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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판본 10종.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編), 황석영 기록'으로 저자가 표기된 출판사 '풀빛'의 1985년 최초 판본으로부터 공동저자 이재의씨, 전용호씨가 포함된 2017년 전면개정판, 2019년 나온 개정판 양장본을 포함한 10개 판본이다. ⓒ 이희훈
  
ⓒ 이희훈
 
"1985년 내가 광주항쟁에 대한 보고서를 써야겠다고 결심했을 당시 전두환 군사 정권은 아직도 서슬이 시퍼런 때였다. 모든 정치적 회합은 금지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잡혀갔다가 나중에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는 어떠한 출판 행위도 철저히 금지당했다. 당연히 '광주항쟁에 대한 진실'은 불완전하고 왜곡된 형태로 이야기되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광주항쟁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일과 같았다."
-이재의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서문 중

행여 타자기 소리가 새어 나갈까 담요로 창문을 가렸다. 동료들과 자료를 수집하고 글 쓰는 작업을 시작한 뒤로는 집필 장소를 수차례 옮겨야 했다. 심지어 가족들 사이에 암호까지 마련해뒀다. 혹시 모를 전두환 정권의 급습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5·18민주화운동(아래 5·18)의 진실을 기록한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아래 넘어넘어)의 공동저자 이재의(64)씨는 그렇게 이 책을 완성시켰다.

변화의 기폭제가 된 한 권의 책
 
ⓒ 이희훈
 
<넘어넘어>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세상에 나왔다. 1985년 5월, 아직 제본조차 안 된 책들은 전두환 정권에 모조리 빼앗겼다. 당시 이 책을 인쇄한 출판사 대표와 대표 작가로 이름을 올린 이는 체포됐다. 책이 완성된 것은 1985년이었지만, 시중판매는 1987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넘어넘어>의 집필진들은 오랫동안 본인의 이름을 책에 올리지 못했다. 2017년 개정판이 나오기 전까지 저자는 황석영 작가 한 사람이었다. 정부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고, 황석영 작가의 이름을 빌려 보다 많은 사람에게 읽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씨와 공동저자 전용호(62)씨가 책에 이름을 올리게 되기까지, 꼬박 32년이 걸렸다. (관련기사 : "황석영이라면 이름을 빌려줄 것 같았다... 5.18 진실 알린 그책, 전두환 몰래 우리가 썼다")

오는 18일, <넘어넘어> 초판본을 비롯한 10종이 서울기록원에서 전시된다. 출판사부터 책 표지까지 바뀐 10종의 판본은 <넘어넘어> 책이 지나온 굴곡진 세월을 증명한다. 이번 전시회의 제목도 이 책의 이름을 빌렸다. '넘어 넘어 : 진실을 말하는 용기'다.

12일 <넘어넘어>의 공동저자 이재의씨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서울기록원에서 전시되는 기록물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이 책을 "항쟁에 참여했던 주체들의 기록"이라고 소개했다.

80년 5월, 당사자들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공동저자 이재의씨의 취재노트 원본의 전시 모습. ⓒ 이희훈
  
ⓒ 이희훈
 
"우리(공동저자들)의 첫 번째 목표는 '항쟁의 주체가 됐던 광주시민들의 입장에서 쓰자'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진실들을 다루기 위해서다. 우리는 5·18 당시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켰던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죽을 위험이 높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던 시민들. 자기 삶과 맞바꾸면서까지 이런 선택을 내린 시민들의 행동을 알리고자 했다. 이것이 어떠한 철학적 설명보다도 5·18이 광주 시민들에게 미친 영향을 사실적으로 보여줄 거라 생각했다."

이어 이씨는 "이 책의 중요성은 80년 5월, 광주가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5·18이 폭동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으로 정착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항쟁의 주체들을 기록한 이 책도 일부 기여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5·18에서 중요한 건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피해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극복해 왔는지도 핵심이다. 이 책은 그 과정을 담는다. 5·18의 전 과정을 담는 만큼, 이 책이 한국의 민주주의 뿌리를 성찰하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오는 서울기록원 전시회에서는 이씨의 '취재노트'도 전시된다. <넘어넘어>를 집필할 때 작성했던, 책 제작의 핵심이 담긴 노트다. 광주 외 지역에서 전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5·18에 대한 역사 재료들은 많이 흩어져 있지만, 그 자체가 역사는 아니다. 인과관계, 전후관계를 보여줬을 때 역사의 맥락이 완성된다. 이 맥락을 어떻게 보여주고, 어떤 각도에서 5·18이라는 방대한 사건을 기술할 것이고, 어떤 관점에서 취재할 것인지에 대한 굵직한 구상이 이 취재 노트에 다 들어 있다고 보면 된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굉장히 편향적인 자료일 수도 있다. 우리가 당시 상황을 어떻게 판단했고 이것을 어떤 시각에서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발간된 <넘어넘어>는 오늘날 정사로 자리 잡았다. 이것이 현재 이 책이 국민적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진실이 가려지는 순간마다 펜을 잡았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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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이재의씨와 전용호씨, 황석영 작가는 1985년 첫 집필 이후 19년 만에 다시 펜을 들었다. 5·18에 대한 역사 왜곡이 극심해졌을 무렵으로, 극우인사 지만원씨를 비롯해 일부 집단이 5·18을 북한의 소행으로 몰았다. <넘어넘어>도 왜곡 대상이 됐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일부 극우인사들이) 5·18을 왜곡하는 동시에 이 책도 비방하기 시작했는데,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정도가 정말 극심해졌다. 이 책이 북한의 자료를 근거로 쓴 책이라느니, 필자도 간첩 혐의가 있다느니, 왜곡된 주장들이 잇따라 나왔다. 더이상 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박근혜 정권과 한판 대결을 붙는다고 생각하면서 쓴 책이다."

