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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이 3일 같은 당 의원 12명과 함께 '민주화운동보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전 의원은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가 민주화 운동으로 결정한 사건 가운데 사실 왜곡 소지가 있었는지를 철저히 재심의할 필요가 있다"며 1989년 5·3 동의대 사건을 대표적인 예로 꼽았다.

전 의원은 이 사건을 "진압하러 들어간 경찰관 7명이 학생들에 의해 무참하게 불태워져 처참하게 살해된 극악한 사건"이라고 주장했고, 조중동 등 보수언론들이 그의 주장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사건의 모든 책임을 학생들에게만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이 당시 관련자 및 변호인단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20년 전 동의대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오마이뉴스>는 현장 취재 및 20년 전의 기록(법정 진술 및 수사기관 발표문, 국회 속기록, 언론보도 등)을 토대로 4회에 걸쳐 1989년 동의대 사건의 진상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동료를 구하려는 경찰에게 시너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진 것은 일종의 화형식이었다고 봅니다."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이 3일자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지난달 25일 블로그에 쓴 글에서는 "진압하러 들어간 경찰관 7명이 학생들에 의해 무참하게 불태워져 처참하게 살해된 극악한 사건"이라고 1989년 동의대 사건을 규정했다.

 

보수 성향의 양영태 국민행동본부 부본부장도 같은 날 "공무집행 중인 경찰 7명을 불태워 죽인 동의대 범법자들이 민주열사로서 보상까지 받아야 했던 암울한 사실을 보고도 집권당인 한나라당은 왜 지금까지 한마디 말도 없는 것인가?"라고 전 의원의 주장에 동조했다.

 

전 의원은 학생들이 고의적으로 던진 화염병이 경찰들의 사망으로 이어진 것처럼 얘기했다.

 

그러나 <오마이뉴스>가 1989년 6월 1일 검찰의 수사발표문을 확인해보니 희생자 7명의 사인은 다음과 같았다.

 

최○○(35·경장·추락사)

정○○(27·순경·추락사)

조○○(25·순경·추락사)

김○○(22·상경·추락사)

박○○(29·순경·소사)

모○○(23·수경·소사)

서○○(24·수경·소사)

 

그해 5월 3일 새벽 5시경 이들은 전날 시위대로 위장하고 '검거' 활동을 벌이다가 학생들에게 붙잡힌 동료 경찰들을 구하려고 동의대 중앙도서관에 들어갔다가 건물 7층에서 일어난 원인불명의 폭발이 있은 후 생명을 잃었다. (화재원인에 대한 얘기는 다음 회에 다루기로 한다.)

 

전여옥 의원은 "경찰 화형식" 규정... 그러나 과반수는 추락사

 

그러나 7명 중 4명의 사인은 각각 '심장파열', '양폐 파열', '두개골 골절' 등으로 나왔다. 건물이 폭발한 후에도 사망자 중 4명이 생존해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게 됐을까?

 

<오마이뉴스>가 최근 입수한 동의대 사건 공판 증인들의 진술서와 국회 속기록을 보면, 이들은 7층에서 폭발이 있은 후 상당 시간 동안 남쪽 창틀에 매달려 있었는데 경찰은 이들이 줄줄이 떨어지는 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동의대생 김모(철학과 4년)씨는 1989년 9월 5일 법정에서 "(경찰들이) 창틀에 매달린 뒤 3~4분 후에 1명이 떨어지고 또 5~7분 경과 후 2번째 전경이, 또 5~7분 뒤에 3번째 전경이 떨어졌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오랫동안 (경찰이) 그물과 매트리스를 가져오지 않고 어정쩡하게 있었다. 3명이 떨어질 때까지 그물도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8층에 백골단이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커튼 같은 걸로 구출할 수도 있지 않았냐"는 변호인의 질문에 "그 상황에서 매달린 전경을 보고만 있었다"고 덧붙였다.

 

당시 통일민주당 진상조사단 간사를 맡았던 김광일 의원(훗날 김영삼 정부의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냄)도 같은 달 26일 국정감사에서 "경찰 4명 중에 첫 사람이 창문에 매달려 있다가 밑에 매트리스나 그물을 가져오도록 고함·소리를 지르는 동안에 학생들은 오히려 떨어질까봐 '경찰 힘내라'고 소리를 질렀다는데 첫 사람이 떨어진 것이 3~5분, 그 후에 다시 떨어진 것이 7~10분, 그 다음에 네 번째 사람은 11~15분만에 떨어졌다"고 검찰을 추궁했다.

 

"경찰 힘내라"고 외친 학생들 - 매달린 전경 지켜본 백골단

 

당시 경찰이 작성한 '진압작전 계획안'에는 경찰이 2개 중대를 동원해 도서관 전면과 학생회관 측면 등에 투신에 대비해 매트 8장과 그물 7개를 설치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학생들의 변호인단은 "이 정도로는 건물의 한쪽 면조차도 제대로 방비할 수 없는 양"이라고 지적했다.

 

그나마 경찰은 안전장비와 인력을 도서관 정문에 배치하고 있었고, 전경 3명이 건물 측면에서 연달아 추락한 뒤에야 그물을 펼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들이 추락한 7층은 지상 약 20m 높이였다. 그러나 그물로는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입는 충격을 제대로 흡수할 수 없었다. 실제로 네 번째로 추락한 최○○ 경장의 사인은 '심장파열'로 판명됐다.

