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24 08:43최종 업데이트 20.07.24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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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언제나 우상이 있었다. 돌아보면 그 우상은 나의 이상향과 이상형을 투영한 사람들이었다.

어른이 될수록 우상으로 남기고 싶은 사람은 가능한 멀리서 볼수록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이가 늘어날수록 우상이라고 꼽는 사람에 대해 모르면 모를수록 좋다고도 생각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예술가나 느닷없이 스스로 숨을 끊은 유명인에 대한 일종의 노스탤지어를 갖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의 우상은 시기별로 사라지기도 하고, 대체되기도 했다. 가수도 있었고, 영화배우도 있었고, 철학가, 혁명가도 있었으나 그 중 단연 1등은 시인 김수영이었다. 그랬었다. 이것은 과거형이다. 김수영은 나의 우상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오늘은 과거, 나의 우상이었던 김수영의 무덤으로 향했다.

절망  
     
김수영의 무덤은 도봉산 자락에 있다. 오로지 그의 무덤만을 보기 위해 나는 산을 올랐다. 오늘 갑자기 왜 김수영의 무덤을 봐야겠다고 생각했을까. 이렇다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발걸음은 이미 도봉산 등산로 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마침 등산객들이 하산하는 시간대였다. 등산복과 등산화를 신고 산을 내려오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럴듯한 뿌듯함이 맺혀 있었다.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나는 단화를 신고, 조금은 우울한 표정으로 그저 뚜벅뚜벅 걸었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김수영의 시 '절망'

때때로 절망스러울 때는 어김없이 김수영의 시 '절망'을 떠올렸다.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중략)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삶을 살아가는 시간이 축적될수록 내게 체감됐고, 증명됐다. 예치기 않은 구원의 순간이 오든 말든, 절망은 끝까지 반성하지 않기에 비로소 절망이다.
 

도봉산 등산로의 김수영 시비 ⓒ 권은비

 
시 구절을 되뇌며 산을 오르니 어느새 김수영의 '시비'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애초에 내가 상상했던 '무덤' 같은 형상은 없고 오로지 돌로 조각된, 아주 전형적인 시비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김수영 시비에는 한문으로 '김수영 시비'라고 쓰여 있었고, 그의 시 '풀'의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이 시비 밑에 김수영의 화장한 유해가 묻혀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시비의 바닥에는 촘촘하고 빼곡하게 회색빛 사고석이 심어져 있었다. 시비의 왼편에는 김수영의 얼굴이 부조로 조각돼 있었는데 누가 조각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시비 앞에는 국화꽃이 놓여 있었으나 그것 역시 언제, 누가 놓고 간 것 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시비 주변에 무심하고 무성한 풀들을 보니, 수많은 명작을 남긴 예술가도 '죽으면 그뿐이다' 싶다.

다른 세계

시인 김수영이 더 이상 나의 우상이 아니게 된 계기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냥 내가 변했다.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이라고, 김수영 스스로 자신의 폭력을 시로 썼던 '죄와 벌'처럼, 그의 작품 곳곳에서 '여보'와 '아내'와 '여편네' 사이의 간극이 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김수영은 천천히 나에게 다르게 다가왔다.

김수영이 나 따위의 사람의 우상이 아니게 된 것은 이 세계에 하등의 영향도 주지 않는다. 그저 김수영을 우상으로 여기고 그의 문장 하나하나를 귀하게 아껴 읽고 곱씹었던 나는 이제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나만 알 뿐이다.

그러고 보면 피카소는 수많은 여성들을 휴지장처럼 갈아치운 사람이었고, 그 유명한 멕시코 민중미술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 칼로에게 진상 중의 진상이었다.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철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을 펴낸 칸트는 오로지 백인만이 '좋은 인종'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남긴 고약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나의 우상이, 더 이상 나에게 아무 존재가 아닌 것이 되었을 때, 나는 가장 먼저 서가를 정리한다. 나의 작은 서가에는 디에고 리베라의 화집은 없어도 프리다 칼로의 화집은 꽂혀 있다. 과거 나의 우상이었던 김수영의 시집과 책들은 아직까진 제자리에 있으나 고은의 시집과 책은 모조리 처분해 버렸다. 최근엔 어느 미술가와 만화가의 화집도 차곡차곡 쌓아 집 앞에 내다두었다.
   

도봉산 등산로 입구 풍경 ⓒ 권은비

   
내가 어른이 된 후, 사람들은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도 저마다 살고 있는 세계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김수영은 더 이상 나의 우상은 아니지만 '절망'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시인인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를 사랑했던 나와 나의 세계는 이제 없고, 나는 그때와는 조금은 다른 세계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따위는 누군가의 우상은 절대 될 턱도 없지만, 엉망진창으로 살더라도 절망적인 어른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김수영의 시비를 뒤로하고 하산하는 등산객들 사이로 들어갔다. 지겹도록 절망스러운 세계가 반복되더라도 다시, 오늘 내가 절망스러운 말들로 누군가를 난도질하더라도 기어이 반성하고 내일 다른 세계를 맞이해보자고 스스로 다짐하며 발걸음에 힘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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