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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 황매산은 지리산 바래봉, 소백산과 함께 국내 3대 철쭉군락지를 품은 산이다. ⓒ 장호철
 
연초에 코로나19 발병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게 '강 건너 불'이 아니라, 내 일상의 삶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리라고 여긴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쯤이야 어느 날 눈 녹듯 스러질 것이고 잠시 멈칫했던 나의 일상은 곧 이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3월에 각급 학교 개학이 미루어질 때만 해도 사태가 가라앉으리라는 기대를 접지 않았다. 그러나 5월도 중순이건만, 여전히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19 발병 백일을 넘기면서 경제는 물론이거니와 일상생활마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한정된 공간에 '유폐'됐다.

억새 물결 뒤 이태 만에 찾은 황매산 철쭉

2월에 다녀온 먼 거리 나들이 이후, 나도 꼼짝없이 두어 달 동안 집에 갇혀 있었다. 첫 외출은 4월 말, 부처님 오신 날에 떠난, 인근 상주의 경천섬 나들이였다.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동여맨 사람들은 4월의 푸른 하늘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공원을 배회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생활 방역'으로 바뀌고 난 첫 주말에 그간 봉쇄됐던 경남 합천의 황매산(黃梅山, 1108m)이 문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이태 전 아내와 한 약속을 이행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것은 오래 닫힌 시간을 열어젖히고 싶다는 잠재의식 때문이었을까.  

황매산 '억새 물결'을 찾은 때가 2018년 11월이었다. 영남 알프스의 간월재와 경주 무장산을 거쳐 만난 황매산 억새 물결의 감동을 나는 잊지 못한다. 마치 손끝에 닿을 듯 느껴지는 부드러운 양감, 이어지는 수평의 공간이 주는 넉넉함과 안온함, 억새군락지가 보여준 풍경은 처연했다. 억새 물결이 고즈넉하게 전하는 평화롭고 안온한 느낌, 그것은 마치 삶에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과도 같았다. (관련 기사 : 지친 마음 어루만져주듯…반짝이던 황매산 '억새 물결')

소백산, 지리산 바래봉에 이어 '철쭉 3대 명산'에 이름을 올린 '황매산철쭉제' 기간에 진분홍빛 철쭉으로 뒤덮인다는 황매산을 다시 찾고 싶었다. 손가락까지 걸지는 않았지만, 그때 나는 아내에게 '내년 봄'을 기약하고 황매산을 떠났다. 
 
황매산 철쭉 군락지는 정상 왼쪽 산등성이를 진홍빛 물결로 넘실대게 한다. ⓒ 장호철
  
철쭉군락지 봉우리에서 내려다본 황매산 능선. 가운데 봉우리에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 장호철
 
그러나 무엇이 바빴던가,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올봄 내내, 우리는 코로나19의 그물망에 갇혀 있었다. 굳이 황매산 철쭉이 아니어도 좋았을 테지만, 나는 그간 누리지 못한 봄을 황매산 능선에서 만나고 싶었다.

지난 월요일, 아내와 함께 찾은 황매산은 초록으로 깨어나 있었다. 산 아래와는 달리 정상의 주차장 주변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해마다 베푸는 '황매산철쭉제'는 취소된 상태였지만, 오랜 봉쇄를 풀고 산은 그 너른 품에 사람을 받아 안고 있었다. 철쭉은 산 정상 오른쪽의 억새군락지 쪽이 아니라, 왼편 철쭉군락지에 다투어 피어 있었다. 시간이 조금 이른 탓일까, 아직 그것은 '핏빛'이라고 그리기에는 기세가 강렬하지 않았다.

