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창령 영산 만년교는 경남 창녕군 영산면 (慶南 昌寧郡 寧山面)에 위치한 조선 정조 4년(1780)에 처음 건립되었다. 마을 실개천 위에 무지개 형태로 지어놓은 돌다리다. 영산면을 감싸고 도천면(都泉面)으로 흐르는 영산천을 지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실개천이 남산에서 흘러내린다 하여 '남천교(南川橋)'라고도 불렸다. 1972년에 보물 제564호로 지정되었다.

만년교 '정밀실측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고종 29년(1892)에 다시 중수한 이후에는 지금의 이름인 만년교로 불렸다고 한다. 만년교는 1칸의 홍예로 구성되어 있는 단경간 홍예교로 2010년 해체보수 과정에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당시 영산면과 도천면을 잇는 통로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는데, 지금은 영산면내와 남산호국공원을 연결하는 인도교의 역할만을 하고 있다.
 
만년교(사진=문화재청)
 만년교(사진=문화재청)
ⓒ 심연홍

관련사진보기

  
옛 영산현, 현재의 영산면 남쪽에 위치한 함박산 산맥이 끝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산읍성 남문과 1리 거리(400m)에 있어 지리적으로 마을과 가장 인접한 다리다. 만년교는 민간에서 지은 단칸 홍예교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로 자연암반을 이용하여 상부 선단석 위에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홍예틀을 만든 뒤, 자연석을 쌓아 만들었다.

상판의 경우 귀틀석과 같은 석재 없이 진흙으로 마감하였고, 바닥 중앙이 가장 높고 가장자리가 낮은 곡면을 그리고 있다. 또 옛 다리의 경우, 잡귀의 침입과 재앙으로부터 보호받고자 동물 등의 얼굴을 조각하거나 용두석(龍頭石)을 설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만년교는 이러한 것들이 설치되지 않은 소박하면서 간결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홍예상부 위로 쌓은 석축(사진=문화재청)
 홍예상부 위로 쌓은 석축(사진=문화재청)
ⓒ 심연홍

관련사진보기

   
만년교에는 처음 건립할 때 세운 남천석교비, 중건 때 세운 석교중건비 그리고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만년교비 총3개의 교비가 현존하고 있다. 건립당시의 비인 남천석교비의 내용을 간추려본다.

 "지금 고을의 남쪽에 있는 계곡은 마을을 감싸고 흘러가 읍터의 수문이 되고 잇으며, 대로가 그 위로 자리잡고 있다. 이 길은 사신이 공물을 바치러 지나가는 터라, 이 때문에 예로부터 나무를 얽어 다리를 만든 것이 아주 오래전부터였다. 그러나 물이 넘쳐 다리가 무너져 늘 건너기가 어려운 병폐가 있었다.

하루는 고을의 백성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다리를 오래 견딜수 있는 계책으로는 돌로서 다리를 만드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백성들로서는 물을 건너지 못할 근심이 없어지게 되었고 고을에서는 물을 진압할 방법이 있게 되었으며, 이는 돌은 천년이 지나도록 변치 않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무지개 모양으로 깎았는가? 옮길 수 없게 하려는 것이니, 그 공을 알 것이다."

 
창건비(사진=문화재청)
 창건비(사진=문화재청)
ⓒ 심연홍

관련사진보기

 
이처럼 창령 영산 만년교는 창건비와 중건비가 남아 있어 축조연대와 등을 상세히 알 수 있으며, 조선 후기 남부지방의 홍예교 구축기술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로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홍예석과 측벽의 자연스러운 조화가 아름다운, 소박하지만 독특한 조형미를 보여주며 현재에도 영산면내와 영산호국공원을 잇는 가교로 꾸준히 이용되고 있다.

뉴스제작팀 심연홍기자
yhhtree@hanmail.net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CPN문화재TV에도 실립니다.


태그:#보물, #문화재, #만년교, #창령영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CPN문화재TV 심연홍기자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