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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그 전쟁을 주도했던 많은 주역들은 이미 사라졌다. 그 전쟁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수많은 이들 또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식민지배보다 큰 비극이었던 분단과 전쟁. 이 이야기는 그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한 소년의 경험과 성장기다. 이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증언을 해준 이철옥의 이야기는 소박하지만 진솔하다. 높고 고창한 관념의 말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에서 길어 올린 구체적 삶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 기자 말

한탄강(大灘江)은 한여울, 즉 큰 여울을 가진 강이었다. 북동으로 철원, 연천, 남동으로 포천, 동두천에도 지류를 가졌다. 지반이 깎여 절벽 아래로 흐르는 이 강이 38도 선에 위치했다. 그러니 이 강은 남과 북의 자연적 경계이기도 했다. 열두 살 철옥과 그의 늙은 어머니 그리고 이웃집 아주머니로 구성된 이 집단이주 시도자들은 이 강을 건너는 다리서 경비병과 맞닥뜨린 터였다.

탈북하다 마주친 군인의 한마디... "보이지 않게 그늘로 걸어라"

- 이주자들은 대개 여성 노약자들이고, 성인 남자는 없었던 거죠?
"없죠. 그건 아예 자체가 (말이) 안 돼! 어쨌든 그때는 이판사판 아니요. 그래서 우리가 그랬죠. '아니, 이만저만해서 우린 간다. 가족이 다 이남에 있는데 어떻게 여기서 사나? 갑자기 삼팔선이 맥혔는데... 뭐라고 한들 당신들이 곧이듣겠냐?' 했더니 한참 고민을 해요. 그때가 오후 다섯 시 여섯 시나 됐을라나? 사월이니까. 석양이 지잖아요. 그때 한탄강 다리에 시멘트 난간이 있고, 좀 높았어요. 경비가 그러더라구. '그럼 그늘진 쪽으로 걸어라. 멀리서 봐도 보이지 않게...' 당시 경비병이 하나만 있으니까 왔지, 둘만 있어도 우리가 못 왔다고. 당시엔 그 사람들도 물도 덜 들었고."  
        
경계병을 피하느라 철옥 일행은 종으로 횡으로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시내로 들어가는 경우도 생겼다. 한탄강을 건넌 전곡읍에서 그런 일이 생겼다. 밤이 되자 산당 선전영화 관람에 동원돼야 했다. 낮에는 공동작업을, 밤에는 문화선전에 동원됐다. 영화가 끝나기 전, 일행은 몰래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러다 청년 동맹원들에게 붙들렸다. 그들은 매섭게 그들을 추궁했다. 

"동네 노인네들이 지나다가 우리를 봤어요. '뭐냐?' (다른 청년들이) 그래요. '이것들이 남으로 간다!' 그러니까 노인들이 청년들을 나무라요. '왜 길가는 사람들 붙잡고 그러냐. 놓아줘라.' 그때까지만 해도 (동네 어르신들) 말을 들었다고."
 
해방후 북한에서 벌어진 과격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삼팔선을 넘는 이들. 철옥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한탄강을 건너고 소요산을 넘었다.
 해방후 북한에서 벌어진 과격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삼팔선을 넘는 이들. 철옥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한탄강을 건너고 소요산을 넘었다.
ⓒ 원동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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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을 꼬박 걸어온 길이었다. 한탄강을 넘은 그들은 소요산 쪽으로 길을 든다. 다시 경비병을 만날 수는 없었다. 

"한밤중인데 산을 넘으려니까 아직 눈 얼음이 그대로더라고. 그렇게 산을 넘는 데 아주 깜깜해요. 힘들죠. 근데 그때 멀리 불빛이 보여요. 화전민 같은데, 불 켜진 오막살이가 있는 거예요. 마침 그날이 제삿날이었어요. 그래, 제사음식도 얻어먹고... 그네들이 그래요. '여기서부터는 남쪽이니까 안심하고 가라'고. 그 길로다가 소요산 뒤로 넘어 동두천에 오니까 날이 훤하게 밝은 거예요. 그러니까 나흘이 걸렸다고. 오기까지..."

