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49년 1월 “최고 수준의 사고(top level thinking)”라고 극찬한 내용의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
▲ 제주4.3학살에 대한 미국의 비밀 해제 문서 1949년 1월 “최고 수준의 사고(top level thinking)”라고 극찬한 내용의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
ⓒ 제주4.3평화재단

관련사진보기

 
주한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Roberts) 준장의 개인 서한 공한철 목록(문서군 RG 554, UD-UP109, 4번 상자) 1949년 1월 28일자 문서에는 친일부역자 출신의 "채병덕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가 존재한다.
 
"지난 1월 26일, 공산주의자를 소탕(cleaning-up)하기 위한 대한민국 육군과 해군 명령서의 번역본을 받았으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 제주로 한 개의 대대를 이동하겠다는 계획을 전달받았다. 이 계획은 최고 수준의 사고(Excellent Top-Level Thinking)라 생각하며, 특히 고문단에 당신의 기동 계획과 전략을 상시적으로 공유한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이처럼 채병덕 국방부 참모총장의 초토화작전을 극찬했으며, 대한민국 국방부의 초토화 계획과 전략을 미군사고문단과 상시적 공유하는 것에 대해서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는 '한미 군사안전잠정협정'에 의해 대한민국 군대의 작전통제권을 가진 시기에 이루어진 제주도민의 집단학살 사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고 사과를 받아낼 수 있는 증거 기록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은 조사연구실(실장 양정심) 주도로 지난해 미국자료현지조사팀(팀장 김기진외 2명)을 구성, 6개월 동안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을 중심으로 4·3 관련 자료를 조사한 결과, 관련 기록 3만 8000매를 입수했다고 지난 12일 밝혔다.

주한미군 정보참모부 작전일지 보고(문서군 RG 554, 44, 작전일지, 상자 5)에서도 우익세력의 야만적인 제주도민 학살 행위에 대한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의 답변과 달리 미군은 "1949년 2월 20일 제주에서 민보단이 76명의 주민들을 창으로 찔러 살해했는데, 이러한 잔혹 행위에 대해 한국의 고위 관계자들에게 주의(brought to the attention)를 줄 필요가 있다"는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 함으로써 군인과 경찰 등 공권력의 만행에 대해 무책임하게 대응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미국 극동군사령부 정보요약 문서(문서군 RG 554, 27 A1, 상자)인 1949년 7월 21일자에는 유재흥 대령의 귀순공작과 사면정책에 의해 하산한 사람들도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고 있다. 즉 "약 2000명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재판이 제주도에서 최근 진행되었는데 350명이 사형을 받았고, 약 1650명이 20년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치범'에 대한 정의를 놓고 극심한 논쟁
 
1949년 사면정책에 의해 한라산에서 하산한 2000명의 제주민들을 ‘공산주의자들’로 몰아 사형 350명 등 중형을 선고했다고 기록한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
▲ 제주4.3 학살에 대한 미국의 비밀 해제 문서 1949년 사면정책에 의해 한라산에서 하산한 2000명의 제주민들을 ‘공산주의자들’로 몰아 사형 350명 등 중형을 선고했다고 기록한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
ⓒ 제주4.3평화재단

관련사진보기

  
이들은 민간인임에도 군사재판을 받은 사람들로, 당시 형무소에서 수형자 생활을 한 생존자들이 2019년 1월 대한민국 법원에 의해 무죄나 다름없는 공소기각과 국가보상 판결을 받은 바 있다. 4·3 당시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하여 불법적인 재판과 가혹행위를 가했음에도 미군은 대한민국 군인들의 불법적인 행태를 묵인했다.

1948년 7월 2일자 미 국무부 문서(문서군 RG 59, A-1 205-H, 7390 상자)에는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 제이콥스(Joseph E. Jacobs)가 6월 15일 제주도를 방문하여 제주의 최고지휘관 로스웰 브라운(Rothell H. Brown) 대령의 보고를 바탕으로 작성한 "제주도 소요 사태에 대한 보고"서에는 "제주도민의 약 80%가 공산주의자와 관계되어 있거나 공포 때문에 그들과 협조하고 있다"고 담겨 있다.
 
 1948년 7월 “제주도민의 80%가 공산주의와 관계되어 있다”는 식으로 보고된 미 국무부 문서
▲ 제주4.3 학살에 대한 미국의 비밀 해제 문서  1948년 7월 “제주도민의 80%가 공산주의와 관계되어 있다”는 식으로 보고된 미 국무부 문서
ⓒ 제주4.3평화재단

관련사진보기


미군 최고수뇌부의 이런 인식은 "공산주의자는 통상의 법률적 방법으로 다뤄선 안 된다"던 이승만의 인식(문서군 RG 554, 16 A1, 상자 10, 1948년 5월 15일자 극동군사령부 문서)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이승만은 극동군사령부 정보국 담당자와의 면담(이승만 자택을 방문한 미국 극동군 사령부 해리 세웰 소령)에서도 이를 피력했다. 당시 미군은 불법적인 군사재판이 오히려 법질서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며 유재흥 대령의 성과로 규정하고 있다.
         
