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6 09:09최종 업데이트 20.02.0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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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영 ‘금강강마일심보검’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후기에서 근대기에 걸쳐 활동했던 예술가 중 가장 신비롭고 재주 많은 인물은 단연 백련(白蓮) 지운영(池雲英, 1852-1935)이 아닌가 싶다. 그는 학문적으로 유교·불교·도교에 모두 통달하였다고 하며, 예술에서도 시(詩)·서(書)·화(畵) 등 모든 분야에 모자란 것이 없어 당대의 '삼절(三絶)'로 불리었다.

그는 당시로서는 세상을 대하는 폭이 넓었다. 서울 중인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중국, 일본을 넘나들며 새로운 학문과 예술세계를 접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서화면에서 보면 글씨는 유려한 해서와 행서에 뛰어났다. 그림은 정교한 선묘와 맑은 색채를 사용한 산수를 잘 그렸으며, 중국의 인물이나 신화 속 인물을 그린 도석인물도(道釋人物圖)에 빼어난 솜씨를 보였다.


또한 도교적인 삶에 빠져 자연에 묻혀 지내거나 무술을 연마하는 등 방외인(方外人) 같은 삶을 보내기도 한다. 간혹 산 속에서 그의 주술적인 전서가 발견된다거나 그에 대한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하는 것은 이러한 삶의 흔적이다. 또한 화가로서 옆으로 길게 누운 '일심보검(一心寶劍)'을 자주 그렸는데, 이 또한 검술을 즐긴 자신의 삶이 투영된 것이다.

지운영의 파란만장한 삶의 역정
 

지운영 사진 한국사진사(최인진, 눈빛, 2000) 재촬영


지운영은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주로 북촌 지역과 광교 지역 사이에서 살았다. 이때 청계천 광교 부근에 살던 고환당(古懽堂) 강위(姜瑋, 1820-1884)를 만나며 많은 영향을 받는다. 당시 강위는 역관과 의관 등 기술직 중인들과 함께 시회 모임인 '육교시사(六橋詩社)'를 이끌고 있었다. 지운영은 1870년쯤부터 함께 한다.

강위는 추사 김정희의 제주도 귀양 시절 제자로 입문하였으나, 훗날 김정희의 북청 귀양이 끝난 후 문하에서 물러나 방랑 생활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강위의 삶은 방랑 생활과 함께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쌓는다. 강위의 시는 개성이 뚜렷하고 관습적 표현을 극단적으로 배격한 참신한 시편들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현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1862년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된 민란의 모습을 보고 현실 문제를 해결해야 됨을 느껴, 서울로 올라와 광교에 자리를 잡고 '육교시사'를 조직한다. 이때 근처에 살던 지운영이 그의 명성을 듣고 합류하게 된 것이다.

지운영이 훗날 방랑 생활을 하며 시·서∙화를 즐기며 산 것도 스승 강위의 영향이 컸다. 강위의 지도로 현실 참여 의식을 갖게 된 지운영은 1882년 수신사 박영효(朴泳孝)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간다. 그는 일본의 선진적인 문화 발전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이곳에서 사진술을 접하고 매력을 느껴 일본인 사진사에게 기술을 배운다.

이듬해인 1883년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주사 직위에 임명되어 귀국한다. 그는 일본에서 배운 사진술을 바탕으로 이듬 해 1884년 종로통 마동(麻洞)에 사진관을 설립한다. 마침 민씨 일가와 친했던 지운영은 고종의 어진을 찍는 행운을 맞는다. 그는 고종을 찍은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덕분에 유명세를 얻어 사진관은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실패하자, 화가 난 폭도들에 의해 사진관은 파괴되고 만다. 이때 일로 개화파들은 일본으로 망명을 한다. 고종은 삼일천하의 반역 주모자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운다. 이때 지운영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망명한 개화파들을 처단할 자객으로 선발된다. 그동안 수련한 무술 등이 선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1886년 '바다 건너가 적을 잡아 오는 관리'라는 역사에 유례없는 '특차도해포적사(特差渡海捕賊使)'라는 이상한 임무를 받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는 도쿄나 요코하마 등을 오가던 김옥균과 박영효 등을 가까이 한 후 암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유혁로 등 개화파들에게 잡혀 비밀문서, 비수 등을 압수당한다.

결국 본국에 압송되고, 평안도 영변으로 유배되고 만다. 이 일로 지운영은 세상일에서 손을 떼고 서화에만 전념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1889년 유배에서 풀려나온 후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한다. 먼저 호를 '설봉(雪峰)'에서 '백련(白蓮)', 이름을 '운영(運永)'에서 '운영(雲英)'으로 바꾸고 철저히 은둔 서화가로서 삶을 시작한다.

지운영의 서화 세계
 

지운영 ‘달마대사상’ ⓒ 황정수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던 만큼 지운영에게는 기숙할 곳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자신에게 그림을 배운 서화가 황철(黃鐵, 1864-1930)이 운영하던 사진관에서 한동안 머무르며 지낸다. 그러다 1892년 여행 경비가 마련되자 중국의 소주와 항주로 떠나 견문을 넓힌다.

그는 중국에서 주로 서화가들과 교류하며 서화를 배운다. 글씨에서는 한국과 달리 활달한 필체를 배우는 한편 그림에서는 한국의 남종화에서 벗어나 북종화의 화려한 산수화를 배운다. 달마(達摩)선사 등 고사를 소재로 한 인물화에도 관심이 많아 그 분야에 연구를 많이 하였다. 그 중에서도 중국인들이 소동파를 그린 '동파선생입극도(東坡先生笠屐圖)'를 보고 느낀 바 있어 수없이 임모하며 배운다.

