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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할아버지가 되었다. 아들 부부가 딸을 낳았지만, 손녀를 만날 수 없었다. 오직 사진으로만 만날 수 있었다. 멀리 지방이나 해외에 사는 것도 아닌데 손녀를 만나지 못한 건 코로나19 때문이었다.

코로나19가 발생하자 병원은 면회를 제한했다. 분만실에 함께 들어간 아들 외에는 그 누구도 병원에 들어갈 수 없었다. 분만 후에도 핸드폰 메시지로 전해오는 사진으로만 아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며느리에게 고생 많았다는 말도 전화로만 할 수 있었다.

CCTV로만 볼 수 있었던 손녀

산후조리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부부도 사돈 내외도 면회가 안 되었다. 오직 CCTV로만 손녀를 볼 수 있었다. 조리원에서 퇴원할 즈음에는 코로나19가 크게 퍼질 조짐까지 보였다. 내 직장 바로 옆 건물에서 확진자가 나왔고 나도 가끔 이용하던 식당에 그 확진자가 들렀다는 소식도 들렸다. 세상이 뒤숭숭해졌다.

우리 부부는 손녀가 조리원에서 퇴원하더라도 만나는 것을 미루기로 했다. 적어도 '삼칠일' 지나서 만나자고 마음먹었다. 우리 부부가 유난을 떤 것일까. 과거 감염병이 유행하게 된 배경을 보면 개인의 부주의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 '나와 내 주변은 괜찮겠지'라는 근거 없는 낙관이 전염병의 확산을 부추기곤 했다. 이번 코로나19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가 퍼지자 병원들은 면회를 제한했다
▲ 면회 제한 코로나19가 퍼지자 병원들은 면회를 제한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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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종교 집단을 중심으로 크게 번지자 우리 사회는 불안이 점점 더 커졌다. 시민들은 주변을 경계했다. 나부터 예전과 다름을 느끼며 산다. 우선 모임을 줄였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친구들과 혹은 일 때문에 술자리를 갖곤 했는데 지금은 핸드폰 메시지로만 안부를 나눈다. 대신 집에 일찍 들어와서 반주를 곁들인 저녁을 먹으며 뉴스를 본다.

코로나19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우리 가족은 드라마나 예능보다는 주로 뉴스를 보게 되었다. 한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퍼졌지만, 그 기세가 언제 어떻게 다른 지역으로 퍼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평소 내가 뉴스만 틀면 방으로 들어가던 아내도 새로운 소식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오래도록 준비한 계획이 깨지기도 했다. 사실 우리 부부는 2월 마지막 주말에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었다. 그즈음이 장모님의 팔순이어서 미국에 사는 처남까지 함께 가는 여행을 준비했었다. 아내가 그 모든 숙박과 교통편을 다 예약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퍼지는 양상은 그 어떤 형태의 모임이라도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남이 미국에서 출발하려고 공항에 가니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탈 수 있지만, 다시 미국에 들어오는 건 장담할 수 없다"라는 항공사의 말에 처남은 발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 이튿날인 지난 2월 29일 미국은 한국에 대한 여행 경보를 '3단계인 여행 재고'를 유지했지만, 대구 지역을 최고 단계인 '4단계 여행 금지'로 격상했다.

처가댁 어른들은 가족 모임을 취소한 건 이 시국에 당연했다고 서로를 위로하셨지만, 일요일에 교회를 못 가는 상황까지 된 것에는 충격을 받으셨다. 서울 강남의 한 대형교회에서 장로와 권사로 오래도록 봉사하시다가 은퇴하신 두 분은 '주일성수'를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으셨다. 그런데 주일예배가 취소되었다니. 코로나19의 심각함을 여실히 느끼신 듯했다.

한 달 만에 손녀를 만나는 날

3월이 되고 손녀가 태어난 지 삼칠일이 지났다. 우리 부부는 한 주만 더 참기로 했다. 태어난 지 4주가 지나 신생아를 졸업할 때 아들 내외 집에 가기로 했다. 물론 그 전에도 아들과 며느리는 손녀 보러 오라고 했었다. 하지만 이 시국이 초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조심성에 불을 붙였다. 조심한다고 해서 나쁠 게 없지 않은가.

지난 일요일인 3월 8일에 아들 내외와 손녀가 사는 집에 다녀왔다. 첫 상봉을 위해서 우리 부부는 몇 가지 준비를 했다. 아내는 금요일부터 외출을 삼갔고 나는 회사에서 동료들과의 접촉을 피했다. 다행히 내 공간이 뚝 떨어져 있어서 그럴 수 있었다.

일요일에 입을 옷도 미리 세탁하거나 최근에 입지 않았던 옷들로 준비를 했다. 혹시 몰라서 손톱도 짧게 잘랐다. 포장을 뜯지 않은 KF94 마스크와 손 소독제도 준비했다. 개인위생을 평소보다 엄격히 신경 쓰게 되는 요즘이다.

집에 들어선 우리 모습을 본 아들은 크게 웃었다. 마스크를 왜 계속 끼고 있냐면서. 우리 부부는 손부터 씻었다. 그런 다음에야 손녀에게 다가갔다. 마스크는 낀 채로 거리는 좀 두고서.
  
기자가 손녀를 처음 만난 날. 기자는 마스크를 끼고 손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 첫 만남 기자가 손녀를 처음 만난 날. 기자는 마스크를 끼고 손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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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는 살짝 지쳐 보였지만 행복해 보였고, 손녀는 엄마 품에서 젖병을 힘차게 빨고 있었다. 아기는 생각보다 작아 보였다. 하지만 아들은 아기가 몸무게도 늘고 키도 컸다고 했다. 아, 더 작았었구나. 그 작은 모습을 놓쳤다고 생각하니 코로나19가 야속했다.

우리 부부는 계속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손녀는 눈으로만 어루만졌다. 사진으로만 봤을 때는 잘 몰랐었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 실감이 확 났다. 똥 냄새와 오줌 냄새를 맡아보니 더 그랬다. 아, 내가 진짜로 할아버지가 되었구나.

아기 키우는 이야기를 하다가 대화 주제가 코로나19로 향했다. 병원에서 일하는 아들은 이번에 공중보건의사로 임관하는 후배와 선배가 있는데 모두 대구로 투입된다고 했다. 병원 음압 병상에는 다른 지역에서 온 확진자가 치료받고 있다고도 했다. 코로나19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의 일상 한켠에 우리도 모르게 들어와 있었다.

신종 인플루엔자와 메르스 때도 그랬지만 감염병이 번지면 걸린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상황이 되고 공동의 해결책이 요구된다. 이렇듯 감염병은 개인의 일이 집단의 관심사가 되고, 집단에 닥친 사건 때문에 개인들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이 감염병을 더 크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현장에서 헌신하는 의료진들, 고군분투하는 관계자들, 생업을 팽개친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그들 모두를 응원하는 우리 시민들이 있기에 이 유행을 조만간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모든 코로나19 확진자와 격리자의 건강한 귀환을 기원한다. 모든 의료인과 관계자의 헌신에 진심 어린 감사와 응원도 보낸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응원하는 모든 이에게도 함께 이겨내자는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내 손녀는 물론 우리 모두의 후손들에게는 코로나19가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사라질 감염병이 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강대호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코로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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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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