 

경찰은 대학생 김씨가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매트리스와 그물을 함께 설치했고, 그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도서관 밖에서 경비를 섰던 전경 문모씨는 추락현장에 그물과 매트리스를 설치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법정에서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그는 "4번째 전경이 떨어질 때 경황이 없어 (매트리스 없이) 그물만 가져갔냐"는 변호인단의 물음에 "그렇다"고 시인했다.

 

사망 직후 경찰 기동대 이례적 집단행동... "무모한 진압" 비판

 

당시의 진압 작전에 무리가 있었다는 비판은 경찰 내부에서도 일찌감치 터져나왔다.

 

경찰들의 사망소식이 전해진 당일 오전 10시경 부산시경 기동대원 200여 명과 유족들은 부산경찰청으로 몰려와 "무모한 진압으로 경찰들이 희생당했다"며 시경국장(지금의 부산경찰청장) 퇴진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경찰청 회의실에서 간부들의 설명을 들은 뒤 해산했지만, 권위주의 분위기가 팽배했던 1980년대에 경찰들이 수뇌부를 겨냥한 집단행동을 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으로 기록된다.

 

학생들의 변호인단은 그해 10월 부산경찰청 간부 4명을 업무상 과실 치사상 혐의로 고발했지만, 1992년 2월 검찰은 이들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검찰은 "경험칙상 점거농성 학생들은 건물로 병력이 진입해 들어가는 방향 등에서 투신하는 것이 상례였고, 경찰들이 화염병에 의한 화재로 질식 상태에서 추락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추락사고 지점에 그물과 매트리스를 설치하지 않았던 것은 죄가 될 수 없다"는 이유를 댔다.

 

학생들은 참사가 발생할 것을 '알면서도' 실내에서 화염병을 투척했으므로 벌을 받아야 하지만, 경찰은 화재로 인해 추락사하는 사람이 생길 것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물과  매트리스를 설치하지 않은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게 검찰의 논리였다.

 

당시 동의대생들의 변론을 맡았던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4일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학생들에게만 비난이 집중되면서 진실이 묻혀버렸지만, 요즘 이런 일이 생겼다면 국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라며 "20년 전 동의대에서는 용산 철거민 참사때보다 훨씬 무지막지한 경찰 진압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동의대 5·3 동지회의 한 관계자도 "사망자가 모두 경찰들이어서 학생들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지만, 만약 학생 쪽에서도 인명 피해가 생겼다면 경찰 진압의 문제점도 함께 부각됐을 것"이라며 "법정에서 이 문제를 계속 제기해도 언론에서도 우리 얘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찰이 학교의 반대와 학생들의 '인질 석방' 약속을 무시하고 5월 3일 새벽 진압을 기습적으로 전개한 것도 의문으로 남는다.

 

진압 작전의 근거가 됐던 피랍경찰 5명은 전날 오후 학생 시위대에 섞여 사찰 및  검거 활동을 했던 이른바 '사복체포조'였다.

 

동의대 사건으로 수배자 생활을 했던 고범산 5·3동지회 회장은 "시위대가 교문으로 진출하려는데, 시민으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이 학생들 틈에 섞여 있었다. 우리가 '민주시민이 아닌 사람은 대열에서 빠지라'고 요구했는데도 끝까지 남은 사람들이 있어서 확인해보니 경찰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동의대 총학생회는 이들과 연행학생들의 '교환'을 요구했지만, 다음날 새벽까지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렵겠지만, 1980년대 대학가 시위 현장에서 연행자와 경찰(또는 진압장비)의 교환 협상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시위대에 전경이 끌려가거나 최루탄 발사기·방패 등 진압장비를 빼앗긴 사실이 상부에 알려질 경우 중징계를 받았기 때문에 경찰 지휘관들도 이러한 관행을 암묵적으로 따랐다.

 

당시 동의대 학생과장이었던 강모씨는 법정에서 "이병돈 총장이 이종현 총학생회장에게 '인질 전경을 즉시 석방하라'고 했고, 이종현은 '(내일) 오후 2시까지는 틀림없이 전경들을 돌려보낼 테니 총장이 경찰에 말을 잘해 달라'고 여러 번 이야기하지 않았냐?"는 변호인단의 물음에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나 박모 부산진경찰서장은 이 총장에게 당일 새벽 3시 10분경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부득이 경찰에서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경찰의 학내 진입을 통보했고, 이 총장은 "학생들의 피해가 우려된다"며 반대의사를 표명했다고 한다.

 

'1989 동의대'와 '2009 용산'은 닮은꼴

 

그해 5월 3일 새벽 동의대에 진입한 경찰은 "오후에 전경들을 풀어주겠다"는 학생들의 제의에도 갑작스럽게 진압을 강행했고, 이는 대량 인명살상으로 이어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경찰이 철거민들의 농성 개시 25시간 만에 특공대를 전격 투입했다가 6명의 사망자를 낸 '용산 참사'와 같은 일이 20년전에도 벌어진 셈이다.

 

 

1989년 정부와 국회는 동의대 사건이 터진 직후 화염병 제조·소지·사용자를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화염병처벌법'을 제정했지만,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경찰은 동의대 사건을 겪은 후 '집회·시위 현장 법집행 매뉴얼'에 시위대가 화염병을 던지는 경우 화염병 소진을 유도하고 거의 소모된 뒤 검거작전을 펴도록 규정했지만, 이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2009년 '용산'의 검찰은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경찰의 과잉진압에 '면죄부'를 줬다. 2009년 '용산'의 변호인단은 20년 전처럼 "검찰의 처사를 납득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20년의 시차가 있지만 두 사건에는 이처럼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태그:#전여옥, #동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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