연합군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 자료(문서군 RG 331, UD1169, 상자 785-25)에 의하면 북위 38도선 이남 지역만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1948년 2월 24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과 미군정의 최고책임자인 하지 중장은 덕수궁 회의에서 '정치범(political prisoner)'에 대한 정의를 놓고 극심한 논쟁을 벌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1948년 5월 “공산주의자는 통상의 법률적 방법으로 다뤄선 안된다”는 이승만의 인식을 기록한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
▲ 제주4.3 학살에 대한 미국의 비밀 해제 문서 1948년 5월 “공산주의자는 통상의 법률적 방법으로 다뤄선 안된다”는 이승만의 인식을 기록한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
ⓒ 제주4.3평화재단

관련사진보기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제1소위원회(6번째 회의)는 남쪽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는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있으니 그들을 '정치범'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으나 하지는 "선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파괴하는 자들을 어떻게 정치범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동기는 정치적일지 모르나 범죄자일 뿐이다"라며 강력하게 맞섰다.

임시위원단이 "우익세력이 그런 행동을 해도 마찬가지냐"고 따지나, 하지는 "그렇다"고 답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이러한 질문은 '정치범'과 '범죄자'의 대응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제헌 국회의원 선거의 선거인단은 유권자가 행정 사무소(리사무소나 읍․면 사무소)에 직접 가서 신청을 해야 하는데 당시 제주민들은 이를 거부하였고, 미군정과 경찰, 서북청년단들은 제주민들을 강압적으로 선거인단 등록을 유도하자 선거인단 등록을 거부하고 산으로 피신하는 등 갈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과 하지 중장의 녹취록은 주한미군이 제주민들을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으로 해석된다.

미국에 책임 있음을 확인하는 중요 자료들
 
1948년 6월 제주도에 미군 70여명, 제주앞바다에 크레이크호가 주둔했다는 미국 극동군 사령부 문서
▲ 제주4.3 학살에 대한 미국의 비밀 해제 문서 1948년 6월 제주도에 미군 70여명, 제주앞바다에 크레이크호가 주둔했다는 미국 극동군 사령부 문서
ⓒ 제주4.3평화재단

관련사진보기

  
제주4·3평화재단은 주한미군 하지 사령관의 답변으로 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반대한 제주에서 "미군의 지휘 아래 한국 군경과 우익단체에 의한 무차별 학살이 저질러지게 된 배경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해석했다.

남한에 진주했던 24군단의 상위기관인 미 극동군사령부(Far East Command, 일명 맥아더사령부)의 6월 14일자 정보요약 보고서(문서군 RG 319, NM-3 85A, 상자 3005)에 의하면 4·3봉기가 일어나고 한 달가량 지난 1948년 5월 제주에는 "미군 70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미국 구축함 크레이크호가 제주시에서 3마일밖에 정박하였으나 (봉기군이나 제주민들에 의한) 미군에 대한 공격은 없었다"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자료 조사는 70여 년 전 제주에서의 야만적인 집단 학살이 1948년 8월 24일 서울에서 체결된 '한.미 군사안전잠정협정'에 의해 대한민국 군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미국에 책임이 있음을 확인하는 중요한 자료들이라 볼 수 있다.

특히 1948년 12월 프랑스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서 전쟁시에도 '초토화작전'을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49년 1월에 대한민국 군대의 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 대한민국 군대의 초토화 작전을 극찬한 것은 국제법도 어긴 것이라 해석된다.     

미국의 자료 조사는 2001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실시한 이후 18년 만에 재개된 것이다. 제주4·3평화재단은 "그때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출간된 위원회의 미국자료집은 NARA의 분류체계에 따른 출처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증거자료로서의 가치가 반감됐지만, 이번 조사를 통해 해당 문서들의 출처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증거력을 되살린 것은 큰 성과"라 평가했다.

4·3평화재단은 금년에도 미국자료현지조사팀을 가동하여 미군자료의 비밀해제 요청을 계속해가면서 조사대상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외에 미육군군사연구소, 트루먼도서관과 미국 소재 대학교 한국학연구소 등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태그:#미군정, #평화재단, #하지,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초토화
댓글6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헌법에 보장된 정의의 실현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실천하는 시민들의 다양한 노력이 지속될 때 가능하리라 믿는다. 지방자치는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토대이며,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라 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