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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이 1960년대에 개발을 시작한 연화광산은 석포제련소에서 북서쪽으로 8km 가량 떨어진 연화산(연화봉) 자락에 있었다. 연화산(蓮花山)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확인되지 않지만 산 정상부가 연꽃봉오리 모양이어서 붙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영풍이 1960년대에 개발을 시작한 연화광산은 석포제련소에서 북서쪽으로 8km 가량 떨어진 연화산(연화봉) 자락에 있었다. 연화산(蓮花山)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확인되지 않지만 산 정상부가 연꽃봉오리 모양이어서 붙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 구글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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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문고로 널리 알려진 영풍그룹은 재벌순위 28위의 기업집단이다(2020년 자산총액 기준). 1949년 영풍기업사라는 이름의 작은 상사(商社)로 출발한 영풍이 오늘날 재벌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연제련소를 통한 대규모의 자본 축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 석포제련소를 설립하여 제련업으로 진출한 영풍은 1978년 고려아연을 완공하면서 국내 아연시장을 독점하게 되었다. 현재 고려아연과 석포제련소는 세계 1위와 4위의 아연제련업체이며, 영풍그룹의 세계 아연시장 점유율은 10%(세계 1위), 국내 아연시장 점유율은 90%에 이른다(2019년 기준 고려아연 54%, 석포제련소 36%).

영풍그룹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주력기업 역할을 한 영풍 석포제련소는 봉화군 석포면의 깊은 산골짜기에 있어서 오랫동안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2014년 환경단체의 조사와 이후 환경부의 조사 등을 통해 광범위한 환경오염이 밝혀지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2018년에는 민관협의체인 낙동강상류환경관리협의회가 구성되어 석포제련소에서 안동댐에 이르는 낙동강 상류 환경오염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찾고 있다.

현재 낙동강 상류 환경오염의 주요인으로 석포제련소가 지목되고 있다. 석포제련소 부지와 주변 마을, 임야 등에서 토양오염, 지하수와 하천 오염, 대기오염과 산림고사 등이 확인되었다. 석포제련소에서 안동호에 이르는 낙동강변과 안동호 바닥의 오염퇴적토, 안동호의 물고기 폐사 등도 석포제련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지적받고 있다.

낙동강 상류 환경오염에 석포제련소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지만, 영풍이 일으킨 환경오염과 관련해서 그간의 조사에서 간과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영풍에 의한 환경오염이 석포제련소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전에도 있었다는 점이다. 영풍은 석포제련소를 설립하기 10년 전부터 연화광산을 개발했고 그 과정에서 심각한 환경오염을 일으켰다.
 
경북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에 있었던 연화광산.(1965년) 선광장 뒤쪽 산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앞쪽에 보이는 광차는 싣고 온 광석을 선광장 안으로 쏟아 부은 다음 연화산 중턱에 있는 갱으로 되돌아간다. 낙동강 지류인 송정리천이 선광장 앞을 지나며, 선광장 아래로 사무실, 식당 등이 있고 송정리천 건너에는 사택(월암사택)이 보인다.
 경북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에 있었던 연화광산.(1965년) 선광장 뒤쪽 산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앞쪽에 보이는 광차는 싣고 온 광석을 선광장 안으로 쏟아 부은 다음 연화산 중턱에 있는 갱으로 되돌아간다. 낙동강 지류인 송정리천이 선광장 앞을 지나며, 선광장 아래로 사무실, 식당 등이 있고 송정리천 건너에는 사택(월암사택)이 보인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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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광산은 일제강점기에 미쓰비시(三菱)가 개발하다 해방 후 국유화되었고, 1960년 12월 국유광업권 공매를 통해 영풍(영풍광업)의 소유가 되었다. 영풍은 연화광산에서 채굴한 아연과 납을 일본으로 수출하면서 굴지의 광산업체로 성장했고, 이후 석포에 아연제련소를 설립하여 제련업으로 진출했다. 1998년 연화광산이 폐광되고 광업부문이 정리되면서 영풍의 주업종은 제련업이 되었다.

