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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SBS에서 제작된 <녹두꽃>이 인기리에 방영되기도 했다.
▲ 드라마 <녹두꽃> 포스터 최근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SBS에서 제작된 <녹두꽃>이 인기리에 방영되기도 했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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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에 집결한 농민혁명군은 <동도대장>의 대기(大旗)를 앞세우고 각기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의 5색기로 그 표식을 삼아 대오를 정비하였다. 실제적으로 동학농민혁명군의 진군이 결행되는 순간이었다.

지도부는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혁명의 당위를 설명하고, 이번 거사의 대의(大義)를 4개항의 행동강령으로 집약하여 선포하였다.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하지 말라.
2.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하라.
3. 일본 오랑캐(倭夷)를 축멸하여 성도(聖道)를 깨끗이 하라.
4. 병(兵)을 몰아 서울로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하라.

 
동학농민혁명군 최고 지도자 최시형
▲ 교수형 직전의 최시형 선생 동학농민혁명군 최고 지도자 최시형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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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일을 동학농민혁명의 봉기일로 정한 것은 이 날이 동학 2대교주 최시형의 탄신일이었기 때문이다. 동학교도들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2대교주의 탄일을 거사일로 택한 것이다.

이날 무장에 집결한 군중은 8,000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봉기군측의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전봉준은 「공초」에서 4,000여 명이라 밝혔고, 지방관청의 보고에도 수천 명으로 기록되었다. 여러 사료를 종합하면 8,000여 명이 정확한 것 같다.

부안현이 전라감사에 올린 보고에 따르면, 4일 동학농민군 수천 명이 금구ㆍ원평으로부터 몰려와 부흥역에 있는 부대와 합세하여 동헌(東軒)으로 돌입, 현감 이철화를 감금하고 아리(衙吏)들을 결박한 다음 군기(軍器)를 탈취해가지고 6일 그들이 도교산 (현 정읍시 덕천면)으로 이동해 간 틈에 간신히 풀려나왔다고 하였다. (주석 5)


동학혁명군의 지휘부는 거사 전날인 3월 20일 전봉준ㆍ손화중ㆍ김개남 3인의 명의로 「창의문」을 발표하여 혁명의 대의를 천하에 공포하였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앉아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의 모습을 담은 좌상이 그가 처형당하기 전 갇혀 있었던 전옥서터에 세워졌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언제나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 녹두장군 전봉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앉아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의 모습을 담은 좌상이 그가 처형당하기 전 갇혀 있었던 전옥서터에 세워졌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언제나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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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은 인륜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부자는 인륜의 가장 큰 것이다. 인군(人君)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사랑하고 아들이 효도한 후에야 나라가 무강의 역(域)에 미쳐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 성상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상하고 자애하며 정신이 밝아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니 요순의 덕화와 문경의 다스림을 가히 바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오늘의 신하된 자들은 보국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한갓 녹위만 도적질하여 총명을 가리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충성되이 간하는 말을 요언이라 이르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라 하여 안으로는 보국의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탐학하는 관리가 많도다. 인민의 마음은 날로 변하여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아가 몸을 보존할 계책이 없다.

학정이 날로 심하고 원성은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의 의리(義理)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명분은 무너지고 말았다. 관자가 말하길 "사유(四維)가 펴지 못하면 나라가 멸망하고 만다"고 했는데 오늘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동학농민혁명의 주체는 농민이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주체는 농민이었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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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경부터 방백수령까지 모두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한갓 자신을 살찌우는 것과 가문을 빛내는 데에만 급급하여 사람 선발하는 문을 돈벌이로 볼 뿐이며, 응시의 장소를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만들었다. 허다한 돈과 뇌물은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배만 채우고 있다.

국가는 누적된 빚이 있으나 갚을 생각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과 더러운 일만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니 8도는 어육이 되고 만민은 도탄에 빠졌다. 수재(守宰)의 탐학에 백성이 어찌 곤궁치 아니하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도 망하는 것이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밖으로는 향제(鄕第)를 설치하여 오로지 제 몸만을 위하고 부질없이 국록만을 도적질 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가.
 
주 서부발전의 태안화력본부 안에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 북접 기포지임을 증거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2015년 5월 22일 제막식을 가졌다.
▲ 기포지 기념비 주 서부발전의 태안화력본부 안에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 북접 기포지임을 증거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2015년 5월 22일 제막식을 가졌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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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지만 임금의 토지를 부쳐 먹고 임금의 옷을 입고 사니 어찌 국가의 존망을 앉아서 보기만 하겠는가. 8도가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백성이 뜻을 모아 이제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맹세를 하노니, 금일의 광경은 비록 놀랄 만한 일이기는 하나 경동(輕動)하지 말고 각자 그 생업에 편안히 하여 함께 태평세월을 빌고 임금의 덕화(德化)를 누리게 되면 천만다행이겠노라.

                                                                         갑오 3월 20일
                                                                         호남창의소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주석
5> 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63쪽, 금강출판사, 1980.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동학혁명 , #김개남장군, #동학혁명_김개남장군, #창의문, #호남창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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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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