또한 그곳에서 전문적으로 '도교(道敎)'도 익힌다.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에 의하면 당시 고종의 명으로 도교를 배워오게 하였다고 한다. 지운영은 중국 강소성 용호산에서 도교를 배운다. 용호산은 중국 도교의 큰 줄기인 정일교(正一敎)의 진산이었다. 지운영은 도교에서 기리는 '장천사상(張天師像)'을 가지고 와 경기도 양평 용문산에 도관을 세우고 상을 봉안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지운영은 한국에 돌아와 화가로서 활동하며 '동파입극도'를 자주 그렸는데, 한국 미술사에서 '동파입극도'를 가장 많이 그린 화가일 것이다. '동파입극도'는 소동파가 혜주(惠州)로 귀양 갔을 때, '갓 쓰고 나막신 신은 평복 차림의 처연한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지운영은 세상의 일에서 밀려나 세상을 주유해야만 하는 자신의 모습을 소동파에 빗대어 표현하였을 것이다.

서화가로서 활동하던 지운영은 세상에의 욕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는지, 1895년에 상소문을 올려 재기를 꿈꾸었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이후 다시는 세상의 일에 욕심을 내지 않고 시와 그림에만 몰두하며 지낸다. 특히 당시 서화계의 어른이었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과는 유난히 가까이 지냈는데, 서로 사상도 맞고 사는 곳도 멀지 않아 친하게 지냈다.

오세창과의 인연으로 지운영은 서화계와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1921년 서화협회 정회원으로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에 출품하였고, 1922년에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산인탁족도(山人濯足圖)'를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전람회의 심사위원 차별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후에는 불참하였다. 이렇듯 그는 늘 비주류의 삶을 살았다.

지운영과 황철, 그리고 스나가 하지메의 인연
 

황철·지운영 ‘절필산수’ ⓒ 국립중앙박물관


지운영은 후배 서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김용진, 황철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평안도 지역의 화가인 반돈식, 송기근, 여성화가인 김석범 등 여럿이 지운영의 제자이다. 아들 지성채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거의 같은 그림을 그렸다. 이들은 대부분 지운영 특유의 습윤한 산수화를 본받아 그렸다.

제자들 중 특히 황철과 가까웠는데,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데다 배포가 맞아 친구처럼 지냈다. 이들 사이엔 만나서 죽어 헤어질 때까지 하늘이 내린 특별한 인연이 있다. 황철은 지운영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지운영은 황철의 본명 '준성(濬性)'을 '철(鐵)'로 바꾸어주고, 자를 '야조(冶祖)'라 지어주었다.

두 사람은 늘 가까이 하였는데, 황철이 아관파천에 연루되어 일본에 망명 갔을 때에도 지운영이 자주 들러 함께 하였다. 황철과 지운영이 일본에 있을 때에는 주로 일본인 스나가 하지메(須永元, 1868-1942)의 집에 머물렀다. 스나가 하지메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한국인과 많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스나가 하지메는 당시 서구 문명의 도입을 주장한 유명한 계몽 사상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개화된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류를 하며 한국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옥균과 박영효를 시작으로 많은 한국인과 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스나가 하지메는 한국을 자주 드나들기도 하였는데, 한국에 건너왔을 때에 주로 박영효의 집에 머물렀다. 이후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에 갈 경우 스나가 하지메의 집에 머물며 교분을 나누고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황철, 우범선뿐만 아니라 오세창, 김응원, 이한복 등도 스나가 하지메의 도움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황철은 말년까지 스나가 하지메의 집에 머물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죽기 전에 스나가 하지메 집안의 선영이 있는 곳에 자신을 안치해 달라고 마지막 부탁을 한다. 그만큼 황철과 스나가 하지메의 우정은 남달랐다. 이러한 스나가 하지메와 황철의 우정은 황철이 죽고 난 이후에까지도 이어지는데,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비장한 이야기가 전한다.

스나가 하지메는 황철이 망명하자 경제적 후원을 하고 마음껏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런데 마침 황철이 대작 산수화를 그리던 중 완성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이를 안타까워 한 스나가 하지메는 서울을 방문할 때 미완성의 이 작품을 가지고 와 지운영을 찾아가 작품을 마무리해 주기를 부탁한다. 지운영은 흔쾌히 받아들여 황철이 죽은 지 두 돌 되는 날에 맞추어 작품을 완성하고, 1248자에 이르는 장문의 화제를 써 넣는다.

이 작품은 황철이 그리기 시작하였으나 완성은 지운영이 하였다. 그러나 어느 부분이 누가 그렸는지 도저히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는 두 사람이 서로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이루어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만치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까지 헤아릴 만큼 한 몸이었다. 지운영이 쓴 화제 속에는 두 사람 간의 절절한 인간관계가 눈물 날 정도로 절절하게 적혀 있다. 이는 그림뿐만 아니라 시에도 능한 지운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미술사에서는 '지운영'이란 서화가에 대해 그리 큰 비중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저 옛 그림들을 임모하면서 기량을 길렀으며, 산수 인물을 잘 그렸다는 정도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중국풍이 짙은 화풍은 독창적인 화풍을 형성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완성도 면에선 다른 전문 화가들에 못지않았으며,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단지 서화에만 충실했던 다른 서화가와 달리, 시에 뛰어났으며 사진술과 도교∙무술 등 다른 방계 활동에도 뛰어난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이런 면에서 지운영은 새롭게 관심을 가져 볼 만한 뛰어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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