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을 완화하면서 기약 없는 동면에 들어갔던 KBO가 5월 5일 개막을 확정하고 연습경기에 들어갔다. K리그 역시 이르면 같은 달 9일 킥오프에 들어갈 예정이다.

프로 스포츠는 지역 연고제로 운영된다. 그런 만큼 스포츠의 선전이 지역 경제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재난이나 재해로 상심을 입은 지역민의 마음에도 훈풍을 가져다줄 수 있다. 팀의 선전이 팬들, 나아가 지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다 주는 일종의 치유제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런 사례가 이미 KBO와 NPB, MLB에 실존한다.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고베에서 팬들의 응원을 받았던 오릭스 블루웨이브가 있고, 2003년 지하철 참사로 인해 상심에 빠진 대구에서 개막 10연승을 달렸던 삼성 라이온즈가 있으며, 2013년 폭탄 테러를 딛고 시민들에게 우승을 안긴 보스턴 레드삭스가 있다.

'힘내라, 고베!' 11년 만의 리그 우승 원동력
 
 한신 아와지 대지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과 미래 방재센터에 전시된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1995년 유니폼. 왼쪽 팔에 '힘내라 고베!' 패치가 붙어 있다.

한신 아와지 대지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과 미래 방재센터에 전시된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1995년 유니폼. 왼쪽 팔에 '힘내라 고베!' 패치가 붙어 있다. ⓒ 박장식

 
1995년 1월 17일, 일본 효고현의 최대 도시인 고베에 지진이 덮쳤다. 진도 7.3의 지진으로 인해 64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4만 4천여 명이 다쳤다. 그런 상황 속에서 당시 고베를 홈으로 삼았던 NPB 구단, 오릭스 블루웨이브(현 오릭스 버팔로즈)가 선전했다.

오릭스 블루웨이브는 '힘내라 고베!'를 구호 캠페인으로 삼았다. 팬들도, 코칭스태프도, 선수들도 똘똘 뭉쳐 고군분투했다. 물론 처음에는 "지진이 일어난 곳에서 야구를 할 수 있느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컸다. 하지만 고베 시민들이 오히려 "야구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며 야구장을 찾았다.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고베 종합운동공원 야구장에서 '힘내라 고베!' 메시지를 팔뚝에 새긴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스즈키 이치로는 뛰어난 활약으로 타격왕을 차지했고, 노다 고지는 한 경기에서 19개의 탈삼진을 뺏으며 일본 신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히라이 마사후미는 15승과 27세이브라는 불세출의 기록을 올렸다.

결국 그해(1995년) 오릭스는 지난해 리그 우승 팀이었던 세이부 라이온즈를 꺾고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84년 전신이었던 한큐 브레이브스의 리그 우승 이후 11년 만이었다. 오릭스의 오기 아키라 감독은 "고베에서 경기했기에 우승할 수 있었다"는 말을 남기며 재해로 고통받았던 고베 시민들에게 큰 위안을 줬다.

'Boston Strong', 테러 아픔 딛고 월드시리즈 우승
 
 보스턴 레드삭스가 우승한 후, 퍼레이드에 나선 선수들이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이날 퍼레이드에서는 보스턴 테러에 희생된 피해자들을 기리는 행사 역시 열렸다.(CC-BY-SA 2.0)

보스턴 레드삭스가 우승한 후, 퍼레이드에 나선 선수들이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이날 퍼레이드에서는 보스턴 테러에 희생된 피해자들을 기리는 행사 역시 열렸다.(CC-BY-SA 2.0) ⓒ BU Interactive News

 
2012년 시즌 최종전까지 8연패를 하며 팬들에게 아쉬움을 남겼지만, 2013년 시즌 개막전부터 라이벌 뉴욕 양키스를 꺾으며 기분 좋게 시작한 MLB 보스턴 레드삭스. 하지만 4월 15일 보스턴 마라톤이 진행되던 도중 벌어진 폭탄 테러로 3명이 숨지고 280여 명이 다치는 참사가 벌어졌고 도시는 슬픔에 빠졌다.

홈구장인 펜웨이파크에서의 경기 일부가 순연되기까지 보스턴 레드삭스는 더그아웃 한쪽에 'Boston 617 Strong'이 마킹된 유니폼을 걸어두고 경기에 임했다. 레드삭스의 팬들 역시 경기장에서 'Boston Strong'(보스턴 스트롱)이 적힌 플래카드, 혹은 깃발을 손에 쥐고 응원했다. 야구장의 명물인 '그린 몬스터'에도 'Boston Strong'이 새겨졌다.

