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래빗

조조 래빗 ⓒ 월트 디즈니 코리아

 
주디스 리치 해리스가 쓴 <개성의 탄생>은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부모나 유전적 성향이 아니라는, 우리가 평소 가진 고정관념과 다른 주장을 편다. 관계 체계-사회화 체계-지위 체계로 이루어진 '집단 사회화' 과정이 가장 크고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이다.

즉 학교에서 '왕따' 등 괴롭힘을 당했을 때 '가정'이나 '부모'의 위로보다는 '학교' 환경을 바꾸어야 심리적 기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성장하는 아이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이 아이에게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국가사회주의가 극을 향해 치달아 가는 '나치' 체제 속에 살아가는 열 살 아이라면 어떨까?

여기 히틀러의 오른 팔이 되고 싶어 몸살을 겪는 열 살 소년이 있다. <조조 래빗>의 주인공 조조 베츨러다. 영화 <조조 래빗>은 2차 대전 말기 한창 히틀러에 빠져있는 열 살 소년 조조(로먼 그리핀 데이비스 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조조 베츨러는 드디어 독일 소년단에 입단해 캠프에 가게 되어 설렌다. 아직 스스로 신발끈조차 묶지 못하는 아이지만 이젠 어엿한 히틀러의 남자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떠 있다. 

전쟁에 나갔다 '실종'된 아버지, '부재'한 누나, 이제는 오로지 엄마와 소년 둘 뿐인 가정. 그럴 수록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남자로 성장하고픈 욕구에 휩싸이는 소년은 그 '욕구'를 '히틀러'로 내재화한다. 소년은 히틀러가 마치 자신의 첫 번째 소울 메이트라도 되는 양 마음을 나눈다. 

하지만 소년은 욕망을 내뿜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캠프에서 그 누구보다 용감하고 싶었지만 토끼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조조는 우스꽝스런 별명을 얻었고, 소울메이트 '히틀러'의 독려 아래 '용감함'을 드러내고 싶었지만 명예롭지 않은 상흔만을 남겼다. 

한없이 절망한 소년 조조는 전단지 붙이기 등의 '임무'로 겨우 상처입은 자존심을 달래던 중 '괴물'처럼 여기던 '적' 유태인을 발견한다. '안네 프랑크'와 같은 처지의 소녀, 그 유태인을 당장이라도 고발하고 싶지만, 그러면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엄마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 '자기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조조 래빗>은 '어른 남자'가 되고픈, 그것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충만한 열 살 소년이 처한 전쟁 말기 독일의 상황을 아이의 눈으로 그려낸다. 마치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수용소에 끌려간 아버지 귀도와 아들 조수아가, 아버지 귀도에 의해 수용소를 단체 게임처럼 여기듯이. 이미 패전의 기운이 역력하지만 여전히 '히틀러' 세계관에 사로잡힌 소년 조조 눈에 세상은 '히틀러 만세(하일 히틀러 heil heitler)'의 판타지가 펼쳐진 공간이다.

엄마가 조조를 지키는, 사랑하는 방법 
 
 조조 래빗

조조 래빗 ⓒ 월트 디즈니 코리아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전히 잔혹 동화같은 세상 속에 젖어있는 아들을 지켜보는, 그리고 지키는 엄마의 행동이다.  

엄마에게 이제 남은 가족은 조조 한 사람뿐이다(아빠는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그 '귀로'의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그래서 엄마는 '안네 프랑크'같은 소녀와 조조 두 사람 중 선택을 하게 되어야 한다면 조조를 선택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 남은 아들 조조에게 집착하진 않는다. 그는 조조를 보호하려 안달복달하지 않는다. 이제 겨우 열 살 먹은 아이가 '정치'에 매달리는 게 안쓰러울 뿐이다. 

그러나 엄마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조조에게 '사상'을 강요하지 않는다. 조조가 가진 그릇된 세계관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소년단 캠프를 가고 싶다면 보내주고, 부상당해 좌절한 조조를 데리고 소년단 사무실을 찾아가 아들의 용기를 북돋아줄 그 무언가를 해줄 것을 독촉한다. 아니 엄마는 지금 상황에서 그것이 가장 안전한 보호 방식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대신 엄마는 경직된 사고로 굳은 조조의 머리 속에 유연한 생각들을 심어주려 애쓴다. 열 살 아이다운 즐거운 일들, 뱃속 가득 나비가 날갯짓을 하는 듯한 사랑에 대한 감정 등등. 그리고 조조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기 보단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독려한다. 푸른 하늘, 아름다운 자연과 같은 그런 것들 말이다. 왜곡된 사상을 가진 조조를 치유하는 길은 설교와 교정이 아니라 잃어버린 감정을 소환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엄마는 생각한다. 

그래서 엄마는 자신이 '못생겨졌다'며 집에 틀어박힌 조조가 집 밖으로, 세상 속으로 한 발 내딛을 수 있게 독려한다. 아버지도, 누나도 없는 집에서 엄마는 기꺼이 그 모든 가족의 역할을 다하며 조조가 위축되지 않게 미소와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불안한 세상에서 아들을 부둥켜안고 두려움에 떠는 대신, 그 불안하고 불온한 세상을 어서 빨리 없애기 위해 기꺼이 나선다. 엄마의 행동으로 인해 조조는 '안네 프랑크'와 같은 소녀를 만나게 되고, 그 '소녀'로 인해 자신이 믿었던 '히틀러' 세상이 조금씩 무너져 간다. 결국 그 스스로 그 '허상'을 거뜬히 극복한다. 조조가 겪는 성장통, 그걸 이겨내는 힘의 근원은 결국 '엄마'가 펼쳐보인 삶이다. 
 
 조조 래빗

조조 래빗 ⓒ 월트 디즈니 코리아

 
<인생은 아름다워>의 아버지 귀도가 마법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들 조수아를 지켜내듯이, 광기만이 질주하는 전쟁 말기 히틀러 세상에서 마치 마법사와도 같았던 엄마의 모습은 소년을 성장하게 만든다. 엄마가 없는 세상에서도 누나같은 소녀를 지켜낼 수 있도록 말이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아버지처럼 또 하나의 '동화'를 만들어낸 엄마의 사랑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치 시대를 소재로 하여 또 다른 명작이 나올 수 있을까 싶었다. 그만큼 이 시대를 소재로 한 이야기는 넘쳐나고, 수작과 명작 또한 많다. 그러나 <조조 래빗>은 또 한 편의 아름답고 처연한 '동화'를 구현해 낸다. 광기의 시대는 적나라하고, 그 시간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은 무기력하다. 그러나 그 무기력함을 이겨낼 수 있는 것 또한 사람이다. 나치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보인 모성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광기어린 세계관의 노예였던 소년이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은 '휴머니즘'의 또 다른 장을 연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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