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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역사속으로'는 국내 역사문화 유산의 멋과 서사를 찾아 떠나는 답사기입니다.[편집자말]
- 2편 약산 김원봉이 윤세주와 밀양에서 도모한 일에서 이어집니다.

가장 어린 나이로 첫 번째 거사에 참여했다가 체포, 투옥된 윤세주는 1927년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그 해에 결성된 신간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통합 단체였던 신간회의 밀양지회는 전투적 민족주의자였던 황상규와 윤세주의 주도로 활발한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31년에 중앙 신간회의 결의로 해체되고 말았다.

신간회가 해체되고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윤세주는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1932년에 중국으로 다시 망명했다. 1919년 3.13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망명하여 의열단에 참여한 이후 두 번째 망명이었다.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 동쪽 벽에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의열단,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 쓰여 있다.
▲ 윤세주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 동쪽 벽에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의열단,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 쓰여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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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의열단 활동에 한계를 느낀 김원봉이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1923년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을 이론적 기반으로 삼아 강력한 항일 투쟁을 계속했던 의열단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닥쳤기 때문이다.

특히, 1930년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이후에는 독립군을 기반으로 한 장기적 항쟁의 길로 들어서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군대가 1938년에 창설된 조선 의용대이다.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독립군 부대로서, 중국 국민당의 요청에 따라 대적 선전 활동에 주력했지만, 중국군과의 합동 작전을 통해 기습 공격에 나서거나 일본의 통신 시설, 교통 시설, 전쟁 장비의 파괴 활동에도 나섰다.

그러나 조선 의용대의 대원들 중 상당수는 이런 활동에 머물지 않고 직접적인 대일 항쟁과 군사 작전을 원했는데, 그들을 이끌고 화북지대를 결성하여 직접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화북 지방으로 간 인물이 윤세주였다.

김원봉과 윤세주는 1935년 중국 내 독립 운동가들의 좌우 통합 정당인 민족혁명당 창립과 1938년 조선 의용대의 창설을 같이 했다. 조선 의용대의 대장은 김원봉이었지만, 대원들 사이에서는 윤세주가 위상이 높았다고 한다.

의열단과 민족혁명당, 조선 의용대에서 머리와 두뇌는 김원봉, 심장과 영혼은 윤세주라고 평가할 수 있다. 김원봉은 전략을 짜고 사람을 모으고 상황을 판단하여 앞장서서 조직을 이끌어간 반면 윤세주는 조직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마음을 얻고 온화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사람들을 이끌어갔다. 
 
1938년 중국 관내 최초의 독립군 단체로 탄생한 조선 의용대 창설 기념 사진이다. 항일운동 테마 거리 동쪽 벽에 붙어 있다.
▲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 사진  1938년 중국 관내 최초의 독립군 단체로 탄생한 조선 의용대 창설 기념 사진이다. 항일운동 테마 거리 동쪽 벽에 붙어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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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42년 5월, 조선 의용대 화북지대가 중국의 화북 지방으로 들어가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반소탕전을 벌일 때 윤세주는 태항산 장자령에서 일본군에 피격당해 전사하고 말았다.

윤세주의 죽음은 김원봉에게는 큰 슬픔이자 타격이었다. "조선 민족혁명당의 영혼 석정(윤세주)은 김원봉의 옆구리요 팔뚝이었는데, 그의 죽음은 실로 김씨의 최대 손실"이라는 당시 국민당 한 관측통의 논평도 그랬지만, 실제 윤세주의 전사 이후 김원봉의 조선 의용대에 대한 장악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이는 조선 의용대가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에 편입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김원봉과 윤세주가 고향에서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밀양 시내 해천을 중심으로 한 항일운동 테마 거리에는 의열기념관이 들어선 김원봉 생가터, 그 옆자리의 윤세주 생가터, 그 건너편의 이장수 생가터가 자리하고 있다. 이장수는 1919년 윤세주와 함께 3.13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이후 의열단에 가입하여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파 의거를 도운 인물이다.

이외에도 걸어서 가는 가까운 거리에 독립 운동가들의 생가 혹은 생가터가 여럿 있다. 의열기념관 쪽에서 서북 방향으로 높은 굴뚝이 올라간 목욕탕이 하나 보인다. 금강탕이라는 곳인데, 이 금강탕 주변에 밀양 출신 독립 운동가들 생가터가 여러 개 있다.

이리저리 걸어서 반경 채 500m가 안 되는 곳에 웬 독립 운동가들이 이리 많이 배출됐나 싶다. 독립 운동가들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모두가 혈연과 지연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했고 의열단 창단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 김대지 생가터이다.
▲ 김대지 생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했고 의열단 창단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 김대지 생가터이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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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김대지 생가터가 궁금하여 찾아갔다. 흰색 담장의 조그만 집이다. 생가가 아닌 생가터이므로 집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김대지의 '대지'는 한자로 대지(大池)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부모가 천한 이름을 지으면 오히려 장수하고 부자가 된다는 말을 듣고 '돼지'라는 음에 큰 못이라는 뜻인 '대지(大池)'라고 지었다 한다.

청년기에는 밀양 청년들의 비밀 결사인 '일합사'를 조직했지만,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에 한계를 느껴 1919년에 중국으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했다. 후에 의열단 결성을 주도하고 지원하는 등 활발한 독립 투쟁을 전개하다가 1942년에 만주에서 사망했다. 그의 생가터에서 잠시 묵념을 했다.

