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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인 5월, 혈연관계를 넘어 새로운 가족을 꾸린 이들에게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들어봅니다.[편집자말]
내 연인은 가난한 사람이다. 그는 나와 동거하기 전까지 홍대 근처에 창문이 없는 고시원 311호실에서 살았다. 부모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그에게 높은 보증금을 요구하는 서울의 집값은 진입하기 어려운 장벽이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연인 관계에 들어서게 된 뒤에 그는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약간은 민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고시원으로 나를 초대했다. 나라고 대단히 주거 환경이 좋은 집에서만 지내온 건 아니다. 하지만 창문과 화장실이 없는 그 방을 보고 순간 내 얼굴은 고시원을 처음 봤을 때 아연실색한 정치인 정몽준의 표정이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지내던 고시원은 간판에 홍보 문구랍시고 "고품격 주거공간"임을 적어놨는데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시 그에게는 일정한 월급이 나오는 직장이 있었지만, 그 직장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증금을 모으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는 월급이 잘 모이지 않는다면서 작게 웃었다. 그를 내가 살고 있는 원룸으로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다.

6평 원룸에서 시작한 애인과의 동거
 
거의 내 키 높이만큼 옷들이 쌓여서 내가 까치발을 들어야 옷을 쌓을 수 있게 됐을 무렵, 애인과 계속 같이 살려면 이 집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거의 내 키 높이만큼 옷들이 쌓여서 내가 까치발을 들어야 옷을 쌓을 수 있게 됐을 무렵, 애인과 계속 같이 살려면 이 집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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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결정을 내린 뒤로 나는 그에게 같이 살면 좋은 점을 끈질기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우리는 월세를 반으로 나눠서 살 것이기 때문에 고시원 정도의 돈만 내도 함께 살 수 있다, 방을 더 넓게 쓸 수 있다, 무엇보다 내가 사는 곳에는 창문이 있다, 그리고 나는 코를 하나도 안 곤다, 이도 갈지 않는다 등 사탕발린 말을 했다. 사실을 밝히자면 나는 피곤할 때 코도 골고 이도 갈고 잠꼬대도 하지만, 나 혼자 살 때는 그걸 몰랐다.

그를 내가 사는 곳에 데려와 이 집의 좋은 점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그는 결국 내 요구에 못 이겨 이사를 왔고 나와 같이 살게 됐다. 이사를 왔다기엔 적은 옷가지와 책 몇 권을 챙겨온 것이었지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물론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사는 원룸도 두 명이 쓰기에는 많이 비좁은 6평짜리 방이었기 때문이다. 1명당 3평씩을 쓰는 꼴이었다.

집안일로 싸우는 적은 없었지만 우리는 나날이 물건을 둘 곳이 없어 책상 위로, 또 위로 쌓았다. 거의 내 키 높이만큼 옷들이 쌓여서 내가 까치발을 들어야 옷을 쌓을 수 있게 됐을 무렵, 애인과 계속 같이 살려면 이 집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옷을 제때 안 치우는 못된 버릇이 있긴 했지만 일단 6평의 공간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판단이 들었다.

"안 되겠어. 이사를 하자."

비장한 내 말투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전쟁이 시작됐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중소기업이라서 나는 최대 1억의 중소기업청년전세자금대출(중기청)을 받을 수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이 빼곡하게 찰 때까지 부동산 애플리케이션을 깔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퀭한 얼굴로 틈만 나면 부동산 앱을 들여다보았다. 자다가 깨서도 앱을 뒤적이다가 해가 밝아오고 나면 다시 잠들었다. 하루는 이사를 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꾸고 나서는 허탈해했다.

