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손해 보면서 사세요, 그게 더 마음 편해요."

어렸을 적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유명 강사나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다 착한가 보다. 손해 보면서 사는 것이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해준다고 하니까.

나 역시 손해 보는 인생으로 대부분을 살아왔다. 참거나 웃어 넘기거나.

그런데 이렇게 살다 보니 겉으로는 유화스럽게 보여도 가끔 속에서는 용암이 들끓는다 못해 터져버린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화기를 누르고 나를 낮추는 방식을 어느 정도 터득하기도 했다.

길을 걸을 때면 두 명으로도 꽉 차는 인도에서 마주오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나는 자동적으로 한쪽에 최대한 붙어서 걸어간다. 그들이 가는 길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그러나 에티켓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들은 전차마냥 인도를 다 차지하고서 나에게 돌진한다. 결국 난 차도 쪽으로 붙어 걷는다. 그런데도 내 어깨를 툭 치고서 간다. 이때 내가 그들을 쳐다보면 이젠 그 둘이서 나를 째려본다.

'나 지금 당신들한테 피해 안 주려고 인도에서 차도 쪽으로 내려올 뻔 했는데?'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어깨가 부딪쳤으니 나는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뜨거운 속을 삭힌다.

'와, 저런 삐삐- 내가 진짜 한마디 삐삐-'

이렇게 와일드한 스릴러 욕쟁이 영화를 머릿속으로 몇 편 찍다 보면 어느새 내 안에 있던 화기가 가라앉는다. 이 방법은 굉장히 좋다. 나처럼 소심하고 민감한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진심으로 웃어 넘길 수 없기 때문에 상상으로나마 분풀이를 하면 그만이다.

집에 가는 길이면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가 두 번 정도 있다. 나는 이렇게 다 커서도 신호등이 없는 도로를 건널 때면 손을 번쩍 들고 건넌다.

한번은 직장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던 때였다. 횡단보도의 신호등 불이 깜빡거려서 급하게 뛰어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난 어김없이 손을 들고 건넜다. 옆에 있던 직장 동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어찌나 웃던지. 그 중 한 분은 이렇게 말했다. "다 큰 어른이 손 들고 횡단보도 건너는 것은 생전 처음이네, 하하"

'그게 뭐 어쨌다고. 어린이들만 손들고 건너야 되는거야? 그럼 애들한테 왜 그렇게 가르치는데?'
 

우리 동네는 횡단보도가 굉장히 많다. 그렇다 보니 몰상식한 어른들의 무단횡단은 동네의 일상처럼 되어 버렸다. 작년 가을이었던가. 횡단보도의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때 한 할머니께서 주변을 살피시더니 구부정한 허리에 절뚝거리는 무릎을 부여잡고서 전력 질주를 하시는 게 아닌가. 내 옆에는 유치원생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부끄러워... 아이들이 뭘 보고 배우려나.'
 

이후 난 파란불이 들어온 신호등을 확인한 뒤 손을 들고 건넜다. 나도 보통 때는 손을 들지 않는다. 무신호등 횡단보도나 신호가 깜빡이는 상황에만 손을 든다. 그런데 아이가 할머니의 경주를 쭉 지켜봤기에 뭔가 액션을 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행이 옆에 엄마가 손을 들고 건너자며 아이에게 말했고, 그 아이는 내 모습을 본 후 손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이러한 상황은 손해를 보면서 사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생활교육자로서 어른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물론 그때도 내가 손을 들자 맞은편 사람들이 나를 흘끗흘끗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아이는 어른을 보고 배운다는데.

횡단보도 이야기는 많지만 하나 더 해보자면, 무신호등 횡단보도에서 손을 들고 가던 때였다. 그때 저 멀리서 자동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고 그 차의 운전자를 보면서 건넜다. 그래야 나를 인지할 테니까. 그러나 차는 멈추지 않고 내 몸에서 약 50cm도 안 되는 거리까지 나를 몰아 붙였다. 나는 온힘을 다해 피했다. 그 차는 그대로 계속 달려갔다. 나를 아예 인지하지도 못한 채. 스마트폰을 보면서 운전하시는 분이었기에 혹여나 내가 중요한 일을 방해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하염없이 갔다.

'망할.'

질서는 나만 지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무질서한 사람이면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것이 교통사고다. 나만 잘 지키는 착한 사람이 되었다간 순식간에 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 그러니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주위에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오는지 잘 살펴보고 손을 번쩍 들고 뛰어가야 한다. 자동차를 배려하는 보행자도 나처럼 위험한 상황을 겪을 수 있으니 조심, 또 조심이다.

손해 보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적어도 상대방의 언행으로 인해 내 감정과 시간이 소모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작은 일을 큰 일로 부풀리는 사회 부적응자들이 있어서 문제가 된다. 이럴 때는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자리를 피하는 것이 우선이다. 절대 싸우지 말자. 나는 소중하니까.

착하면 손해인 세상은 이미 인간이 태어났을 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욕망이 바탕인 약탈사회에서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포기하거나 뺏긴다는 의미니까.

그래도 난 손해 보면서 사는 인생을 택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있기에 이 점이 편하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좀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인간의 도리를 누가 정한 것도 아니고 착해서 손해만 보는 순진한 바보라고 놀림감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착한놈이 되면 내 마음이 편한데.

태그:#일상, #손해, #교육, #질서, #예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보이는 사실, 그 이면의 진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