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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사의 기본소득'이 매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동네의사'는 과거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했고 한국 최초의 에볼라 의사이기도 합니다. '동네의사'가 진료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풀어봅니다.[편집자말]
 
중년 남성들은 넉살 좋게 대꾸한다. "술 담배 끊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요?"
 중년 남성들은 넉살 좋게 대꾸한다. "술 담배 끊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요?"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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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빛은 창백하고 팔다리는 가는데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온 중년 남성들. 만성 통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중년 여성들만큼 진료실에서 자주 만나는 환자들 유형이다.

고혈압이나 당뇨병을 처음 진단받는 중년 남성 환자들과 상담할 때 필자는 특별히 충분한 시간을 쏟으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그야말로 삶의 갈림길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어쩌면 이렇게 되풀이되고 있을까? 환자의 이야기는 판으로 수없이 찍어낸 세속화 같다.

중년 남성 환자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혈압이나 혈당이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기적인 건강 검진이나 다른 진료를 받다가 우연히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젠 몸 관리해야 할 나이구나', '운동 좀 해야겠다'와 같은 막연한 결심을 며칠 품다가 말았다. 그러다가 혈압이나 혈당이 더 올라가면 불안한 마음에 동네의원을 찾아온다.

확실히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중년 남성은 예전보다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이 피우고 많이 마신다. 한국 남성 흡연율은 3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상위권이다.

필자가 환자에게 묻는다.

"술은 얼마나 마시세요?"

그럼 열에 아홉은 이렇게 답한다.

"얼마 안 마셔요."

이럴 때 의사는 꼭 더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

"일주일에 몇 번씩, 소주 기준으로 얼마나 드세요?"

환자의 대답은 대략 이렇다.

"주 3~4일에 소주 한두 병 정도요."

필자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남성의 경우 한 번에 7잔 이상(여성은 5잔 이상), 주 2회 이상 술을 마시면 '고위험 음주'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2018년 기준으로 '고위험 음주율'은 남성이 20.8%, 여성이 7.0%였다(남성의 고위험 음주율은 비슷하지만 여성의 경우 폭증하고 있다). 그런데 연령대별로 보면, 50~59세 남성의 고위험 음주율은 24.1%, 40~49세 남성의 경우 27.7%에 이른다.

중년 남성들, 그들의 건강이 위험하다

'배불뚝이'인 중년 남성 환자 둘 중 하나는 체질량지수 25(kg/㎡) 이상으로 비만이다. 2018년 기준으로 19세 이상 남성의 비만 유병률은 무려 42.8%였다(여성은 25.5%). 연령대별로 보면 30~39세 남성 비만율이 51.3%로 가장 높았고 그 다음이 40~49세 남성으로 47.5%였다.
 
보건복지부·질병관리본부, 「국민건강통계」에서 직접 작성
▲ 한국인 성/연령별 비만 비율, 2018년 보건복지부·질병관리본부, 「국민건강통계」에서 직접 작성
ⓒ 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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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중년 남성들이 고혈압이나 당뇨병 등 성인병에 걸리면 수사(修辭)가 아니라 진실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흔히 만나는 환자의 예를 가지고 '10년 심장병 위험도'를 계산해 보자.

☞  나의 10년 후 심장병 위험도 확인 클릭! (https://www.lipid.or.kr/heart/) 한국지질·동맥경화학회 제공. 이 도구는 미국인 기준이며, 위험도를 대략 평가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담배를 피우는 45세 남성의 수축기 혈압이 150mmHg, 총콜레스테롤 240mmHg, 고밀도 콜레스테롤 40mmHg일 경우 10년 심장병 위험도는 25%이다. 치료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10년 동안 협심증이나 심근경색 같은 병이 생길 확률이 1/4이라는 뜻이다. 위험도가 20%를 넘기 때문에 '고위험군'에 해당하고, 적극적인 치료와 관리가 필요하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7년 우리나라 50대 남성 사망률은 같은 50대 여성보다 2.73배나 높았다. 
통계청 '인구동향조사, 2018년'에서 직접 작성
▲ 한국인 사망률 성비 (남/여), 2018년 통계청 "인구동향조사, 2018년"에서 직접 작성
ⓒ 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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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담배 끊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요?"