하늘과 맞닿을 듯 드넓은 진분홍빛 산상 화원

그러나 "모산재의 기암괴석과 북서쪽 능선에서 정상을 휘돌아 산 아래 해발 800~900m 황매평전 목장 지대로 이어진 전국 최대 규모의 철쭉군락지는 그야말로 하늘과 맞닿을 듯 드넓은 진분홍빛 산상 화원"(정부24)이라는 소개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황매산은 바래봉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에 정부가 장려하고 지원한 목장단지가 개발된 곳이었다고 한다. 목장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나무를 베어내고 불을 질러 잡목을 제거, 정리했다. 소나 양이 관목의 새순과 풀을 뜯어 먹으며 자랐는데 짐승들은 독성이 있는 철쭉의 새순은 먹지 않았다. 

결국, 다른 관목은 도태하고 철쭉만이 살아남았다. 철쭉은 또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랐고 무섭게 번식했다. 뒷날, 경쟁력을 잃은 목장이 문을 닫자, 황매산은 국내 최대의 철쭉군락지를 품은 산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 황매산은 목장 대신 봄에는 철쭉, 가을에는 억새로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다.
 
황매산 철쭉 물결. 그 진홍빛은 초록과 어우러져 깊어가는 봄의 기세를 더해준다. ⓒ 장호철
  
황매산 철쭉군락지에 모인 나들이객들. 워낙 너른 능선이라 산은 사람들을 넉넉히 품어주었다. ⓒ 장호철
   
철쭉군락지 어귀까지 찻길이 나 있어 자동차로 편하게 찾을 수 있고, 능선도 완만하여 '아이들과 노부모를 동반한 가족 산행 코스'로 과부족이 없다. 능선길에서 만나는 나들이객 가운데 3대에 걸친 가족이 심심찮게 보이는 까닭도 이 산이 허락한 '접근성' 덕분일 터였다. 

우리는 이태 전 억새군락지를 돌던 코스로 능선을 되밟았다. 철쭉이 듬성듬성한 억새군락지 쪽에는 산행하는 이들이 띄엄띄엄 눈에 띄었지만, 철쭉군락지에는 꽃을 보러온 이들로 넘쳤다.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워낙 능선 주변이 너른 덕분에 북적이는 느낌 따위는 없었다. 그건 전적으로 산의 '너른 품' 덕분일 것이다. 

마스크를 얌전히 낀 이들이 반, 그걸 벗고 홀가분하게 다니거나 사진기 앞에 설 때면 마스크를 벗곤 하는 이들이 나머지였다. 기온은 25도에 가까웠지만, 능선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땀을 흘리지 않고 산을 오른 데다가 진분홍 산상 화원을 지척에서 누릴 수 있었으니 상춘으로서는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넘실대며 흘러가는 진홍빛 철쭉군락지 주변을 걷고 있다. ⓒ 장호철
  
철쭉군락지로 이어지는 봉우리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그늘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 장호철
          
5월의 황매산을 끄적이는 이유

코로나19가 진정되면서 생활 방역으로 전환하자마자 이태원 클럽 발 확진자가 날마다 늘어나고 있다. '백일 만의 외출'이긴 해도 나들이 나서기는 적잖이 곤혹스럽다. 산을 오르면서, 우리가 한 번도 마스크를 벗지 않은 까닭이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말려 올라간 마스크가 눈을 가리는 불편을 나는 선선히 받아들였다. 

자녀를 따라나선 노인들의 밝은 얼굴은 비록 코로나19로 닫히고 막힌 봄에 이 산에서 누리는 꽃구경이 그들에게 작지 않은 위로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듯했다. 비록 상춘을 권하기 어려운 시기여도, 철쭉이 불타오르는 이 5월의 황매산을 끄적이는 이유다. 

모르긴 해도 황매산 철쭉은 5월 20일까지는 그 진홍빛 물결을 넘실댈 것이다. 철쭉이 질 때까지는, 코로나19 상황이 정리되어 아이들은 학교로 가고, 일을 쉬어야 했던 이들은 일터로, 멈추었던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는지. 잠깐 집 밖에 나올 때도 마스크를 찾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갑갑한 상황을 말끔히 끝낼 수 있다면 더 무엇을 바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태그:#황매산 철쭉, #국내 최대 철쭉군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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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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