그리고 의열단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의열단의 활동을 함께 했던 황상규의 집터에 찾아갔다. 김원봉 집터인 의열기념관에서 서쪽으로 약 200m 거리에 있다.

1918년 만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2천만 동포들은 국민 된 본령이 독립임을 명심하여 육탄 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라고 일본에 대한 무장 독립 투쟁을 강조한 대한독립선언서. 이 선언서에 서명한 조소앙, 김동삼, 안창호, 이시영, 신채호, 김좌진, 이동휘 등 39인의 독립 운동가들 중 한 사람이 황상규이다.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한 39인의 독립운동가 중 한명이며, 의열단 창단과 활동을 주도했던 밀양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중 한명인 황상규 생가터이다. 이 앞길에 그의 호를 딴 백민로라는 도로명 주소가 붙어 있다.
▲ 황상규 생가터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한 39인의 독립운동가 중 한명이며, 의열단 창단과 활동을 주도했던 밀양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중 한명인 황상규 생가터이다. 이 앞길에 그의 호를 딴 백민로라는 도로명 주소가 붙어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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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대문 옆에 서 있는 생가터의 안내판이 반갑다. 집주인인 듯 싶은 사람이 대문에서 나온다.

"저, 여기가 황상규 생가가 맞지요?"

그러자 그가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말한다.

"우린 잘 모르겠십니더. 어느 날 갑자기 시청에서 직원들이 나와서 세워 놓고 갔으니까요."

무심한 듯 대답하는 말에는 황상규라는 독립 운동가에 대한 관심이나 자부심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이 동네 사람들 중에는 밀양의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꽤 있다고 들었다.

작년 가을에 찾아왔을 때 의열기념관 앞에서 나이 드신 동네 주민 한 분이 대놓고 "김원봉이 뭐라고 빨갱이 아이가?"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 안타까운 마음이다. 어떤 이념으로 딱 자르기 어렵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김원봉과 윤세주는 일제 강점기 내내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은 민족주의 좌파 인물들이다. 황상규도 마찬가지다.

김원봉의 해방 후 행적이 논란이 됐지만, 적어도 독립 투쟁 당시의 그의 행보는 일관된 라인에 있었다.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개방성, 필요하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유연성, 일관되게 독립을 추구한 열정이 그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한쪽에서는 위험한 공산주의자(이른바 빨갱이 테러리스트), 다른 한쪽에서는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혔을지언정 그의 지향은 분명 조국의 독립이었다.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 정권에 협조했다가 결국 김일성 유일 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숙청당한 인물, 그 때문에 해방 후 50년 동안 이념 갈등과 정치, 군사적 대립 아래에서 남북 양쪽에 잊혀졌던 인물, 김원봉이 사후에서라도 편하게 누울 땅은 어디일까. 아니, 고향 땅에서도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밀양의 대표적 명승지 영남루의 야경은 밀양 여행과 답사에서 빼놓지 말아야할 풍경이다.
▲ 영남루 야경 밀양의 대표적 명승지 영남루의 야경은 밀양 여행과 답사에서 빼놓지 말아야할 풍경이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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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정보

- 의열기념관 주소는 경남 밀양시 노상하1길 25-12 (개관: 9:00~18:00, 무료 입장)
연락처는 055-351-0815, 홈페이지는 http://www.euiyeol815.or.kr/

- 밀양강을 내려다보는 영남루는 조선 시대부터 평양의 부벽루,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조선 3대 누각으로 이름 높은 누각이다. 영남루에서 내려다보는 밀양강과 밀양 시내의 풍경이 시원하고 아늑하다. 특히, 밀양교와 어우러지는 저녁 야경이 좋으니 기왕 밀양에 간 김에 시간 내서 감상하면 좋다. 특히, 영남루 위가 아닌, 밀양강 건너편에서 영남루 쪽을 보는 야경이 좋다.

- 의열기념관 뒤에 10여 대 정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자리가 없다면 일대 골목에 적당히 주차하면 된다. 의열기념관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생가터와 밀양경찰서 터, 동화학교 터 등이 반경 500m 안에 있으니 다 걸어서 돌아볼 수 있다.

- 밀양은 돼지국밥의 원조 고장이다. 돼지국밥은 돼지 뼈로 우려낸 육수에 돼지고기 편육과 밥을 넣어 말아 먹는 국밥으로, 돼지고기의 잡내가 나지 않아야 맛있다. 시내와 외곽, 특히 항일운동 테마 거리와 주변에도 먹을 만한 돼지국밥집들이 있다.

- 밀양 시내에는 시외버스터미널 주변에 숙박시설이 몰려 있다. 펜션을 이용하고 싶다면 밀양 얼음골과 표충사 방향 쪽에 펜션이 많으니 이쪽을 이용하면 된다.


가는 길

- 자가용으로는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24번 국도 밀양 시내 방향→교동 사거리→북성 사거리를 거쳐 의열기념관을 찾아간다.
- 대중교통으로는 밀양역에서 갈 경우 역 앞에서 1, 1-2, 3, 7, 9번 등의 시내버스를 이용, 밀양교를 건넌 후 축협 앞에서 하차하면 된다. 버스정류장 건너편이 항일운동 테마 거리로 연결된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갈 경우 위의 버스를 이용하거나,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20분 정도 걸어간다. 걸어가 보길 권한다.

태그:#김원봉, #윤세주, #김대지, #황상규, #조선의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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