성인병으로 처음 진단받고 약을 먹기 시작하는 중년 남성들에게 필자는 운동하고 뱃살을 빼라고 당부한다. "운동을 좀 해도 뱃살은 도무지 안 빠져요." 이런 하소연이 돌아오는 경우도 흔하다. "일주일에 3일씩 술을 그렇게 드시니 뱃살이 빠지나요. 더구나 안주는 기름진 고기잖아요." 그럼 중년 남성들은 멋쩍은 듯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환자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동맥경화와 같은 성인병 합병증들은 아주 서서히 진행하기 때문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 반면 술과 담배가 주는 즐거움은 당장이다.

하지만 성인병의 고통이 바로 나타나는 때도 있다. 중년 남성이 다리를 절며 진료실에 들어선다. 한쪽 엄지발가락이 빨갛게 붓고 뜨겁다. '통풍'이다. 육류와 술을 많이 섭취하는 중년 남성들에게 흔한 병이다. 통풍 발작은 굉장히 고통스럽지만 그 환자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담담했다. "어제 술 한잔했더니만..." 하루 이틀 겪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술 마시면 통풍 발작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술을 선택했다.

필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통풍이 자주 재발하면 관절이 영구적으로 파괴되고 콩팥도 망가질 수 있다. 필자가 이렇게 경고하면 중년 남성들은 넉살 좋게 대꾸한다.

"술 담배 끊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요?"

근무에 포함되지 않는 '업무'

우리나라 성인들의 여가는 어떨까? 성인의 35.4%, 즉 셋 중 한 명 이상은 '운동 부족'이었다(남성은 29.5%, 여성은 무려 41%). 한국은 OECD 국가들 가운데 여가문화비 가계지출 비중이 터키, 아일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다음으로 낮다.

'2019년 국민독서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종이책과 전자책을 합친 한국 성인들의 연간 평균 독서량은 7.5권이었다. 이는 2017년보다 1.9권이나 줄어든 수치다. 또 성인의 연간 독서율은 55.7%로 떨어졌다. 우리나라 성인의 45%는 일 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인 대한민국 성인의 삶은 어쩌다 이렇게 메말랐을까? 우선 OECD 최장 수준으로 긴 근무시간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거기다 근무시간에 포함되지 않는 '업무'들이 있다.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여전히 '업무의 연장'인 회식에 빠지기 어렵다. 여기에다 최근 '사람인'(대표 김용환)이 시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의 59.3%가 '퇴근 후 업무지시를 받은 적이 있다'라고 답했다. 퇴근 후 업무지시를 받는 빈도는 주 2.8회에 달했다.

노동시간 단축으로 그들에게 '워라벨'을

'동네의사와 기본소득' 7화에서 노동시간 단축이 남성과 여성이 일과 가사를 평등하게 나눌 수 있는 조건이라고 밝혔다. 2019년 성별 비정규직 비율은 남성 29.4%, 여성 45.0%였다. 정규직 노동자의 (월) 총근로시간은 169.7시간인 데 반해 비정규직 노동자는 116.3시간이었다. 그런데 같은 정규직이어도 남성은 171.6시간, 여성은 166.7시간 일한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아니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같은 정규직이어도 여성의 월임금총액은 남성의 67.4%밖에 안 된다. 남성들은 주로 정규직이며 여성들보다 더 오래 일한다. 하지만 더 일하는 정도보다 훨씬 많은 임금을 받는다.

따라서 법정 노동시간을 줄이면 정규직 남성 노동자의 노동시간이 더 크게 줄어든다. 그 일자리는 우리 사회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된다. 지금보다 더 많은 여성이 보수가 좋은 정규직 일자리를 얻게 될 가능성이 열린다.

공상처럼 느껴지는가?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노동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는 중년 남성들도 일과 삶의 균형을 찾을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고용노동부,「고용형태별근로실태조사」, 2018년
▲ 성별 고용형태별 총근로시간과 월임금총액, 2018년 고용노동부,「고용형태별근로실태조사」, 2018년
ⓒ 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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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정상훈씨는 기본소득당 당원입니다. 기본소득당은 평균나이 27세의 당원들이 만든 정당입니다.


태그:#기본소득, #가사분담, #워라벨, #중년남성, #성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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