영풍이 연화광산을 개발한 30여 년 동안 엄청난 환경오염이 있었지만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화광산이 폐광되면서 그 존재는 잊혔고 연화광산으로 인한 환경오염도 묻혔다. 하지만 연화광산으로 인한 광해(광업으로 인한 피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광해방지사업에 많은 국민 세금이 투입되고 있다.

연화광산 폐수로 송정리천 열목어 절멸
 
연화광산의 선광장과 침전조 사이로 송정리천이 흐른다.(1971년) 선광장에서 나온 폐수는 침전조를 거쳐 송정리천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송정리천은 3.5km를 흘러 육송정삼거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연화광산의 선광장과 침전조 사이로 송정리천이 흐른다.(1971년) 선광장에서 나온 폐수는 침전조를 거쳐 송정리천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송정리천은 3.5km를 흘러 육송정삼거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 국토지리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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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는 환경관련 법제도가 미비하고 환경오염에 대한 단속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1961년부터 연화광산이 개발되면서 낙동강 지류인 송정리천이 폐수로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연화산 골짜기(한티골)에서 태어나 11살이 되던 1968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던 이상식 영풍제련소봉화군대책위원회(봉화군대책위) 대표는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광산 갱내를 놀이터 삼아 다녔다는 이 대표는 광산 폐수가 그대로 강으로 흘러 들어간 것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폐슬러지를 매립하지 않고 일단 물에 침전시켜요... 동그란 시멘트 구조물(침전조)로... 거기에 쏟아부어 놓으면 (슬러지는) 바닥에 가라앉고 물은 넘어서 강가로 나가고 이게 계속되는데, 그거는 눈 가리고 아웅이지. 시설해 놨다 이런 수준이지, 그대로 슬러지가 강물로 다 갔죠."

채굴된 원광석에는 여러 가지 광물이 섞여 있는데 그중에서 특정 광물을 분리하는 과정을 선광(選鑛)이라 한다. 당시 연화광산 선광장은 아연과 납을 분리한 후 찌꺼기(광미)가 섞인 폐수를 파이프를 통해 침전조로 보내고, 침전조에서 찌꺼기를 가라앉힌 후 맑은 윗물(상등수)을 강으로 내보내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찌꺼기가 섞인 폐수가 그대로 송정리천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상식 대표는 침전조 안에 시커먼 물이 빙빙 돌고 있었고 근처를 지나면 독한 냄새가 났다고 한다. 독한 냄새가 난 것은 폐수에 섞인 화학물질 때문이다. 선광은 원광석을 갈아서 물에 섞은 후 시약(부선제)을 사용해 납과 아연을 부유(浮遊)시켜 분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부유선광법/부선법), 사용된 시약에는 청산가리의 성분인 맹독성의 시안(싸이나) 등이 함유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연화광산 폐수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아연광업소의 아연물이 넘쳐흘러, 강바닥은 아연광의 폐수 때문에 잿빛으로 물들어 열목어는 절멸. 지난 51년 이곳 열목어 보호 관리를 위임 맡은 현이진 씨(70)는 '몇 해 전에는 경찰서장 등 높은 사람들이 찾아와 열목어를 잡아달라고 부탁이 들어올 때는 제일 곤란했다'면서 '최근에는 각처에서 수산 학술단체들까지 몰려오는 바람에 대답조차 하기 싫어졌다'고 말하고 있다."(동아일보 1971.2.26.)
 
광산 폐수로 인한 송정리천 열목어의 절멸은 연화광산 환경오염의 한 예에 불과하다. 그 외에도 폐석과 광미의 계곡 매립, 시설을 처리하지 않고 폐광한 사실, 침출수와 갱내수 문제, 갱의 함몰 등 여러 가지 광해가 발생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영풍이 연화광산을 개발하면서 일으켰던 환경오염은 이후 석포제련소 운영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환경오염 관행이 해방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일본 기업의 광산·제련소 운영과정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미쓰비시가 연화광산 개발
 
