가 써 준) 종이 마패였다고 했잖나. 그 마패만 있으면 은행에서 돈을 다 빌려줬다고. 하물며 장영실은 사람이 아닌 자에서 사람이 됐으니 세종과 관계를 상상하고도 남지."


다시 만난 최민식, 한심한 놀이의 정체

또 다른 만남, 정확히는 작품에선 세 번째인 최민식을 그에게 물었다. "민식이 형..."하고 여운을 두고 읊조리던 그의 표정이 보다 깊어졌다. 알려진 대로 최민식과 한석규는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선후배 사이(최민식 81, 한석규 83학번)로 무대 연기와 매체 연기를 오가며 서로 교류를 이어온 동료이자 절친한 사이기도 하다. 연출인 허진호 감독은 시나리오 집필 단계에서부터 두 사람과 만나며 대사를 수정하거나 여러 아이디어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애초 누가 장영실이고 세종인지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스태프들은 좀 불편했겠지. 우리 둘이 어떤 역할을 하더라도 알아서 정하시라는 말을 들었다. 민식이 형이 '석규야, 너가 정해' 이러시더라. 동생들이 보통 싸가지가 없다(웃음). 제가 이도를 하겠다고 했다. 관객들에게 다른 이도를, 어머니에게 영향받은 아들 이도를 보이고 싶다고 형님에게 얘기했지. '한번 했는데 괜찮겠어? 그러자' 하셨다. 

그 형님과 어려서부터 했던 놀이가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메모지랑 펜을 가지고 와서 천 만원 생기면 뭐할까 적곤 했다. <서울의 달>을 했을 땐 단위가 올라가서 1억 원 생기면 뭐할까를 서로 적었다. 되게 한심한 놀이잖나. 다른 데선 못하지. 민식이 형이랑은 이게 가능하다. 왜냐, 둘 다 사람에 대해 너무도 궁금해 하거든. 최민식이라는 사람도 자기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분이다. '연기는 죽어야 끝나는 공부다'라고 하셨는데 '아, 이 사람 나랑 같구나' 생각했지. 나랑 같은 분인 줄 이미 알고 있었다(웃음)."


두 배우뿐 아니라 <천문>엔 세종과 장영실의 천적이자 중요한 악역이기도 한 영의정 황희가 등장한다. 최민식, 한석규와 오랜 인연이 있는 배우 신구의 몫이었다. 허진호 감독에게 신구 선생을 모실 걸 적극 제안한 것도 바로 최민식과 한석규였다는 후문. 

"우리가 모신 게 아니라 그분이 수락한 거다. 민식이 형이 대학 졸업하자마자 <에쿠스>라는 극의 알런 역으로 발탁됐다. 당시 아무나 못 하는 역이었다. 영국에서 햄릿 역을 아무나 안 시키듯, 알런 역이 그런 상징성이 있었다. 신구 선생님이 그 연극에서 박사 역을 맡으셨지. 전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선생님을 뵈었고. 지금 사람들은 선생님을 시트콤의 코믹 연기로 기억들 하시는데 우리 땐 신구 선생님의 연기를 많이 보고 영향받았다. '와, 정말 다르다. 좋다!'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 평생 연구한 분이라는 게 느껴지는 분이다. 젊은 관객분들이 신구 선생님의 정극 연기를 잘 모르는데 이번 기회에 같이 보시길 바랐다."
 
 배우 한석규.

"연기라는 게 남을 표현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40세가 넘으면서 보니 결국 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거더라. 나를 정확하게 알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에 만난 인물이 바로 이도였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오랜 동료와 선배와의 연기는 그야말로 행복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한석규의 말한 기분 좋은 쓸쓸함의 정체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제가 성향이 좀 그렇다. 해가 뜰 때보단 해가 막 지기 시작할 때가 좋다. 모든 사물의 음영이 또렷해지거든. 그때 보면 뭔가 쓸쓸하다. 이번에 민식이 형과 작업하는데 그 기분이 꽤 들더라고. 허무함이 아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런 표정이 드는 긍정적 쓸쓸함이랄까. 천만 원 놀이, 1억 원 놀이도 이제 재미없다. 그 돈을 벌어봤고, 써봤거든. 벌어서 써보면 재밌을 것 같지? 별로 재미없더라(웃음). 

이 얘길 형에게 해본 적은 없다. 근데 아마 형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얘기하지 않아도 아는 게 있다. 그러고 보니 아까 12시에 밥 먹는데 형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인터뷰하고 있는지 형도 알지. '뭐해?' 그러기에 '어유, 인터뷰에서 한창 구라(거짓말의 은어) 치고 밥 먹고 있어요' 이랬다. 약간 말투가 쓸쓸하더라. 형이 지금 대전에서 촬영 중이거든. 왜 내게 전화했는지 감이 오더라. 생각이 난 거지. 나도 종종 갑자기 전화하곤 한다. 민식이 형이 그런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지."
한석규 천문 최민식 세종 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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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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