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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들어 주는 아이>표지
 <가방 들어 주는 아이>표지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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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비바람이 세차게 내리더니 오늘 아침에는 거짓말처럼 해가 쨍하게 떴다. 식구들이 다 나간 후 베란다에 빨래를 널고 강낭콩 새싹이 얼마나 자랐나, 사루비아 새싹은 언제쯤이면 강낭콩처럼 쑥쑥 클까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지난 십 년 동안 아이들이 훌쩍 자라고 나는 나이만 먹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다 오는 일상은 똑같다. 다만, 아이들이 없던 때는 오롯이 내 책만을 빌렸다면, 이제 아이들 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 엄마를 닮아서 아이들도 학교 도서관에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기가 읽을 책을 한 번씩 빌려오는데, 어제는 고정욱의 <가방 들어 주는 아이>라는 책을 빌려왔다.

'학교폭력에 대한 이야기인가 제목은 많이 들어봤는데 이제야 읽어 보게 되네' 하고 잠들 준비를 마친 아이들을 불러 모아 책을 읽어주었다.
 
<가방 들어주는 아이>의 내용은 이렇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장애를 가진 영택이와 석우는 한 반이 되었다. 첫날 선생님은 석우에게 '영택이 다리가 불편하니 책가방을 들어다 주라'고 주문했다. 나는 석우도 어린 아이인데 등하교시 다른 친구의 책가방을 들어주라는 건 좀 억지라고 생각했다.
 
기꺼운 일은 아니었지만, 석우는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순수한 아이였으므로 하교 후 축구를 하고 싶어도 참고, 무더위도 이겨 가며 영택이의 가방을 들어다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택이의 생일이 되어 영택의 엄마가 아이들을 초대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오지 않아서 엄마와 영택은 무척이나 슬펐다. 1학년 때도 그랬는데 올해도 그런 일을 겪으니 속이 많이도 상했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석우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영택의 엄마는 석우에게 멋진 점퍼를 선물했다. 그전에도 고맙다며 사과나 배를 한 상자씩 보내곤 했는데 이번에는 고가의 선물이라 석우의 어머니는 받기가 부담스러웠다. 석우는 그 점퍼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눈밭에 굴러도 끄떡없을 것 같은' 멋진 점퍼였다. 석우 어머니는 그 점퍼를 돌려주러 갔다가 눈이 퉁퉁 부어서 돌아왔다.
 
석우는 점퍼가 다시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엄마의 얼굴을 보고는 영택이네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궁금해한다. 석우의 어머니는 영택이가 가방을 들어다 주어 점퍼를 보낸 줄 알고 돌려주려 했는데, 영택의 엄마는 그게 아니라고 말한다. 석우가 영택의 '친구'가 되어 준 것이 고마워서 보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나는 그 부분에서 그만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영택이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려왔다. 책을 읽어주다가 그만 펑펑 울었다. 양쪽에서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생경한 분위기가 되었다.
 
"엄마 감동 받았어?"
"응, 그래 맞아."

 
눈물을 닦고 코를 한차례 풀고 다시 책을 읽어주었다.
 
방학을 맞아 영택은 수술을 하게 되었고, 수술이 잘 되어 양쪽 겨드랑이에 끼는 목발이 아닌 지팡이 하나만으로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다시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은 그 모습에 환호했다. '영택이가 많이 좋아졌구나' 모두가 한마음으로 축하해주었다.
 
2학년이 끝날 무렵 석우는 단상에 올라가 표창장을 받는다. 몸이 불편한 친구의 가방을 지난 한 해 동안 들어다 주어 다른 친구의 모범이 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자의로 가방을 들어다 준 건 아니었지만 문방구 아저씨나 동네 어른들에게 칭찬을 듣기도 일쑤여서 석우는 으쓱할 때가 종종 있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을 아이들이 어쩌면 풍요 속에 사는 지금의 아이들보다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석우는 영택의 가방을 들어주며 참 많이 성장했을 것이다. 왜 선생님이 석우에게 가방을 들어주라고 부탁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오랜만에 가슴을 울리는 책과 만났다. 책을 안 읽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책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요즘인데 참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동생에게 조카에게도 읽어주라고 연락하니 동생은 이 작가가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이 울컥했다. '아,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그려낼 수 있었겠구나', 또 한 번 시야가 흐려졌다.
 
별로 웃을 일도 울 일도 없는 세상, 우리가 다시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찾았다. 나부터도 휴대폰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며 책 읽을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는데, 이런 보석 같은 책을 발견할 때 얼마나 마음이 부자가 된 기분이 든다.
 
5월에 처음 학교에 들어가서 유치원도 학교도 다 좋다는 둘째 아이가 "엄마, 오늘도 감동적인 책 빌려올게"라며 집을 나선다.
 
주변에 아이 책을 선물할 일이 있으면 꼭 이 책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은 아이 모두가 심성이 고운 사람으로 자랐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말이다. 

가방 들어주는 아이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고정욱 지음, 백남원 그림, 사계절(2014)


태그:#고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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