테러의 위협과 공포에 맞서 하나가 되고자 했던 이들의 바람이 야구를 통해 이뤄졌다. 레드삭스는 리그를 97승 65패로 마무리했다. AL 동부지구 2위였던 템파베이 레이스와는 5.5경기 차이였다. 레드삭스는 디비전 시리즈와 리그 챔피언십을 거쳐 월드 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맞붙었다.

레드삭스는 월드 시리즈에서 카디널스를 4승 2패로 꺾고 우승했다. 우승 다음 날 열린 퍼레이드에서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 결승점에 우승 트로피를 내려놓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 역시 레드삭스 구단에 "상처 입은 도시 전체를 살리는 치료제 역할을 했다"며 축하를 건넸다.

개막 10연승과 이승엽의 대기록
 
 국민타자 이승엽이 2003년 10월 2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삼성-롯데전 2회말에 아시아 홈런 신기록인 56호 홈런을 친 후 홈인하며 팀 동료들의 축하를 받았다.

국민타자 이승엽이 2003년 10월 2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삼성-롯데전 2회말에 아시아 홈런 신기록인 56호 홈런을 친 후 홈인하며 팀 동료들의 축하를 받았다. ⓒ 연합뉴스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서 방화로 인한 참사가 벌어져 192명이 사망하고 150여 명이 다쳤다. 사랑하는 가족을, 친구를 잃은 대구 시민들의 상심이 도시 전체를 뒤덮었다.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도 전지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3월 14일 합동분향소를 찾아 희생자를 조문하기도 했다.

그런 어수선한 상황 속, 4월 5일 대구시민야구장에선 삼성 라이온즈와 두산 베어스의 개막전이 열렸다. 삼성은 개막전에서 두산을 7-6으로 꺾었다. 이승엽이 개막전에서만 두 번의 홈런을 치고, 임재철이 끝내기 안타를 치는 등 1만 2천 명의 관중, 나아가 TV로 프로야구를 보던 대구 야구 팬들에게 기쁨을 안겼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후 롯데, 한화, 현대를 상대로 개막 이후 10연승을 달리며 신바람 야구를 펼쳤다. 특히 15일 수원에서 열린 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에서는 양준혁이 생애 두 번째 사이클링 히트를 쳐내며 실의에 빠져 있었던 대구 시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기도 했다.

그 해, 삼성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이승엽의 아시아 홈런 신기록 경신이었다. 10월 2일 56번의 홈런을 쳐내며 신기록을 갈아치운 이승엽은 경기 직후 "올해 초 대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만큼, 올 시즌은 그분들과 그 가족을 위해 뛰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대구 지하철 참사 극복을 위해 뛰었다는 그의 이야기는 실의에 빠져 있던 대구 시민들에게 힘이 되기 충분했다. 

2020년, 대구FC와 사자군단의 임무
 
 대구FC의 홈구장인 DGB대구은행파크의 모습.

대구FC의 홈구장인 DGB대구은행파크의 모습. ⓒ 박장식

 
2020년 올해는 코로나19의 공포 속에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대구, 경북 지역은 8천여 명의 확진자와 2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큰 어려움 속에 늦겨울과 봄을 보내야만 했다.

이제 다시 빗장을 여는 스포츠 리그가 앞선 세 번의 선례처럼 시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줄 수 있을까.

지난해 숱하게 매진을 기록했던 대구FC의 '포레스트 아레나'도, 팬들의 "삼성 라이온즈 파이팅" 함성으로 가득 찼던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도 현재까진 썰렁하다. 당분간 팬들의 발길이 허락되진 않겠지만, TV와 스마트폰을 통해 경기를 감상할 수 있다.

물론 리그나 시리즈에서 우승하는 것만이 팬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팬들의 소중함을 알고, 열정을 바쳐 경기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팬들 또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시즌이 시작되고, 라운드에 오른 선수들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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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기사를 쓰는 '자칭 교통 칼럼니스트', 그러면서 컬링 같은 종목의 스포츠 기사도 쓰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쓰는 사람. 그리고 '라디오 고정 게스트'로 나서고 싶은 시민기자. - 부동산 개발을 위해 글 쓰는 사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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