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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양 여운형
몽양 여운형도 일제 말 학도병 지원을 권유했다?

최근 일부 언론이 일제 강점기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에 실린 '일제학병 권유문'을 근거로 여운형의 친일의혹을 제기했지만 애초 기사 자체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넷신문 <데일리NK>는 지난 2일「여운형 '일제 학병 권유문' 찾았다」는 기사를 통해 여운형이 1943년 일본을 찬양하고 학도병 지원을 권유하는 글을 경성일보에 실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1944년 발행된 <반도학도출진보(半島學徒出陣譜)>에 다시 수록된 이 기사를 발굴, 여운형의 친일행적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조선닷컴>과 <업코리아>도 같은 날 오후 이 기사를 인용 보도했다.

<경성일보> 기자 "여운형 뜻과 상관없이 조작"

그러나 <반도학도출진보>에 수록된 경성일보 기사에 대한 조작 가능성은 계속 제기돼 왔다. 우선 주목할 것은 해방 직후인 1946년 2월 13일자 <민주중보(民主衆報)>에 실린 조반상(趙半相)의 증언이다.

1943년 <경성일보> 사회부 기자로 근무했던 조반상은 여운형과 일본인 기자가 만나는 자리에 자신도 있었으며 여운형의 뜻과 상관없이 기사가 조작됐다고 증언했다.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학병 권장 유세를 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건강문제를 핑계로 거절한 뒤 총독 면담 6∼7분만에 밖으로 나왔다. 경성일보 사회부 차장이던 일본인 기자가 이 모습을 보고 여운형 집에 쫓아가 여운형의 총독회견 기사를 냈다. 그 다음날 다시 여운형을 찾아가 학병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이때 나는 통역으로 동석했다.

여운형은 '학병은 지원제도이므로 나가고 안 나가고는 본인들의 의사에 달려있고 나로서는 의견을 말할 바가 못 된다'며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일본인 차장이 여운형의 서명을 받고 싶다고 하자 여운형이 서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사실무근의 기사가 나갔다."


민주중보의 전신은 일제 시기 일본어로 발행되던 <부산일보>. 이 신문은 해방 후 노동자들이 접수해 1945년 9월 1일부터 우리말로 발행했으며, 같은 해 9월 20일 민주중보로 제호가 바뀌었다.

조만식의 '학병지원 권유문'도 "이름 도용됐다"

저명한 독립운동가 중 기사에 이름이 도용됐다는 증언이 나온 것은 여운형만이 아니다. 고당 조만식도 같은 일을 겪었다는 증언이 있다.

'한국의 간디'로 불린 조만식은 물산장려운동을 펼쳤으며 1943년에는 조선군사령관이던 이타가키의 지원병제도 협조 요청을 거절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총독부의 한국어판 기관지 <매일신보> 1943년 11월 16일자에는 「학도에게 고한다」는 제목의 학병지원 권유문이 조만식의 이름으로 실렸다.

그러나 친일문제 연구가 김삼웅(현 독립기념관장)은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에서 이 글이 매일신보 평양지사장에 의해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 당시 매일신보 평양 특파원으로 근무한 김진섭이 쓴 「조만식 선생 인터뷰 조작기사 쓴 평양지사장 자살(대한언론인회보, 2000년 9월 1일자)」이라는 글을 제시했다.

"고영한 지사장이 내게 고당 선생을 취재해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선생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겠나' 하시곤 함구했다. 지사로 돌아와 '안 계시더라'고 허위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고 지부장이 직접 나섰고 사흘쯤 뒤 인터뷰 내용이 신문에 실렸다. 아무리 뜯어봐도 조작 기사였다.

광복 후 고 지사장에게 함께 상경하자고 권했더니 내일 아침에 만나자고 해서 헤어졌다. 다음날 새벽에 찾아갔더니 지사장 어머니께서 '우리 애가 어젯밤 자살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뚜렷한 이유를 모른다고 했지만 며칠 뒤 소문이 돌았다. 지사 직원 중 한 사람이 고 지사장을 평소 친일파로 몰아세워 괴로워했을 뿐 아니라 고당 선생의 인터뷰 조작 사건으로 많이 자책하는 것을 보았다는 주변의 이야기들이 무성했다."


'건국동맹' 등 비밀결사 조직하면서 학병 권유?

경성일보 기사가 실렸을 당시 여운형의 행적도 살펴볼 만하다. 여운형은 1942년 말 '일본은 승리하기 어려워졌으며 조선 독립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1943년 7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11월말 경기 양주군의 봉안 이상촌으로 내려간 여운형은 훗날 건국준비위원회 모태가 되는 건국동맹(1944년 8월)과 농민동맹(1944년 10월)을 조직해 독립을 준비했다. 비밀결사이던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은 일제 말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활동했던 독립운동 조직이다. 여운형의 이런 행보는 친일활동으로 돌아섰거나 '침묵'으로 일관한 다른 유력 인사와 구분된다.