앱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서울에 우리 두 명이 살 만한 1억 내외의 전셋집은 없었다. 반지하 매물들도 이따금씩 튀어나왔다. 이 정도면 괜찮다 싶은 곳은 '중기청 불가'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게 스마트폰을 뚫어지게 쳐다봐봤자 시력만 상할 뿐이었다. 지금 지내는 곳 근처에 적절한 매물이 없어 보이자, 결국 서울 전역을 대상으로 마음에 드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서울 하늘 아래서 연인 둘이 집을 구한다는 것

어느 날은 연인과 휴가를 내고 매물을 보러 돌아다니기로 했다. 하루에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10군데의 집을 방문했다. 어느 공인중개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 가격에 어디 가서 이런 집 못 구해."

1995년에 지어진 빌라는 투룸이었지만 정체 모를 냄새가 심하게 났다. 후각이 예민했던 나는 집 안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조차 없었다. 부동산 주인들은 중기청 대출을 끼고 고작 1억 내외의 집을 보러 다니는 우리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그 매물은 이미 나갔고, 여기 매물 더 좋은 게 있어"라는 말을 무수히 많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꾸역꾸역 찾아간 곳은 반지하거나, 월세가 너무 높거나, 집 앞에 공사장이 있거나, 옆에 건물이 있어서 아예 집 안으로 햇빛이 들어오지 않거나, 투룸이긴 하지만 평수는 사실상 원룸인 곳이었다.

부동산 직원들은 한결같이 "여기만큼 좋은 곳은 못 구하실 걸요"라고 했다. 뭐지? 공인중개사 시험을 볼 때 이런 말들을 미리 연습하는 건가? 이 생각이 들 정도로 천편일률적이었다. "이 보증금에 이런 집 없다"는 말을 하루 종일 듣자 내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고 그런 내 얼굴을 보는 연인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집을 한 번 계약하면 2년을 꼼짝없이 살아야 하니 눈을 아예 낮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온종일 매물을 보러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엔 둘 다 말이 없어졌다.

지금 사는 곳과 비슷한 6평 내외의 원룸 매물은 넘쳐났지만 더 넓은 집을 원하는 우리에게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가 같이 살기 위해서는 1억보다 더 큰 금액이 필요했다. 은행에 달려가서 내가 빌릴 수 있는 최대한의 금액을 물었다. 사회 초년생인 내게 은행이 빌려줄 수 있는 금액은 1억 1천만 원이 최대라고 했다.

수심에 잠긴 내게 은행 직원은 진지하게 조언했다.

"지금보다 더 넓은 집을 구하실 거라면 두 분이 따로 따로 전세대출을 받아서 방을 2개 구하는 게 나아요."

은행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절로 눈물이 났다. 물론 은행 직원의 말은 아주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하지만 나는 연인과 같이 살고 싶었다. 돈이 없으면 같이 살 수 없는 걸까.
 
서울의 이 많은 집 중에 왜 내가 살 곳은 없는 걸까.
 서울의 이 많은 집 중에 왜 내가 살 곳은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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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안 하고 같이 살 수는 없을까요?

"결혼하면 서울시 신혼부부 임차보증금 지원사업으로 최대 2억 원(임차보증금의 90% 이내)까지 구할 수 있는데."

그는 쓰게 웃었다. 당장 전셋집을 구할 방법도 없는데 무슨 수로 결혼이란 말인가. 나는 입이 튀어나온 채로 "결혼해야 2억 대출을 해주는 건 차별이야"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계산을 시작했다. 한 달에 100만 원씩 모으면 언제 집을 구할 수 있는지를. 1억을 모으는 데 적어도 8년이 걸린다. 그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면, 제대로 된 집을 사기는커녕 퇴직을 걱정해야 할 나이에 가까워질 것이다.

생활동반자법의 필요성을 주장한 책 <외롭지 않을 권리>(황두영 지음, 시사인북)에서 저자는 "원하는 사람과 같이 삶을 꾸릴 자유가 헌법적 권리라면, 그 틀이 꼭 혼인이어야만 할까?"라고 되묻는다. 형편이 되지 않거나 원치 않아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그저 같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일까?

세 달에 걸친 연인과의 집구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자다 깨서 부동산 앱을 들여다본다.

태그:#생활동반자법, #가정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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