일제강점기 미쓰비시 연화광산이 있었던 연화산. 원 안은 1960년대 영풍이 연화광산을 개발할 당시 폐석(버럭)을 매립한 곳이다. 인근에 미쓰비시가 만든 수평갱과 수직갱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일대가 모 종교단체 소유지여서 올라가 보지는 못했다.
 일제강점기 미쓰비시 연화광산이 있었던 연화산. 원 안은 1960년대 영풍이 연화광산을 개발할 당시 폐석(버럭)을 매립한 곳이다. 인근에 미쓰비시가 만든 수평갱과 수직갱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일대가 모 종교단체 소유지여서 올라가 보지는 못했다.
ⓒ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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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광산이 언제 발견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970년대 대한광업진흥공사가 발간한 <광산평가조서>에 따르면, 1924년 이윤용 외 2인 명의로 광업권이 등록되었다. 광업권 등록 당시 어떤 광물을 대상으로 했는지 확인되지는 않지만, 1930년 즈음 비소와 망간을 목적으로 가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비소를 채굴했다는 사실은 봉화군대책위 이상식 대표의 경험으로도 확인된다. 이상식 대표는 어린 시절 연화산에서 비상(砒霜)을 구웠던 굴과 허연 흔적이 있는 것을 보았고, 풀을 먹이기 위해 데려간 소가 허연 부분을 먹어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비상은 왕조 시대에 사약의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비석(砒石, 비소가 함유된 흰색 가루)에 열을 가해 승화시켜 추출한 결정체가 비상이다.
  
미쓰비시가 연화광산을 인수한 것은 1935년 4월이었는데 이는 식민지 수탈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의 풍부한 광물을 차지하기 위해 일본에서 전문기사를 데려와 세밀한 광산조사를 했고, 미쓰비시, 미쓰이(三井), 스미도모(住友) 등 일본 대재벌로 하여금 조선의 광산을 매수케 했다. 그 결과 조선의 주요 금광 대부분이 일본 재벌의 소유가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니켈, 코발트, 아연, 알루미늄 등 군수 광물을 위한 광산개발도 확대되었는데 미쓰비시의 연화광산 인수는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미쓰비시는 아연과 납을 채굴할 목적으로 연화광산 개발에 착수했지만 본격적인 생산에는 이르지 못하고 중지했다고 한다(월 100t 정도의 광석을 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미쓰비시가 금광과 철광 개발에 주력하면서 연화광산 개발에 여력이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천 주민, 마을의 비약적 발전 기대
 
연화산에 있는 바위절개지. 송정리천 이점교에서 광미댐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다. 일제강점기 미쓰비시가 광산개발에 필요한 신작로를 내기 위해 요새처럼 막고 있던 계곡의 바위를 절개했다고 한다.
 연화산에 있는 바위절개지. 송정리천 이점교에서 광미댐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다. 일제강점기 미쓰비시가 광산개발에 필요한 신작로를 내기 위해 요새처럼 막고 있던 계곡의 바위를 절개했다고 한다.
ⓒ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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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가 연화광산을 매수할 당시 소천면 대현리(지금의 석포면 대현리)는 태백산맥 서쪽 산기슭의 보잘것없는 마을이었다. 주민의 생활도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특히 1931년에는 참혹한 흉년이 들어 화전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고 한다.
 
"금년도 농작물의 감수는 산중이 더욱 우심한 바, 경북 봉화군 소천면 일대에 거주하는 화전민은 농작물이 전멸 상태인데다가 그들의 유일한 대용식물인 감저(감자), 옥수수, 도토리까지도 얻어 볼 수 없는 참혹한 흉년이다. 피해민 435호의 인구 1696명은 목전에 닥친 엄동을 지날 길이 막연하여 기아선상에서 유리표박하는 중이다."(동아일보 1931.11.29.)
 
살기 힘든 산골짜기 마을 소천에 그즈음 도로가 개통되어 교통이 편리해진 데다 미쓰비시가 연화광산까지 개발하게 되자 주민들은 소천이 비약적 발전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소천번영회가 조직되어 발전축하식이 열리고 5일 동안 각희(씨름)대회, 연주회, 운동회 등 각종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동아일보 1935.5.9.).

미쓰비시의 연화광산 개발이 주민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연화광산에서 본격적인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일제강점기 미쓰비시의 주요 광산 목록에 연화광산이 없는 것으로 봐서, 소천 주민이 기대했던 만큼의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강점기 광산·제련소로 환경파괴 극심
 

일제의 식민지 수탈 과정에서 이루어진 조선에서의 광산 개발은 심각한 환경오염을 초래했다. 1930년대 말 조선에 습식제련소와 건식제련소를 합해 885개의 제련소가 있었고 4392개의 가행 광산이 있었는데, 흘러나오는 오수와 매연으로 하천의 물고기가 전멸하고 과수원과 농작물의 수확이 감소하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고 한다.
 