이를 감안할 때 일찍부터 일제의 패전을 예측하고 구체적으로 독립 준비를 펼치던 여운형이 같은 시기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글을 신문에 게재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여운형은 학병 지원을 권장하는 유세를 하라는 총독부 요구를 수 차례 거절했으며 김성수나 윤치영 등과 달리 친일단체 간부를 맡은 일도 없다.

여운형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시인 이기형의 <여운형 평전>에 따르면 여운형 본인도 경성일보 기사가 사실이 아니라고 밝힌 것으로 나와 있다. 1943년 겨울 여운형이 머물던 경기 양평군 봉안에 "여운형을 평상시 숭배했다"는 낯선 중년신사가 경성일보를 들고 찾아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졌다.

이에 여운형은 "내 사람됨에 대한 것을 참으로 알고자 한다면 나를 평하는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라는 말이 있다"고 말한 뒤 "나 자신의 정당성 여부가 문제이지 참새들의 입방아는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라고 답했다는 것. 이기형은 "경성일보를 만드는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니 그들의 여운형에 대한 기사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답변이었다"고 전했다.

미 군정도 증거 못 찾아... '여운형 친일의혹' 주장은 친일파 단골메뉴

여운형이 친일행적을 남겼다는 주장은 이번에 처음 제기된 게 아니다. 해방공간(1945∼1948)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되자 미 군정은 여운형의 친일활동 여부를 조사했다. 미 군정은 일본에까지 사람을 보내 역대 조선 총독 및 일본 패전 당시 정무총감이던 엔도를 비롯 총독부 고위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었다.

그러나 미 군정은 여운형이 친일 인물임을 입증할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와 반대로 '여운형은 반일적 인사였다'는 증언을 들었다. 당시 미 군정 기록에 따르면 엔도 전 정무총감은 "여운형은 '강한 민족주의자', '순수한 민족주의자'며 일본관리 중에서 송진우나 김성수를 좋아하던 이들은 여운형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특히 '여운형은 친일파'라고 목소리를 높인 이들은 주로 친일 행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한민당 계열 인사나 친일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중 여운형에게 친일의 올가미를 씌우는 데 누구보다 앞장선 것은 '악질 친일파'로 유명했던 이종형. 좌파 중에도 여운형에게 비판적인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들은 여운형을 거세게 비판하면서도 이른바 '친일' 논란을 비판 대상으로 삼은 적은 거의 없다.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가 펴낸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1>에 따르면 이종형은 일제 때 동만주 및 연길 일대에 주둔한 '토벌군' 사령부의 고문 겸 재판관으로서 한국인 혁명투사 250여명을 투옥시킨 인물이다. 해방 뒤 제헌의회에서 제정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법'을 파괴하는 데 앞장서다가 반민특위 법정에 서기도 했다.

이종형이 1945년에 창간한 <대동신문>에는 여운형이 친일활동을 했다는 기사가 많이 실렸다. 앞서 소개한 조반상의 증언이 민주중보에 게재된 것도 1946년 2월, 수 차례 관련 기사를 실은 대동신문의 '공작'이 근거 없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한민당에 적을 둔 다른 친일파들도 대중적 인기가 높던 여운형을 견제하기 위해 친일의혹을 제기했다. 미 군정이 여운형의 친일활동 여부를 조사한 것도 여운형이 공산당에게 뭔가 약점이 잡혀 있는 것 같다는 추측뿐 아니라 미군정과 밀착한 친일파의 지속적 공작과 관련됐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여운형은 '친일파'라는 정치공세에 이어 집중적인 테러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해방 2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여운형에게 가해진 테러는 10번이 넘는다. '이승만과 이종형을 존경하는 청년들'이라고 밝힌 6명의 청년들에게 "나는 조국에 적대되는 일을 했음을 인정하며 일체의 사회활동을 포기하고 은퇴할 것을 맹세한다"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당한 경우도 있다. 여운형은 결국 1947년 7월 19일 한 우익청년에 의해 암살됐다.

여운형은 항일, 동생 여운홍은 친일
엇갈린 형제의 운명... 여운홍, 친일사전 1차명단 포함

지난 8월 29일 발표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에는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도 포함돼 있다. 여운홍은 일제 때 항일에서 친일로 말을 바꿔탄 경우이다.

1918년 미국 우스터대학을 졸업한 뒤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해 의정원(현재 국회) 의원이 된 여운홍은 같은 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1920년 국내로 돌아와 보성전문학교 영문학 교수(1922~1925)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한 뒤 조선인 통제를 강화하고 전시체제로 이행하면서 여운홍은 시국강연과 친일 논문을 통해 부일협력 활동을 하는 방향으로 변했다. '1차 명단'에 포함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해방 후 형인 여운형이 만든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하던 여운홍은 1946년 탈당한 뒤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이와 관련,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는 여운홍의 탈당을 미 군정이 벌인 분열공작의 산물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여운홍은 그 뒤 4.19 후 치러진 총선에서 참의원에 당선됐다가 5.16 군사반란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963년엔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고문에 추대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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