동두천은 당시 미군정이 지배하는 최북단 마을, 첫 자유도시이기도 했다. 경원선과 3번 국도가 나란히 정북으로 달리는 길. 소요산은 동두천 동북쪽에 위치했다. 당시 동두천에도 미군들이 주둔해 있었다.

철옥 일행은 다른 피난민들처럼 미군에 의해 조사를 받았다. 북한에서처럼, 할머니들과 어린애로 구성된 그들에게는 별 경계가 없었다. 간단한 인적사항을 적은 뒤, 미군들은 옷을 다 벗은 그들에게 DDT 가루(농업용 살충제의 일종-편집자 주)를 뿌렸다. 거의 누구에게나 이가 득실득실하던 때였다. 전염병 방제는 모든 집단 통제의 기본이었다. 그 후 어디로나 갈 '자유'가 주어졌다.

"북에서 본 로스케(소련군) 병사들하고 미군들은 달랐어요. 북에선 그들이 동네 약탈도 많이 했다고. 근데 동두천서 본 미군들은 정복을 입고, 점잖았어요. 근데 동두천서 참 한심한 걸 봤다고. 내 고향만 해도 산골인데도 전기가 부족하지 않고, 거기 함흥, 흥남, 청진, 나진, 이쪽은 전부 공업시설이 발달해서, 그때만 해도 공해가 있었다고.

근데 여기 와보니까 논에 뭔가 시커먼 게 돌아가요. 쿵쿵쿵쿵 소리를 내면서. 사월 농경을 시작하니까. 그게 뭐냐 물으니까, '발동기'라고. 근데 북에선 그런 걸 다 전기로 했어요. 우리가 시골집이었는데 전구 외등이 오백 촉이었다고. 마을서 누구나 전기를 쁘라치(도용) 해서 다 쓸 수 있어요. 그때만 해도 밥도 굶지 않았는데 여기 와선 굶었어요."


당시엔 밥 굶지 않았던 북한... 강화에서 헤어진 엄마, 다신 만나지 못했다
 
사람들 눈을 피해 고향을 떠나고, 사람들 눈을 피하기 위해 석양이 지는 다리난간의 그늘로 걸었다. 그게 전쟁으로 다가올 분단의 삶이었다.
▲ 한탄강 다리를 건널 때, 다리난간 그늘로 걸어야 했다. 사람들 눈을 피해 고향을 떠나고, 사람들 눈을 피하기 위해 석양이 지는 다리난간의 그늘로 걸었다. 그게 전쟁으로 다가올 분단의 삶이었다.
ⓒ 원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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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하게 고향은 어디이신 거죠?
"그걸 말할 수는 없어요. 내가 남쪽으로 왔는데, (말하면) 남은 고향 사람들이 고초를 당해요. 나는 이산가족 찾기도 안 했다고. 가족 찾으려면 이름, 나이, 고향... 이런 걸 다 말해야 되는데... 이미 그 사람들은 다 숨기고 사는데 내가 말하면 되갔어요? 내가 그 사람들 찾는다고 도와줄 수도 없는 일인데..."

- 그래도 가족이 남으로 내려와 선생님을 찾을지도 모르잖아요.
"찾는다 하면 강화도로 왔겠죠. 내가 강화도서 계속 살았어요. 날 찾으면 거기로 올 거니까."

철옥 일행이 목표로 삼은 곳은 강화도였다. 먼 친척이 사는 곳. 그들은 서울을 거쳐 인천으로 갔다. 대중교통이라곤 철도가 거의 전부인 시절이었다. 경원선으로, 그리고 경인선 철길을 따라 길을 갔다. 인천에서 강화로 가는 배를 탔다. 철옥은 친지 집에 홀로 남았다. 남은 가족 때문에 어머니는 다시 길을 되짚어 북으로 갈 거였다. 거기서 본 어머니의 뒷모습이 혈육과 접촉한 마지막이었다.
 