"대개 광산작업은 하천 부근에서 실시하고 있어 하천물을 많이 사용하고 있느니만치, 광산 채광 제련하고 나오는 배수는 흑토가 많아서 하천 일대가 흑토이화(黑土泥化)하는 관계로, 하천 어족은 물론 각 동물·식물까지 전멸시키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예컨대 압록강 지류의 중요지대인 삭주천과 초산군 충용강에 열목어와 장어 은어 등 어족이 많이 번식하고 있는데, 이것이 광산 개발로 인하여 일 년 동안 전부 이토화하고 있고, 또 충용강 연안 광산에서는 청산가리의 독약을 사용하는 관계로 그 독약이 하천어족을 독살시키고 있어서, 근래 양(兩) 천은 이토화 독약화로 어족은 일미도 볼 수 없게 되었다 한다."(동아일보, 1939.2.21.)
 
광산 폐수로 인한 피해는 봉화에서도 나타났다. 미쓰비시가 연화광산을 인수하기 1년 전인 1934년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에 있는 송본(松本)광산에서 폐수로 인해 심각한 피해가 나타났으며, 마을 주민들이 광산회사와 경북도에 탄원서와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송본광산에서 어떤 광물이 채굴되었는지 확인되지는 않지만, 법전면에 금을 주로 캐는 붓든광산, 법전광산, 풍정광산 등이 있었던 것으로 봐서 송본광산도 금광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송본광산의 대리 정상좌길(井上佐吉)씨는 작년에 도광기(광석을 부수는 기계) 십오 마력을 사용하여 청산가리(=싸이나수)로 광석을 빠어온 바, 연사황토갈수(鉛砂黃土渴水)가 흘러 하류의 연계답인 법전면 풍정리, 명호면 도천리의 양 동리 삼백여 두락(마지기)은 가을의 실수확을 본바 5할 감수를 보는 생활상 일대 위협을 얻게 되며, 심지어 지질이 농화하여 불모지가 되어 가고, 금년도도 벌써 종묘기가 임박함에 농사일을 착수치 못하고, 더욱 우심한 것은 의복의 빨래도 할 수 없어 헤매이며 음료수까지 일대곤란을 받게 되므로..."(동아일보 1935.4.8.)
 
일제강점기 광산과 제련소에서 심각한 환경파괴가 나타난 것으로 봐서, 미쓰비시 연화광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면 연화산 일대와 송정리천도 일찍부터 심각하게 오염되었을 것이다. 미쓰비시 연화광산이 소규모 개발에 그치면서 소천의 비약적 발전을 기대한 주민들은 실망했을지 모르지만 심각한 환경파괴는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영풍이 연화광산을 대규모로 개발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환경파괴가 결국 연화광산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영풍의 환경오염 해결은 식민지 유산 청산 과정의 하나
 
2019년 10월의 연화광산 선광장 모습. 1960년대 영풍이 만들었던 콘크리트 구조물이 흉물처럼 남은 채 수풀에 가려져 있다.
 2019년 10월의 연화광산 선광장 모습. 1960년대 영풍이 만들었던 콘크리트 구조물이 흉물처럼 남은 채 수풀에 가려져 있다.
ⓒ 손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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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과 해방 후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환경오염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환경오염에 이른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대표적인 환경오염 사건으로 일본 최대의 구리광산이었던 아시오 광산의 광독 사건과 미쓰이 금속의 가미오카 광업소가 유발한 이타이이타이병을 들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환경오염이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 이식되었고, 해방 후 식민지 유산이 청산되지 못하면서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동일한 유형의 환경오염이 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영풍이 연화광산과 석포제련소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일으킨 환경오염은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 유산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풍의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상실된 자연성을 회복하는 일임과 동시에 일제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덧붙이는 글 | 다음 연재 글은 '⑧ 영풍의 연화광산과 폐갱도'입니다.


태그:#영풍 석포제련소, #환경오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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