2017년 개정판에는 초판본에 담기지 못했던 상당수의 자료가 포함됐다. 1988년 국회 청문회자료,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회 보고서 등이다. 1800여 명의 증언자도 새롭게 확보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외신 기자, 광주 현장을 일상에서 목격한 시민들 등도 포함됐다. 

"책이 개정되면서 내용도 훨씬 풍부해졌다. 시기적으로도 이미 37년이나(2017년 기준) 지났을 무렵이니까, 보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다룰 수 있었다. 그동안 5·18에 대한 증거 자료들도 많이 나왔다. 1985년 당시에는 그런 내용이나 자료가 없어서 포함시킬 수 없었던지라 이런 구체적인 근거들을 개정판에 추가했다. 내외신 기자들의 시각도 다뤘다. 이 책은 왜곡을 일삼는 사람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답변이자, 왜곡을 격파할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근거다. 1980년에도, 지금 2020년에도 우리는 이렇게 5·18을 왜곡하려는 자들과 싸우고 있다."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드러난 진실도 있지만, 처벌받지 못한 진실도 여전히 남았다. 이씨가 5·18을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이슈"라 말한 이유다. 5·18을 둘러싼 근본적인 문제들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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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은 아직도 기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살아 있는 이슈고, 현장성 또한 갖고 있다는 의미다. 예컨대 집권자들이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들, 이 과정에서 국가의 그릇된 정당성을 강조하는 행위 등이다. 1980년이나 지금 2020년이나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변화하지 않았다."

이씨는 "5·18은 굉장히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이런 비극을 통해 역사는 성장하고 변화한다"고 덧붙였다.

"5·18의 핵심은 당시 현장에서 광주 시민들이 보여줬던 민주의식이다. 인류 역사상 대단히 높은 도덕성을 보여준 현장이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끝까지 전남도청을 지킨 사람들, 죽어가는 와중에도 (타인을 위해) 헌혈했던 사람들, 극한의 상황에도 은행을 털거나 금품을 훔치지 않았던 사람들. 4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민주화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5·18의 정신이 여러 사람들에게 기억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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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기록원 5·18 40주년 전시회
'넘어 넘어 : 진실을 말하는 용기'


서울시 산하 서울기록원(원장 조영삼)은 오는 18일 5·18 40주년을 맞아 '넘어 넘어 : 진실을 말하는 용기' 특별전을 연다. 전시는 내년 3월 28일까지 개최된다. 서울특별시와 광주광역시가 공동주최하는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사업인 '오월 평화 페스티벌'의 일부다.

이번 전시에서는 5·18 광주의 시민기록집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판본 10종이 공개된다. '풀빛'의 1985년 최초 판본부터 2017년 창비에서 나온 전면 개정판, 2019년 나온 개정판 양장본 등이 포함된다.

<넘어넘어>의 공동저자 이재의씨의 취재노트 원본도 약 3개월간 전시된다. 광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원본이 전시되는 것은 이번이 최초다.

이전까지 국내에서 구할 수 없었던 기록물도 최초로 공개된다. 1980년 당시엔 검열돼 국내에서 볼 수 없었던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1980년 6월 2일자 국제면 기사 'Insurrection in South Korea'(남한에서의 봉기)다. 40년간 공개되지 못했던 외신 기사문의 내용은 무엇인지, 외신의 눈에 비친 5·18 현장의 모습은 어땠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 5·18을 기억하기 위해 각종 아카이빙 활동을 펼치는 광주의 청년세대 4팀의 작품들도 각각 소개될 예정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광주 5월 민주항쟁의 기록, 전면개정판

황석영.이재의.전용호 기록,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창비(2017)


태그:#5.18민주화운동, #광주, #이재의, #서울기록원,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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