이철옥 선생은 자주 '한심한 일'을 입에 달았다. 북한의 공산당 체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가족들과 생이별을 할 때, 밥 지을 불을 구걸하는 병들을 볼 때, 전쟁으로 죽어 널브러진 시체들 이야기를 하면서 '한심한 일'이었다고 후렴구를 넣었다. 다만 어머니는 '한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먼저 간 남편을 대신해 집안 살림을 책임진 여성이었다. 자신들을 인도해 남으로 월남할 만큼 길과 세상에 대해서도 밝은 사람이었다. 단호하게 결단한 사람이었다. 한심한 건 세상이었다. -기자 주

- 전쟁 전까지 3년여, 강화에선 어떻게 지내셨어요.   
"친척 댁에서 도움 받고 있다가, 그분도 어렵고 하니까 곧 떠났어요. 난 거기서 겨우 초등학교 졸업장은 받았어. 이름 아는 친구들이 한 열 명 되는데, 한 친구집이 문방구를 했거든. 그 친구가 좀 게을러. 내가 숙제 해주면 문방구는 걔가 댔어. 죽으라는 법은 없더라고.(웃음) 성격 활발하고, 놀기 좋아하고. 걔도 어머니가 없어서 나랑 비슷했거든. 친구들이 도시락도 하나 더 싸주고. 졸업장 받은 때부더 홀로서기를 한 거야. 집도 절도 없고, 부모도 없으니까."

일가붙이가 모두 없었지만, 그는 강화를 떠나지 않았다. 세들어 살던 집주인은 공무원이기도 했는데, 집서 다른 일을 겸업했다. 동력도 없이 나무직조기를 들여다 놓고 '소창'이라 부르는 직물을 짜는 일이었다. 우리가 흔히 이불 '홑청' 혹은 '속청'이라 부르는 그것.

이철옥 선생은 이후 강화의 심도직물에서 제대로 일을 배우며 '기술자'로 성장하게 되는데, 그 기초가 여기서 시작된다. 1933년 강화의 대지주 홍재묵, 홍재용 형제가 설립한 조양방직으로부터 평화직물, 이화직물 등까지 한때 강화도는 국내 직물산업의 전성기를 이뤘는데, 그 흐름에 그도 있었다.
 
 강화도는 1930년대로부터 1970년대까지 우리 직물산업의 중심지였다. 그는 1947년 설립된 심도직물에서 기술자로 일하며 강화에 온전히 천착한다.
▲ 강화도 소창박물관에서 이철옥 선생.  강화도는 1930년대로부터 1970년대까지 우리 직물산업의 중심지였다. 그는 1947년 설립된 심도직물에서 기술자로 일하며 강화에 온전히 천착한다.
ⓒ 원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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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창의 원료가 되는 재료는 목화. 삼베에서 무명으로 전환된 문명 발전의 이 이야기엔 문익점이 빠지지 않는다. 고려말인 1363년, 외교 사절단으로 선발돼 원나라로 간 익점은 목화씨 몇 개를 들여와 장인 정천익과 재배한다. 솜옷과 솜이불이 대량 생산되면서 비로소 이 땅의 겨울은 더 견딜 만한 곳이 됐다. 나라 밖 이동을 막는 경계와 금지를 뚫었던 목화씨처럼, 그도 1947년 봄에 그러했다. 결국 다른 땅에 뿌리를 내려 번성한 목화꽃처럼 그도 이후의 세월에 그러했다.
                                   
(* 다음 편에서 계속)   

[지난 기사]
①열네살 때 탈북, 열일곱 때 전쟁... 그의 기구한 사연 http://omn.kr/1o0bx

덧붙이는 글 | 이 내용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출품한 상태이고, 영화는 아직 어느 곳에서도 상영된 적이 없습니다. 영화제는 9월에 열립니다.


태그:#이철옥, #강화소창박물관, #한국전쟁, #전곡한탄강, #동두천소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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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흙길을 걷는다. 글자 없는 책을 읽고, 모양 없는 형상을 보는 꿈을 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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